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윤(崔後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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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11년(광해군 3)∼1650년(효종 1) = 40세]. 초명은 최후현(崔後賢)이다. 조선 후기 인조~효종 때의 문신. 행직(行職)은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증직(贈職)은 도승지(都承旨)다. 자는 상경(象卿), 호는 녹촌(鹿村)이다. 본관은 전주(全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최래길(崔來吉)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익성군(益城君)이형령(李亨齡)의 딸이다. 영흥부사(永興府使)최기남(崔起南)의 손자이고, 영의정최명길(崔鳴吉)·도승지(都承旨)최혜길(崔惠吉)의 조카이다.

인조 시대의 활동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23세였다. 성균관(成均館)에 들어가서 공부하다가, 1644년(인조 22) 인조가 문묘(文廟)에 배향하고 성균관에서 친시(親試)를 보일 때, 정시(庭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4세였다.(『방목』 참고.) 바로 성균관 전적(典籍)에 보임되었다가, 병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 1647년(인조 25)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옮겼다. 1649년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는데, 그때 그의 행적이 뛰어나서 명성이 대단하였으므로, 모두 전도가 유망하다고 생각하였다.(「최후윤 묘표」 참고.) 그러나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다가, 몸이 약하고 슬픔이 지나쳐서 작고하였는데, 향년 40세였다. 모두 그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겼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용인(龍仁) 세동(稅洞)에 있는데, 조카 영의정최석정(崔錫鼎)이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 사후에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부인 해평윤씨(海平尹氏)는 윤면지(尹勉之)의 딸이고, 윤두수(尹斗壽)의 증손녀이다. 자녀는 2남 1녀를 두었는데, 맏아들은 최석삼(崔錫三)이고, 둘째 아들은 최석명(崔錫命)이며, 사위 김당(金鏜)은 함양(咸陽)의 수령(守令)이다.(「최후윤 묘표」 참고.)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주집(東州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