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세(沈光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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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77년(선조 10)∼1624년(인조 2) = 48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예조 좌랑(佐郞)과 부안현감(扶安縣監) 등을 역임하였다. 자는 덕현(德顯)이고, 호는 휴옹(休翁)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현감(縣監)심엄(沈㤿)이고, 어머니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참판(參判)심의겸(沈義謙)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청릉부원군(靑陵府院君)심강(沈鋼)이다. 어머니의 친언니가 인조의 어머니인 인헌왕후(仁獻王后)이다.

선조 시대 활동

1601년(선조 34) 식년시(式年試) 문과(文科)에 급제하였다. 이 때 나이가 25세였다. [『방목(榜目)』] 과거에 급제하여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에 배속되었다가, 예문관(藝文官) 검열(檢閱)과 예문관 대교(待敎) 등을 역임하였다.[『선조실록(宣祖實錄)』선조 35년 5월 13일, 선조 35년 6월 21일] 이어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고, 1604년(선조 37) 대대적인 인사 이동 때는 감찰(監察)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36년 7월 4일, 선조 36년 9월 21일, 선조 37년 6월 22일] 이어 해운판관(海運判官)을 거쳐, 예조 좌랑에 제수되었다.[『선조실록』선조 37년 7월 27일, 선조 39년 7월 2일] 1607년(선조 40) 예조 좌랑의 임기를 채운 후에는 외직(外職)을 원하여 부안현감(扶安縣監)으로 부임하였다.[『선조실록』선조 40년 1월 13일, 『백헌집(白軒集)』 권48 「응교심공묘지명(應敎沈公墓誌銘)」 이하 「심광세묘지명」으로 약칭]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부안현감으로 있던 심광세는 해적(海賊)의 침구(侵寇)에 대비한 치계를 올렸는데, 이 치계에 따라 비변사(備邊司)에서 대책을 마련하였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즉위년 9월 13일] 1611년(광해군 3)에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제수되었다가, 곧 홍문관(弘文館)수찬(修撰)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4월 28일, 광해군 3년 6월 3일, 광해군 3년 6월 15일] 그 해 12월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이 되었고, 이듬해인 1612년(광해군 4)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을 거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12월 27일, 광해군 4년 9월 15일, 광해군 4년 11월 11일, 광해군 4년 11월 18일] 1613년(광해군 5)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에 제수되었고, 이어 홍문관 부교리(副校理)에 임명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2월 16일, 광해군 5년 2월 19일]

그런 가운데 그 해 5월 대북파(大北派)가 영창대군(永昌大君) 및 반대파를 축출하기 위하여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이때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이 체포되어 죽었으며, 심광세의 동생 심정세(沈挺世)는 김제남의 사위로서 영창대군의 추대에 참여하였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맞다 죽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18일, 광해군 5년 5월 24일, 「심광세묘지명」] 심광세 또한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세워서 권세를 잡고자 하였다며 체포된 후 국문을 당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9일, 광해군 5년 5월 15일, 광해군 5년 5월 18일,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위리안치류(圍籬安置類)」] 처음에 광해군은 심광세가 김제남의 역모 계획을 모를 리 없었겠지만, 반역은 대악(大惡)이라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며 삭직시켜 석방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19일] 그러나 사헌부 등에서 강력하게 처벌을 주장함에 따라 심광세를 삭탈관작 하였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계속하여 유배를 요청하자 결국 그해 8월 고성(固城)으로 유배를 명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20일, 광해군 5년 5월 21일, 광해군 5년 5월 22일, 광해군 5년 8월 6일, 광해군 5년 8월 7일, 광해군 5년 8월 8일, 광해군 5년 8월 9일, 광해군 5년 8월 11일, 광해군 5년 8월 19일]

한편 그는 유배 기간 동안 우리 역사를 소재로 하여 감계(鑑戒)를 목적으로 하는 악부시 『해동악부(海東樂府)』를 지었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별집 권14 「문예전고(文藝典故)」, 『순암집(順菴集)』 권1 「시(詩)」] 1책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삼국시대부터 연산군(燕山君) 때까지의 사실을 44편으로 구성하였다.

인조 시대 활동

심광세는 10년 동안 고성에 유배되었다가,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인조가 즉위하면서 해배(解配)되어, 그해 3월 홍문관 부교리에 제수되었다.[『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년 3월 15일] 이어 경연청(經筵廳) 시독관(試讀官)에 제수되어 인조에게 경서(經書)를 강의하였으며,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그해 6월에는 홍문관 응교(應敎)를 역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년 5월 3일, 인조 1년 6월 23일,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1년 5월 26일] 한편 인조는 비변사로 하여 유사(儒士) 가운데 장수의 재질이 있는 자를 천거하도록 명령하였는데, 이때 심광세는 심기원(沈器遠), 최현(崔晛) 등과 함께 추천되기도 하였다.[『인조실록』인조 1년 11월 7일]

이런 가운데 그는 부원수(副元帥)이괄(李适)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서쪽 변경의 군무에 종사하였다.[『인조실록』인조 1년 8월 16일, 『승정원일기』인조 1년 10월 18일] 얼마 후 성묘를 가던 중에 종기(腫氣)가 났는데, <이괄의 난(亂)>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행재소(行在所)로 가는 도중 병세가 위독해졌다.[「심광세묘지명」] 인조는 의원을 보내 심광세의 병을 치료하도록 하였으나, 1624년(인조 2) 부여에서 향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심광세묘지명」] 문집으로 『휴옹집(休翁集)』이 있으며, 『명종실록(明宗實錄)』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성품과 일화

심광세의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릴 적부터 빼어나고 기억력이 뛰어나서 내외종 형제가 무리지어 따르며 모두 그를 호걸이라고 서로 받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홀로 경서와 사서 등의 많은 책을 두루 읽었고, 시율(詩律)도 능하였다. 또한 고금의 사책(史冊)을 보아 상하 수천 년간의 치란득실(治亂得失)과 산천의 험이(險易)와 역대 충사현부(忠邪賢否)를 널리 관통하고 연구하지 않음이 없었다.[「심광세묘지명」]

1623년(인조 1) 조정의 부름을 받았을 때, 그는 「시무십일조(時務十二條)」를 상소하기도 하였다. 한편 심광세는 외직으로 나가서 서쪽 변경을 돌아보고 「안변십책(安邊十策)」을 올렸는데, 이를 뛰어난 것으로 여긴 대신들은 인조에게 그 시행을 청하기도 하였다.[「심광세묘지명」]

묘소와 후손

심광세의 묘소는 처음에는 어머니 능성 구씨(陵城具氏)의 묘역인 영남(嶺南) 영산(靈山)의 영취산(靈鷲山)에 있었다. 그러다가 1636년(인조 14) 겨울 어머니의 묘와 함께 경기도 김포시 통진읍의 선산 북쪽으로 이장(移葬)하였다. 이경석(李景奭)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전한다. 경상도 고성 유월사(柳月祠)에 배향되었다.[『연려실기술』 별집 권4 「사전전고(祀典典故) 」]

부인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추포(秋浦)황신(黃愼)의 딸인데, 자녀는 4남 2녀를 두었다. 장남 심은(沈檼)은 진사(進士)인데, 요절하였다. 차남 심억(沈檍)은 사직서(社稷署) 영(令)이고, 3남 심헌(沈櫶)은 고부군수(高阜郡守)를, 4남 심총(沈棇)은 경산현령(慶山縣令)을 역임하였다. 장녀는 이조 판서(判書)임담(林墰)에게 시집갔고, 차녀는 이즙(李)의 처이다.

참고문헌

  • 『명종실록(明宗實錄)』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계곡집(谿谷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백헌집(白軒集)』
  • 『순암집(順菴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악부(海東樂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