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언(沈光彦)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심광언 |
한글표제 | 심광언 |
한자표제 | 沈光彦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선조 |
집필자 | 홍현보 |
자 | 언지(彦之) |
호 | 둔암(鈍庵) |
시호 | 호안(胡安)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90년(성종 21) |
사망 | 1568년(선조 1) 4월 9일 |
본관 | 청송(靑松)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陽地里) |
증조부 | 심선(沈璿) |
조부 | 심안인(沈安仁) |
부 | 심빈(沈濱) |
모_외조 | 이천 서씨(利川徐氏) : 서강(徐岡)의 딸 |
형제 | (형)심순도(沈順道), 심순경(沈順經) (누이)정순(鄭洵)의 처 |
처_장인 | 한양 조씨(漢陽趙氏) : 조방정(趙邦楨)의 딸 →(자녀) 4남 1녀 |
자녀 | (1자)심현(沈鉉) (2자)심호(沈鎬) (3자)심연(沈鍊) (4자)심금(沈錦) (1녀)박윤한(朴胤韓)의 처 (서1자)심은(沈銀) (서1녀)이학정(李鶴貞)의 처 (서2녀)신응룡(辛應龍)의 처 (서3녀) ?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심광언(沈光彦) |
총론
[1490년(성종 21)~1568년(선조 1) = 79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명종(明宗) 때의 문신.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와 형조 판서(判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언지(彦之), 호는 둔암(鈍庵)이며, 시호는 호안(胡安)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이조 판서에 추증된 심빈(沈濱)이고, 어머니 이천 서씨(利川徐氏)는 대사성(大司成)서강(徐岡)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慶尙右道兵馬節度使)심안인(沈安仁)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낸 심선(沈璿)이다.
중종~인종 시대의 활동
1519년(중종 14)에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 모두 합격하였고, 1525년(중종 20)에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장원으로 올랐다.[『방목(榜目)』,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급제하자마자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이 되었다가 그 뒤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 되어서 직언을 하여 체직되고,[『중종실록(中宗實錄)』중종 20년 7월 14일] 다시 정언으로 돌아와서도 “임금이 아랫사람에 대해서 그들이 죄가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죄 주는 것이긴 하지만 당연히 측은하게 여겨야 하거늘, 지금은 임금께서 무심히 (활쏘기를 관람한 일을) 한 일이라고 하셨습니다만, 뒤에는 다시 이런 일을 하지 마셔야 합니다.”라며 직언을 하였다.[『중종실록』중종 21년 8월 25일] 또한 과거에서 뽑는 숫자가 너무 많아 권위를 떨어뜨리니 개선하라는 직언을 하기도 하였다.[『중종실록』 21년 9월 28일] 이어 예조 좌랑(佐郞)을 거쳐 1528년(중종 23)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1529년(중종 24)에는 경연청(經筵廳) 시독관(試讀官)과 교리(校理), 사간원 사간(司諫),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을 역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23년 6월 3일, 24년 3월 9일, 4월 7일, 11월 30일, 12월 20일] 그리고 1530년(중종 25)에는 응교(應敎)를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과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였다가, 다시 사헌부 장령이 되었다.[『중종실록』 25년 8월 13일, 『이암유고(頤菴遺稿))』 권2 「의정부좌참찬증시호안심공신도비명(議政府左參贊贈諡胡安沈公神道碑銘)」 이하 「심광언신도비명」으로 약칭]
그리고 1531년(중종 26)에 성균관 전적이 되었으나 파직되었고, 이어 창원부사(昌原府使)로 나갔으며, 1537년(중종 32) 파주목사(坡州牧使)로 옮겼는데, 1538년(중종 33) 중종이 그의 휼민(恤民)함을 높이 사서 표리를 내리고 표창하였다.[『중종실록』중종 26년 2월 24일, 중종 33년 11월 18일] 같은 해에 사복시(司僕寺)정(正)이 되어 내직에 있다가 부평부사(富平府使)로 나갔다. 이때 정사를 간편하게 하여 백성의 고통을 없애기에 힘썼을 뿐만 아니라, 흉년을 당하자 기민(飢民)을 구제하고 돌봄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이 공로를 인정 받아 표리(表裏)와 표창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중종실록』중종 33년 11월 18일, 중종 35년 6월 21일, 중종 35년 6월 22일]
1541년(중종 36) 10월 그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이 되어 상소를 올려 임금에게 직언을 아끼지 않았는데, 상소의 내용은, ‘신하의 간하는 말을 받아들일 것, 사습(士習)을 바로잡을 것, 사로(仕路)를 맑게 할 것, 변방의 방비를 잘 닦을 것’ 등이었다.[『중종실록』중종 36년 10월 25일, 중종 36년 12월 19일, 중종 37년 1월 18일] 이후 병조(兵曹)참지(參知)와 사간원 대사간, 예조 참의(參議), 사은사(謝恩使) 등을 역임하였다.[『중종실록』중종 37년 10월 17일, 중종 37년 11월 12일, 중종 38년 2월 4일, 중종 39년 1월 17일]
한편 1545년(인종 즉위년) 인종(仁宗)이 즉위하자 그는 바로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인종실록(仁宗實錄)』인종 1년 윤1월 15일]
명종 시대의 활동
1545년(명종 즉위년) 명종이 즉위하였을 때 심광언은 전라도관찰사 일을 맡아 하던 중이었는데, 흥양현(興陽縣) 녹도(鹿島)에 조난당한 중국 배를 오인하여 왜적으로 알고 녹도 만호(萬戶)장명우(張明遇)가 포를 쏘고 참획하는 바람에 148명이 죽고, 282명이 사로잡히는 일이 있었다. 이에 심광언은 조정에 이 일을 보고하고, 관련자들을 조사하는 등 사건을 수습하였다.[『명종실록』명종 즉위년 7월 26일, 8월 2일] 이듬해인 1546년(명종 1) 심광언은 승정원에 들어와서 참찬관(參贊官)이 되고, 병조 참의와 이조 참의, 호조 참판 겸 의금부 동지사(同知事)가 되었으며, 이어 이조 참판으로 옮겨져 춘추관(春秋館)의 직무를 겸했다.[『명종실록』 1년 3월 9일, 명종 2년 3월 18일, 명종 4년 8월 13일, 명종 5년 5월 15일] 이후 잠시 병으로 체직되었다가 1550년(명종 5)에 형조 참판, 이조 참판 겸 부총관(副摠管)이 되었다. 이때에 가선대부(嘉善大夫)이조 참판 겸 의금부 동지사로서 『중종실록』과 『인종실록』의 편수관으로 참여하였다.[『중종실록』 부록, 『인종실록』 부록]
이어 1552년(명종 7)에 형조 참판을 거쳐, 이조 참판, 자헌대부(資憲大夫) 한성부판윤이 되었고, 1554년(명종 9)에는 형조 판서, 이듬해에는 공조 판서가 되었다.[『명종실록』명종 7년 9월 3일, 명종 8년 윤3월 18일, 명종 8년 6월 3일, 명종 9년 4월 25일, 명종 10년 윤11월 5일] 그리고 1556년(명종 11)에는 호조 판서, 종부시(宗簿寺)제조(提調)가 되었다가 체직되었으나 다시 공조 판서가 되었고, 1557년(명종 12)에 형조 판서가 되었다.[『명종실록』 11년 4월 17일, 12년 7월 19일] 이듬해인 1558년(명종 13)에는 한성부 판윤,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 형조 판서를 역임하였고, 1559년(명종 14)에는 우참찬(右參贊)을 지냈으며, 1566년(명종 21)에는 한성부판윤과 돈녕부(敦寧府) 지사를 지냈다.[『명종실록』명종 13년 5월 4일, 명종 8월 28일, 명종 12월 25일, 명종 14년 2월 6일, 명종 21년 9월 10일, 명종 9월 27일]
1568년(선조 1) 4월 9일에 세상을 떠나니 향년 79세였다.[「심광언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심광언은 아버지가 13살 때 죽고, 어머니도 16세에 죽어 일찍 부모를 모두 잃었으나 더욱 힘써 배워서 경전(經傳)을 두루 연구하고 우리나라와 중국의 법률에까지 미쳐서 열람하지 않은 책이 없었다 한다. 성품이 소탈하면서 엄하고, 독실(篤實)하면서 후덕하여 처신에 법도가 있었으며, 관직에 있으면서는 처사가 공정하고 굽힘이 없었다.
1538년(중종 33)에 중종이 “파주 목사심광언은 벼슬살이하는 자세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법을 잘 지키고 흔들림이 없으며 청리(聽理)를 밝게 하니 억울함을 호소하는 자들이 다 그에게로 나아간다고 한다. 마땅히 표리를 내려주라.”라고 교시를 내린 것을 보면 그의 인품과 백성을 생각함이 남달랐음을 잘 알 수 있다.[「심광언신도비명」]
1561년(명종 16)에 명종이 제술(製述)과 강경(講經)을 시험하고 특별히 급제(及第)를 내렸는데, 외척들이 많이 합격하여 공정하지 못하였다는 비판이 많이 있었다. 이때 그가 홀로 과감히 그 잘못됨을 지적하였으니, 그 언사가 매우 격절(激切)하였으므로 임금이 안색이 변하여 급제자를 방에 붙이는 것을 취소케 하였으니,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였다고 한다.[「심광언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심광언의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오남읍 양지리(陽地里)에 위치한다. 송인(宋寅)이 신도비명(神道碑銘)을 지었다.[「심광언신도비명」]
부인 한양 조씨(漢陽趙氏)와의 사이에서 4남 1녀를 두었다. 장남 심현(沈鉉)은 전생서(典牲署)참봉(參奉)이고, 차남 심호(沈鎬)는 성균관진사(進士)이며, 3남 심연(沈鍊)은 여산군수(礪山郡守)이고, 4남 심금(沈錦)은 사헌부 감찰(監察)이다. 딸은 전(前) 회양부사(淮陽府使)박윤한(朴胤韓)에게 출가하였다. 또 측실(側室)에서 난 1남 3녀가 있으니 아들 심은(沈銀)은 관상감(觀象監) 참봉이고, 맏딸은 종실(宗室) 서흥수(西興守)이학정(李鶴貞)에게, 둘째 딸은 관상감 봉사(奉事)신응룡(辛應龍)에게 출가하였으며, 막내딸은 알 수 없다.[「심광언신도비명」]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인종실록(仁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규암집(圭菴集)』
- 『묵재집(黙齋集)』
- 『범허정집(泛虛亭集)』
- 『신재유고(新齋遺稿)』
- 『악록집(岳麓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이암유고(頤菴遺稿)』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