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무정(閱武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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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창덕궁 후원 봉모당(奉謨堂) 터에 있던 정자.

개설

열무정은 주변의 좋은 경치와 넓은 뜰을 배경으로 연회가 이루어지거나 군사훈련을 감독하는 장소로 이용되었다. 1776년(정조 즉위)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설치하면서 역대 선왕들의 유품을 열무정으로 옮기고 봉모당이라는 새 이름을 붙였다.

위치 및 용도

열무정은 창덕궁주합루(宙合樓)의 남서쪽, 열고관(閱古觀)의 서남쪽에 위치하며 남쪽으로는 운한문(雲漢門)과 통한다. 이곳에서는 연회를 열거나 군사훈련을 감독하였다.

변천 및 현황

세조는 열무정에서 연회를 베풀거나(『세조실록』 7년 11월 13일) 활 쏘는 것을 구경하였다(『세조실록』 13년 11월 25일). 예종대에는 왕이 열무정에서 술자리를 마련하거나 군사들에게 진법을 훈련시키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1504년(연산군 10)에는 열무정을 다시 짓게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8월 28일).

1776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였는데,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되는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하였다. 부설 기관으로 서향각(書香閣), 열고관, 개유와(皆有窩), 서고, 봉모당을 두었는데 봉모당이 바로 열무정이다. 주합루 남쪽에 열고관이 있었고, 봉모당은 열고관 서남쪽에 있었다. 봉모당은 규장각 부설 기관 중 가장 으뜸가는 기관으로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보관하던 곳이다. 다시 말해, 주합루가 현재 왕들의 기록을 보관하는 곳이었다면 봉모당은 선대 왕들의 유품을 보관하는 곳이었다. 그래서 봉모당에는 어제·어필·어화(御畵)·국왕의 유언을 적은 고명(顧命)·선왕이 남긴 교훈인 유고(遺誥)·밀교(密敎) 및 선보(璿譜)·세보(世譜)·보감(寶鑑)·지장(誌狀) 등을 보관했다. 그러나 봉모당에 있던 유품은 1857년(철종 8) 1월 이문원(摛文院) 북쪽에 있던 대유재(大酉齋)로 옮겨졌다.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좀 더 쉽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융희 2)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하였다. 1911년 창덕궁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었다. 이때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다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1969년 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형태

열무정의 형태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지만, 세조대에는 열무정 2칸의 재목을 철거해 임영대군(臨瀛大君) 이구(李璆)의 정자 건축에 쓰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세조실록』 14년 5월 22일). 이때 규모가 한 번 축소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여지승람(輿地勝覽)』「궁궐지(宮闕志)」에서는 열무정, 즉 봉모당에 대해 고제(古制)를 따라 고치지 않고 다만 감탑(龕榻)을 설치하여 분봉(分奉)한다고 하였다. 이를 통해 원래 열무정의 형태가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동궐도(東闕圖)」의 묘사를 참고하면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이며 화려하게 단청을 했다. 남쪽에는 행랑을 두고 나머지 3면은 담장을 둘렀다. 문은 동쪽, 서쪽, 남쪽에 있었는데 남쪽 정문은 3문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참고문헌

  • 『여지승람(輿地勝覺)』
  • 문화재청, 『조선시대 궁궐용어 해설』, 문화재청,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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