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尹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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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14년(중종 9)∼1578년(선조 11) = 65세.] 조선 중기 중종~선조 때의 문신. 호조 판서를 지냈다. 자는 자용(子用)이고, 호는 국간(菊磵)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윤학령(尹鶴齡)이고, 어머니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조숭인(趙崇仁)의 딸이다. 생부는 돈녕부(敦寧府) 정(正)윤승홍(尹承弘)이고, 생모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부안정(富安正) 이증(李增)의 딸이다. 증조부는 성종 때 영의정을 지낸 윤필상(尹弼商)이다.

중종 시대 활동

1531년(중종 26) 18세의 나이에 사마시(司馬試)에 생원(生員)으로 합격하였고, 1537년(중종 32)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4세였다.[『방목』] 1538년(중종 33)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서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수찬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중종 33년 3월 15일 · 5월 25일 · 7월 25일] 1539년(중종 34)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로 승진되었고, 이어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으로 전임되었다.[『중종실록』중종 34년 8월 2일 · 12월 2일] 1540년(중종 35) 홍문관 교리를 역임한 뒤에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남계집(南溪集)』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議政府右參贊尹公墓表)」]

명종 시대 활동

1546년(명종 1)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고,(『명종실록』 명종 1년 11월 20일) 1548년(명종 3) 의정부 검상(檢詳)을 거쳐 사인(舍人)에 임명 되었다.[『명종실록』명종 3년 7월 6일] 1550년(명종 5) 장악원(掌樂院)정(正)지제교(知製敎)로서 『중종실록(中宗實錄)』 편찬에 참여하였다.[『중종실록』 부록] 1551년(명종 6) 정부는 유학의 도학 정치를 구현하기위하여, 관료 가운데 청간(淸簡)하고 염근(廉謹)한 사람을 널리 구하여 표양(表揚)하도록 하였다. 이때 염근하다고 하여 뽑힌 사람이 33인이었는데, 윤현도 그 중 한 사람으로 피선되었다.[『명종실록』명종 6년 11월 4일 · 11월 10일]

1556년(명종 11)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562년(명종 17)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 곧 이어 승정원(承政院) 우부승지(右副承旨)에서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서, 우승지에 임명되었다.[『명종실록』명종 11년 10월 21일, 명종 17년 6월 6일 · 7월 21 · 9월 5일 · 10월 20일] 1563년(명종 18) 승정원 좌승지가 되었고, 도승지(都承旨)를 거쳐서, 특지로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황해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567년(명종 22) 의주 영위사(義州迎慰使)가 되었다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18년 1월 4일 · 4월 16일 · 5월 29일 · 8월 19일, 명종 22년 1월 15일]

선조 시대 활동

1568년(선조 1) 유일(遺逸)의 선비를 천거하라 명하니, 경기도 관찰사였던 윤현은 주목(州牧)의 보고에 의거하여 성혼(成渾)을 천거하면서 “지금 세상에 유일의 선비를 얻기란 어렵습니다. 성혼이라는 이가 있는데 그의 학문이 자득(自得)의 묘가 있다고 합니다.”하였다. [『국조보감』 권24 「선조조」] 1568년(선조 1) 실록청(實錄廳)참찬관(參贊官)이 되었다.[『선조실록』선조 1년 8월 12일] 1573년(선조 6) 공조 참판으로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

1574년(선조 7) 호조 참판으로 재임하다가 특지(特旨)로 호조 판서에 임명 되었는데, 그가 인망(人望)도 있을 뿐 아니라, 재간도 지부(地部)에 합당했기 때문이었다.(『선조실록』 선조 7년 3월 21일) 윤현이 재능이 있어서 일찍 장원으로 급제하였으므로, 처음에는 문명(文名)으로 쓰임을 받았으나, 재물을 관리하는 데에 재능이 있어서, 집에 있을 때에는 섬세한 것까지도 아껴서 넉넉하게 하였고 조금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여러 번 호조 판서를 지내면서 재화와 곡식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빠뜨리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고 한다.[『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7월 1일 「윤현 졸기」] 1578년(선조 11) 7월 11일에 향년 65세로 세상을 떠났다.[『남계집』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 저서로는 『문회당기(文會堂記)』와 『국간집(菊磵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그는 재능이 뛰어나 젊은 나이에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고, 일찍부터 시에 능하다는 명성이 났었는데, 등영(登瀛)한 이후, 읊조렸다 하면 사람들에게 회자(膾炙)가 되었다.[『남계집』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 1572년 (선조 5) 유희춘(柳希春)이 선조에게 아뢰기를 “이 시대 사장(詞章)의 대표적 인물로는 노수신(盧守愼) · 김귀영(金貴榮) · 윤현 · 이후백(李後白) · 기대승(奇大升) · 박승임(朴承任)을 칩니다.”라고 하였으니[『선조실록』선조 5년 10월 1일], 이는 그가 시문에 능했음을 증명하는 대목이라고 하겠다. 그는 비록 시로 이름이 났으나 문인들에게 자랑하거나 재능을 드러내는 것을 좋아하지 않은데다가, 또 속리(俗吏)처럼 혁혁한 명성을 구하지 않았다.[『남계집』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

그는 처음에 문명(文名)으로 쓰임을 받았으나, 재물을 관리하는 데 재능이 있어서 집에 있을 때에는 섬세한 것까지도 아껴서 넉넉하게 하였고 조금도 함부로 낭비하지 않았다. 그는 호조 판서를 지내면서, 전곡(錢穀)의 계산을 할 때에 푼(分) · 촌(寸)까지도 틀리지 않게 하니 사람들이 그 재주에 탄복하였다고 하였고, 『석담일기(石潭日記)』와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에는 그가 호조 판서로서 재화와 곡식을 관리하는 데 있어서 조금도 누락시키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의 능력에 탄복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비용을 아끼고 물건을 보관해 두는 것을 잘 하였으며, 각 사(司)에 오래 묵어 썩고 깨진 물건들을 모두 장부에 기록하여, 창고에 저장해 두었었는데 뒤에는 모두 쓸 데가 있었다. 일찍이 사옹원에서 깨진 사기그릇을 거두어다가 저장하니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모두 웃었다. 그러나 그 후에 궁성(宮省)을 수리하게 되자 단청(丹靑) 물감을 담을 그릇이 많이 쓰이게 되었는데 그 깨진 사기그릇을 내어 나누어 주니 사용하기에 넉넉하고 비용도 적게 들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진(晋)나라 도간(陶侃)이 나무 톱밥[木屑]을 사용하게 했던 것보다도 훌륭한 일이라고 하였다.[『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7월 1일 「윤현 졸기」]

윤현이 호조에 있을 적에 근검하고 세밀한데다 정력이 보통사람의 배나 되었기 때문에 다스리어 변통하고 절약하여 재물을 여유롭게 하는 등 그 묘리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이런 사람은 조선조 이래 한 사람뿐이라고 일컬었다. 그가 평생 동안 기획해놓은 것을 대부분 오래도록 법으로 삼고 있는데, 그러한 단서나 지취 또한 「호당문답(湖堂問答)」과 「영남탄(嶺南歎)」 등의 글에 대략 나타나 있었기 때문에, 선조가 조정에 나와 매번 그의 재능에 대해 감탄하였는가 하면 그 뒤 인조 · 효종 두 임금이 국가의 대계를 논할 때에 입에 침이 마르도록 감탄하였다고 하였다.[『남계집』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

이처럼 철저하고 세밀한 성향을 지녔으면서, 보통사람에 비하여 두 배나 정력적으로 일을 추진하였던 윤현은 재용(財用) 분야에서 발군의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런데 그의 이런 성향은 총명하고 기민하여, 일처리에도 능하였을 뿐 아니라, 재리에도 밝았던 그의 증조부인 윤필상에게서 물려받은 것이 아닌가 한다. 윤필상은 형율(刑律) 분야에서 그 능력을 발휘하여, 세조로부터 인정을 받아 중용되었으며, 그의 증손자인 윤현은 재용분야에서 그 능력을 발휘여 선조에게 중용되었다. 그러나 상공을 천시하던 유교사회에서는 그의 이러한 탁월한 경영능력도 비난의 대상이 되었는데, 실록에는 그가 민정(民政)은 가다듬지 않고 오로지 나라의 회계에만 힘쓴다느니,[『선조수정실록』선조 11년 7월 1일 「윤현 졸기」] 지나치게 겁이 많고 치산(治産)에 전력한다느니,[『명종실록』명종 22년 1월 15일] 비록 검약하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실상은 인색하였다느니,[『명종실록』명종 18년 8월 19일] 하는 사평(史評)이 있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묘소는 황해도 강음현(江陰縣) 춘명산(春明山)이고, 박세채(朴世采)가 지은 묘표(墓表)가 남아 있다.[『남계집(南溪集)』 권75 「의정부 우참찬 윤공 묘표(議政府右參贊尹公墓表)」]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둘째 부인 합천 이씨(陜川李氏)는 부사(府使)이세구(李世球)의 딸인데, 자녀는 2녀를 낳았다. 1녀는 군수(郡守)박인(朴璘)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참판이정형(李廷馨)의 처가 되었다. 셋째 부인 전주 이씨는 현감(縣監)이원우(李元友)의 딸인데 2남 2녀를 낳았다. 1남 윤지성(尹知性)은 일찍 죽었고, 2남 윤문성(尹聞性)은 진사 출신이다. 1녀는 군수(郡守)남이성(南以聖)의 처가 되었고, 2녀는 좌랑(佐郞)송구(宋구)의 처가되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견한잡록(遣閑雜錄)』
  • 『고봉집(高峯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계전서(沙溪全書)』
  • 『석담일기(石潭日記)』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임하필기(林下筆記)』
  • 『조천기(朝天記)』
  • 『학봉전집(鶴峯全集)』
  • 『남계집(藍溪集)』
  • 『화담집(花潭集)』
  • 『면앙집(俛仰集)』
  • 『송재유고(松齋遺稿)』
  • 『동고유고(東皐遺稿)』
  • 『퇴계집(退溪集)』
  • 『간재집(艮齋集)』
  • 『금호유고(錦湖遺稿)』
  • 『부훤당유고(負暄堂遺稿)』
  • 『미암집(眉巖集)』
  • 『소재집(穌齋集)』
  • 『이암유고(頤庵遺稿)』
  • 『소고집(嘯皐集)』
  • 『제봉집(霽峯集)』
  • 『율곡전서(栗谷全書)』
  • 『동강집(東岡集)』
  • 『사류재집(四留齋集)』
  • 『하곡집(荷谷集)』
  • 『월사집(月沙集)』
  • 『제산집(霽山集)』
  • 『귀록집(歸鹿集)』
  • 『여유당전서(與猶堂全書)』
  • 『구암집(久庵集)』
  • 『동상집(東湘集)』
  • 『창주집(滄洲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