모화관(慕華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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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 중국 사신 및 중국에 보내는 사절을 맞이하고 전송하던 곳.

개설

1407년(태종 7)에 건축된 모화루(慕華樓)에서 시작된 건물로, 명과 청의 사신이 한양에 출입할 때, 왕이 친히 신하들을 거느리고 영접하고 전송하였으며, 중국에 보내는 사절도 이곳에서 맞이하고 전송하였다. 중국 사신이 오지 않았을 때는 무과 시험이나 군사 훈련, 기우제, 일본·유구·야인 및 신하들에 대한 각종 연회, 왕실의 피서, 국상 때의 노제(路祭) 등이 행해졌다. 중국에 보낼 외교문서를 최종 점검하는 장소이기도 하였고, 왕릉의 봉분 잔디도 이곳에서 조달하였다.

위치

한성부의 돈의문 밖 서북쪽인데, 일제시대에는 경성부의 서대문구관동·현저동·행촌동·교북동 일대이고, 현재는 서대문구현저동에 속한다.

변천

1407년(태종 7)에 개경의 연빈관(延賓館)을 모방하여 돈의문 밖에 누각을 짓고 모화루로 명명하였고(『태종실록』 7년 8월 22일), 이듬해 한양 주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기 위하여 남쪽에 연못을 팠다(『성종실록』 13년 11월 9일). 1430년(세종 12)에 주변의 개천을 수축하고 모화루를 이층집[重屋]으로 개조하고 연못 주변에 담을 쌓고 버드나무를 심은 후 모화관으로 개칭하였다[『세종실록』지리지 경도 한성부]. 이듬해 영접도감에서 모화관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연산군은 이곳에 열무정(閱武亭)·칠덕정(七德亭)·희우정(喜雨亭) 등을 추가로 짓고, 목책을 설치하여 자신이 올 때만 사용하도록 하였다. 1537년(중종 32) 모화관 앞의 홍살문을 청기와를 얻은 쌍주문(雙柱門)으로 고쳐 짓고 영조문이라 이름했는데, 이듬해 명 사신 설정총(薛廷寵)의 의견을 받아들여 영은문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우고 돌아간 양호(楊鎬)의 비석을 이곳에 세웠고, 명 사신 주지번(朱之蕃)은 편액을 남겼다.

호란 이후에는 청의 사신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1642년(인조 20)에는 영은문을 중수하였고, 1663년(현종 4)에는 모화관을 도랑의 석축을 개수하여 사치스럽게 개축하였다(『현종실록』 4년 4월 27일). 1731년(영조 7)에는 모화관의 남문을 수리하였다. 대한제국 선포 후 영은문은 훼철되었고, 독립협회가 국민들의 의연금을 모아 1896년 독립문을 세웠고 모화관은 이듬해 독립관으로 개축되었다.

형태

모화관에는 이층으로 된 누각 형태의 본채에 여러 개의 정자가 부속되었으며, 남쪽에는 사람이 빠져죽을 정도로 깊은 연못이 있었고, 사신 접대를 위한 의례·공연이나 무과 시험·군사 훈련을 할 수 있는 넓은 공터가 딸려 있었다. 북쪽으로는 원래 홍살문을 세웠다가, 두 기둥 위에 우진각지붕을 얹고 청기와와 잡상(雜像)으로 마무리한 문이 세워져 있었다.

현황

영은문의 주초(柱礎)는 1963년 사적 33호(현 서울 서대문구현저동 945)로 지정되었으며, 1979년 성산대교 공사로 독립문과 함께 원래 위치에서 서북쪽으로 70m 지점으로 이동되었다. 독립문 남쪽에 있던 독립관은 불타 없어졌다가, 1996년 정부가 서대문형무소 자리에 독립공원을 조성하면서 독립문의 서북쪽에 복원되었다.

참고문헌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통문관지(通文館志)』
  • 『문헌비고(文獻備考)』
  • 『한경식략(漢京識略)』
  •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 『궁궐지(宮闕志)』
  • 『경성부사(京城府史)』
  • 『별건곤(別乾坤)』
  • 『동아일보(東亞日報)』
  • 李鉉淙, 「明使接待考」, 『鄕土서울』 12, 196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