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동구(沈東龜)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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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심동구 |
한글표제 | 심동구 |
한자표제 | 沈東龜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현종 |
집필자 | 권민균 |
자 | 문징(文徵) |
호 | 청봉(晴峯)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94년(선조 27) |
사망 | 1660년(현종 1) |
본관 | 청송(靑松)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인천(仁川) 공촌동(公村洞) |
증조부 | 심자(沈鎡) |
조부 | 심우정(沈友正) |
부 | 심집(沈諿) |
모_외조 | 남양 홍씨(南陽洪氏) : 홍종록(洪宗祿)의 딸 |
처_장인 | 경주 김씨(慶州金氏) : 김수렴(金守廉)의 딸 →(자녀)4남 |
자녀 | (1자)심창(沈敞) (2자)심유(沈攸) (3자)심철(沈轍) (4자)심경(沈儆)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동구(沈東龜) |
총론
[1594(선조 27)∼1660(현종 1) = 6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현종(顯宗) 때의 문신.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 홍문관(弘文館)응교(應敎)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문징(文徵), 호는 청봉(晴峯)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예조 판서(判書)심집(沈諿)이며, 어머니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홍종록(洪宗祿)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호조 좌랑(佐郞)을 지낸 심우정(沈友正)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을 지낸 심자(沈鎡)이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식년(式年) 진사시(進士試)에서 2등으로 급제하여 진사가 되고, 1619년(광해군 11) 알성(謁聖) 급제(及第) 하였으나 상대 당파의 불평으로 관직을 제수 받지 못했다.[『송자대전(宋子大全)』 권177 「청봉심공묘갈명(晴峯沈公墓碣銘)」]
그러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 뒤 성균관 유생으로 이름이 난 심동구(沈東龜)는 추천을 받아 태능참봉(泰陵參奉)이 되었다. 이듬해인 1624년(인조 2) 증광문과(增廣文科)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예속되고, 이어 승정원(承政院)주서(注書)를 거쳐 예문관(藝文館)한림(翰林)이 되었으며,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다.[『방목(榜目)』] 이로부터 심동구는 조정에 있는 동안 마흔여 차례 관직을 제수 받았는데 대부분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에 있었으며, 강원(講院)에서 춘추관(春秋館)지제교(知製敎)를 겸하기도 했다.[『송자대전』 권177 「청봉심공묘갈명」]
1626년(인조 4) 4월에는 검열(檢閱)을, 1627년(인조 5) 6월에는 예문관 봉교(奉敎)를 제수 받았고, 그 해 10월 봉교를 한 번 더 연임하였으며, 12월에는 사간원 정언(正言)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4년 4월 26일, 인조 5년 6월 24일, 인조 5년 10월 19일, 인조 5년 12월 15일] 정언에 임명된 후 심동구는 1624년 발생한 <이괄(李适)의 난>에 연루되어 유배를 떠났다가, 어머니 민정빈(閔靜嬪)이 중병에 걸리자 해배된 인성군(仁城君)의 처벌과 요지인 함경도 길주(吉州)의 수령 임명 등을 건의하였다.[『인조실록』인조 6년 3월 5일, 9월 25일] 그러다가 1629년(인조 7) 11월 사헌부 지평이 되고, 1630년(인조 8) 7월에는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7년 11월 24일, 8년 7월 15일] 얼마 후 1631년(인조 9)에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으로 전임(轉任)하고, 이어 다시 사헌부 지평으로 옮겼다.[『인조실록』인조 9년 2월 2일, 12년 1월 5일] 1634년(인조 12) 7월 사간원 헌납으로 근무하던 당시 성지(聖旨)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청하현감(淸河縣監)으로 강직(降職)되었다가, 1637년(인조 15) 7월 홍문관 수찬으로 복귀했으며 곧 바로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인조실록』인조 12년 7월 12일, 인조 15년 7월 16일] 이후 사헌부 장령(掌令), 사간원 사간,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1638년(인조 16) 2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16년 2월 18일]
그러던 가운데 1643년(인조 21) 청(淸)나라 태종(太宗)이 사망하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이요(李㴭), 부사(副使)한인급(韓仁及)과 함께 진향사(進香使)로 뽑혀 심양[進香]에 다녀왔다.[『인조실록』인조 21년 9월 19일] 그런데 이듬해 1644년(인조 22) 3월, <심기원(沈器遠)의 역모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심동구는 친족이라는 이유로 이 사건에 연루되어 장흥(長興)으로 귀양을 갔다.[『인조실록』인조 21년 3월 21일] 이후 심동구가 억울하다는 상소문이 연이어 올라갔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므로 10여 년간 벼슬자리에 나아가지 못하였다.
효종 시대 활동
1649년(효종 즉위년) 인조(仁祖)가 사망하고 효종이 즉위한 후, 장흥에 있던 심동구는 1652년(효종 3) 연신(筵臣)의 요청으로 일시적으로 직첩을 돌려받았다.[『송자대전』 권177 「청봉심공묘갈명」] 그러나 아버지 심집(沈諿)이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청나라와의 휴전 교섭에 왕족인 능봉군(綾峰君)과 함께 각각 대신과 인조의 동생으로 위장하여 가는 바람에 문제가 되었던 것을 들어 1655년(효종 6) 6월 삭탈관직의 명이 내려졌다.[『효종실록』 효조 6년 6월 5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즉위년 7월 29일]
그런 가운데 심동구는 1660년(현종 1) 4월 29일에 죽었으며, 당시 나이 67세였다. 이후 대사헌(大司憲)에 추증(追贈)되었다.
성품과 일화
심동구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일을 처리할 때 사사로움에 치우치지 않았고 시비를 가릴 때는 친소를 생각하지 않았다. 공무를 수행할 때는 공정을 우선으로 생각하고 다른 것은 돌아보지 않았다. 또 사람을 대할 때는 정직을 바탕으로 하고 벗을 사귈 때는 허식을 싫어하여, 지인 가운데는 그의 지조를 높게 산 사람도 많았지만 곧은 성품을 꺼리는 이도 많았다고 전해진다.[『송자대전』 권177 「청봉심공묘갈명」]
묘소와 후손
심동구의 묘는 통진(通津) 서면(西面) 문수산(文殊山) 기슭 보습곶이[甫十串]에 있었는데, 이후 인천(仁川) 공촌동(公村洞)으로 이장하였다.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김수렴(金守濂)의 딸이며, 좌의정김명원(金命元)의 손녀이다. 아들 넷을 두었는데, 맏아들 심창(沈敞)은 병으로 먼저 죽었고, 둘째 아들 심유(沈攸)는 사간이 되었다. 셋째 아들은 심철(沈轍)이며, 넷째 아들은 심경(沈儆)으로, 모두 음사(蔭仕)이다.[『송자대전』 권177 「청봉심공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송자대전(宋子大全)』
- 『청선고(淸選考)』
- 『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