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합루(宙合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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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금원 규장각 2층에 서쪽으로 선 누각.

개설

규장각(奎章閣)은 송나라 ‘존각(尊閣)’의 제도를 따라 1776년(정조 즉위)에 건립되었다(『정조실록』 즉위년 9월 25일). 존각이란 왕의 어제(御製)를 간직하는 집을 말하는데, “성군의 만듦은 운한(雲漢), 즉 은하수 같이 하늘에서 밝게 빛나니 이를 소중히 간직하기 위해 ‘용도각(龍圖閣)’, ‘천장각(天章閣)’ 등과 같이, 높여 기릴 만한 집을 성군마다 각각 갖추어 봉안한다.”는 제도이다. 이러한 개념은 세조 때부터 좋은 제도라며 논의되었고 ‘규장각’으로 이름 하자는 진지한 접근이 있었다. 그러나 ‘존각’을 갖추는 일이 따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숙종대에 이르러 규제를 제대로 갖추지는 않았지만, 규장각이라는 이름의 소각(小閣)을 세워 열성조의 어제를 봉안하였다.

정조가 즉위하면서 이 제도의 필요성을 역설하며 창덕궁 후원에 창건하였다. 처음에는 어제각(御製閣)이라 하였다가 숙종을 따라 규장각이라 이름 하였다. 중층 집으로 완공되어 1층에는 숙종의 친필인 옛 규장각의 편액을 걸었고, 2층에는 정조가 친히 쓴 어필 ‘주합루’ 편액을 걸었다. 주합루라는 이름을 지은 뜻은, ‘천지는 만물을 감싸고 주합은 천지를 풀무질하니 주합은 천지만물의 생성과 소멸을 주관한다.’ 하는 뜻이다. 또한 상·하·사방, 즉 온 우주가 ‘주(宙)’ 이니 이것이 합일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였다.

위치 및 용도

창덕궁 후원, 부용정(芙蓉亭) 연못의 북쪽 언덕 위에 있다. 주합루의 영역은 취병과 담장으로 둘렀는데, 어수문을 지나 계단으로 올라가면 중심에 주합루가 있고 좌측에 서향각(書香閣)이 있다. 동북쪽에 천석정(千石亭), 서북쪽에 희우정(喜雨亭)이 있다. 영역을 벗어나 서남쪽에는 봉모당(奉謨堂), 열고관(閱古觀), 개유와(皆有窩)가 있어 책을 보관하거나 열성조의 어제를 봉안하는 비슷한 용도의 집들이 하나의 군을 이루고 있다.

주합루는 당대 국왕의 어제 및 어진을 봉안하여 때마다 봉심하였다. 새로 간행되는 사서삼경 등의 책과 주자의 진상(眞像)을 보관하여 참배하는 장소로도 썼다.

창덕궁에는 이 주합루만이 아니라 동궁 영역 안에 세자의 독서와 책 보관을 위한 소주합루가 있었다. 경희궁에도 세자가 강독하던 집인 존현각(尊賢閣) 위에 주합루와 관문루(觀文樓)를 두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주합루는 학문, 책, 글 등과 관계 깊은 명칭임을 알 수 있다.

변천 및 현황

1776년(정조 즉위) 9월에 창덕궁 금원에 창건된 규장각·주합루는 별다른 건물의 물리적 변화 없이 현재까지 잘 보존되고 있다. 다만 정조 승하 이후 규장각의 위상은 급격히 떨어졌다. 규장각은 왕실 도서를 보관하는 도서관의 기능을 하다가 고종 이후에는 규장각이 인정전(仁政殿) 부근 궐내 각사로 옮겨지면서 지금은 주합루 현판만 걸려 있다. 때문에 이 누각은 주합루로 불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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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의 중층 누각이다. 여러 단의 가지런한 장대석 기단을 쌓아 높은 계단식 축대 위에 건축물을 올려놓은 듯 보인다. 이익공집이며 부연을 단 이중처마에 팔작지붕을 올렸다. 추녀마루에는 잡상 다섯이 올라 앉아 있다. 전후좌우에 퇴를 놓고 툇마루로 건물의 사방이 연결되어 열려 있다. 1층의 중앙은 대청마루, 양쪽에는 온돌방을 들였고 2층은 모두 마루로 꾸며 놓았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93년(정조 17) 갓난 옹주의 태를 주합루 북쪽 돌계단 아래 묻었다(『정조실록』 17년 4월 8일). 태를 담은 석함이 경복궁 북쪽 성 안에서도 발견되었는데, 옛 규례에는 왕자와 공주의 태를 내원에 묻었기 때문이었다.

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일성록(日省錄)』
  • 『국조보감(國朝寶鑑)』
  • 『궁궐지(宮闕志)』
  • 『다산집(茶山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임하필기(林下筆記)』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홍재전서(弘齋全書)』「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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