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신(黃愼)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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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신 |
한글표제 | 황신 |
한자표제 | 黃愼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선조~광해군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사숙(思叔) |
호 | 추포(秋浦) |
봉작 |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 |
시호 | 문민(文敏)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562년(명종17) |
사망 | 1617년(광해군9) |
본관 | 창원(昌原) |
주거지 | 서울, 강화(江華) |
묘소소재지 | 경기도 양주(楊州) 서산(西山) |
증조부 | 황형(黃衡) |
조부 | 황원(黃瑗) |
부 | 황대수(黃大受) |
모_외조 | 현풍곽씨(玄風郭氏): 곽회영(郭懷英)의 딸 |
형제 | (동생)황척(黃惕) |
처_장인 |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휘(李徽)의 딸, 원천군(原川君)의 딸 |
자녀 | (양자)황일호(黃一皓): 황척(黃惕)의 아들 (1녀)심광세(沈光世)의 처 |
저술문집 |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 , 『추포집(秋浦集)』, 『대학설(大學說)』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신(黃愼) |
목차
총론
[1562년(명종17)∼1617년(광해군9) = 56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초명은 황치신(黃致愼)이다.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인데, 세거지는 강화(江華)이다. 아버지는 정랑 황대수(黃大受)이고, 어머니 현풍곽씨(玄風郭氏)는 곽회영(郭懷英)의 딸이다. 별제 황원(黃瑗)의 손자이고, 명장 장무공(莊武公)황형(黃衡)의 증손이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선조 중기 활동
1582년(선조15) 사마시에 진사로 합격하고, 1588년(선조21) 27세에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갑과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반대파의 견제를 받아 초사(初仕)는 산직(散職)에 머물렀다. 주부를 거쳐, 사헌부 감찰을 지내고 음죽현감(陰竹縣監)으로 나갔다가, 호조 좌랑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590년(선조23)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는데, 이산해(李山海)가 이조 판서로 있을 적에 정여립(鄭汝立)을 김제군수(金堤郡守)로 추천했던 것을 탄핵하다가 선조의 노여움을 사는 바람에, 고산현감(高山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591년(선조24) 좌의정정철(鄭澈)이 광해군을 세자로 세울 것을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자, 황신도 정철의 일파라고 하여 파직되었다.(『우계집(牛溪集)』 연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외교 활동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병조 좌랑에 임명되었는데, 세자시강원 사서를 겸임하였다. 병조 정랑으로 승진하여 병조 판서이항복(李恒福)을 도와 전쟁 중의 복잡한 군사 실무를 전담하였다. 1593년(선조26) 사헌부 지평인데도 명(明)나라 장병(將兵)들을 접대하게 되었지만, 그 일에 정성과 예의를 다하였다. 1595년(선조28)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문학을 겸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장기화되자, 명나라 대표 심유경(沈惟敬)과 일본의 대표 고니시 유키나카[小西行長]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을 여러 차례 진행하였다. 황신은 명나라 유격(遊擊)심유경의 접반관(接伴官)으로 2년 동안 적진에 있으면서 협상 자리에 참여하여 조선이 협상에 반대한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1596년(선조29)에는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어, 명나라 유격심유경의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었다. 그러는 가운데 일본 대표 고니시가 7개 조건을 제시하여, 협상이 어느 정도 타결되고, 전쟁도 소강상태가 되었다.
이때 명나라에서 일본의 관백(關伯)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를 일본 국왕으로 봉할 사신을 일본에 보내면서, 조선에서도 그 자리에 참여할 사신을 보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일본에 사신으로 가면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모두 피하였는데, 선조가 황신을 일본 통신사(通信使)에 임명하자 그는 의연하게 일본에 다녀왔다. 그가 일본에서 돌아오자, 대간(臺諫)에서 그가 왜적의 위협을 두려워하여 조선의 주장을 제대로 펴지 못하였다고 탄핵하였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협상을 반대하는 조선의 입장을 당당히 밝혔다. 게다가 도요토미도 수봉(受封)하는 것을 거절하여 강화(講和)는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선조는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 조약이 체결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황신의 노고를 치하하면서 그를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하였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황신은 위유사(慰諭使)가 되어 장병을 위로하러 남쪽 지방을 다녀왔고, 찬획사(贊畫使)가 되어 분조(分朝)에서 세자 광해군을 보필하였으며, 체찰부(體察府)로 가서 작전을 도왔다. 남쪽 지방에 경보(警報)가 끊이지 않았으므로 선조는 황신을 전라도관찰사에 임명하여, 서로(西路)의 각 군영을 관할하고, 군사들의 싸움을 독려하도록 하였다.(『해동역사(海東繹史)』 권63) 1599년(선조32)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접반사가 되어 명나라 군문(軍門)형개(邢玠)를 영접하였다. 그 때 어머니의 상(喪)을 당하자 관직을 떠나 3년 동안 고향 강화에서 여막살이를 하였다.
선조 후기 활동
1601년(선조34)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었다가, 행 대사간으로 옮겨서 비변사 제조를 겸임하였다. 이때 전후의 기강확립과 인재등용 등을 위한 ‘시무(時務) 12조’를 상소하고, 또 『소학(小學)』을 선비들의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기를 청하였는데, 그 공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되었다. 이어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북인 정인홍(鄭仁弘)의 사주를 받은 문경호(文景虎)가 성혼을 비난하자, 그는 스승 성혼을 변호하고 북인과 동인을 공격하였다. 1602년(선조35) 사은사로 명나라 북경(北京)에 갔었는데, 돌아오다가 어양(漁陽)에서 대사헌정인홍의 탄핵을 받아 관작(官爵)이 삭탈되었음을 알고, 곧장 강화로 돌아가 은거하였다. 1605년(선조38) <임진왜란> 때 세운 공이 인정되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녹훈되었고, 1607년(선조40) 직첩(職牒)이 환급(還給)되었다. 5년 만에 복관(復官)되었으나, 북인 좌의정유영경(柳永慶)이 이를 시행하지 않았으므로, 그는 벼슬을 포기한 채 부여로 이사하여 만년을 보내려고 하였다. 그러나 1608년(선조41) 2월 선조가 운명할 때 그를 불러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부탁한다는 유교(遺敎)를 남겼다. 이때 황신과 함께 유교를 받은 박동량(朴東亮) · 신흠(申欽) 등 7명을 ‘유교7신(遺敎七臣)’이라 하는데, 이들은 나중에 <계축옥사(癸丑獄事)>에 연루되었다.
광해군 때 경제 활동
1608년(광해군즉위) 호조 참판에 임명되었는데, <임진왜란> 때 세자 광해군이 이끌던 분조에서 재정을 맡았었기 때문이었다. 책봉주청사(冊封奏請使)의 부사(副使)가 되어, 정사(正使)영의정이덕형(李德馨)과 함께 명나라에 다녀왔다.(『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권1) 그 공으로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어 공조 판서에 임명되고, 토지를 하사받았다. 1609년(광해군1) 의금부 지사를 거쳐, 호조 판서로 승진하였는데, 진휼사(賑恤使)를 겸임하였고,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되었다. 이때부터 6년 동안 호조 판서로 재임하면서 전후의 국가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고, 균전사(均田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양전(量田) 사업을 추진하여 토지구획을 정비하는 등 광해군 시대 경제 정책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1610년(광해군2) 명나라 사신의 관반사가 되자 나날이 불어나는 사신 접대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 접대 규모를 줄였다. 그 사이 의금부 동지사와 춘추관 동지사를 겸임하였는데, 호조의 업무에 전념하기 위하여 겸직을 사임하였다. 1612년(광해군4) <임진왜란> 때 분조에서 광해군을 호종한 공로로 ‘위성공신(衛聖功臣)’ 2등에 책훈되고 회원부원군(檜原府院君)으로 봉해졌다. 종1품상 숭록대부(崇綠大夫)로 승품되었다가, 1613년(광해군5) 정1품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에 승품되었다.
계축옥사와 황신
1613년(광해군5) <계축옥사>가 일어났다. 그때 정협(鄭浹) · 서양갑(徐羊甲) · 박응서(朴應犀) 등 7인이 ‘강변7우(江邊七友)’라고 자칭하고 한강변에서 술을 마시며 사회를 원망하다가, 강변을 지나던 상인들의 물화를 겁탈한 사건이 있었다. 이들은 범행이 발각되어 사형을 받게 되자, 이이첨(李爾瞻)은 이들을 사주하여, “국구(國舅)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고 꾀하였다.”고 거짓 자백을 하도록 했다. 그리고 서양갑 등은 “박종인(朴宗仁)이 거사에 쓸 은자(銀子)를 황신의 집에 숨겨두었다.”고 거짓 고변을 하였다. 황신은, 이 고변에서 이름이 거론되었을 뿐만 아니라 박종인이 그의 문하에 출입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양사(兩司)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이이첨은 황신의 반대로 대사간이 되지 못한 적이 있었다. 이 일은 이조 참판정사호(鄭賜浩)가 이이첨과 절친했던 황신에게 이이첨에 대해 물었을 때 그의 됨됨이에 대해 사적(私的)으로 말해 준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의 정황을 전해들은 이이첨은 황신을 원망하고 있었는데, <계축옥사>가 일어나자 그에게 죄를 씌워 보복하였던 것이다. 이이첨은 혹독한 심문을 받고 있던 황신에게 사람을 보내 회유하기도 하였는데, 황신은 “이익을 도모하여 몸의 온전함을 추구하는 것은 친구인 자네도 역시 천하게 여기는 것이 아닌가?”라며 사양하였다. 이이첨이 크게 노하여 절교하고 그를 죽이려 하였으나, 황신을 좋아하던 광해군의 보호로 그는 죽음을 면하고 멀리 귀양가는 것도 피할 수 있었다.
또 이이첨은 정협 등을 사주하여, 이정귀(李廷龜) · 김상용(金尙容), 그리고 황신을 비롯한 유교7신도 김제남과 함께 반역을 도모하였다고 무고하게 하였다. 김제남과 영창대군은 사사(賜死)되었고, 무고당한 여러 사람들도 모두 체포되어 삭직(削職)당하였다. 황신은 중도부처(中途付處)되었다가 황해도 옹진현(翁津縣)으로 유배되었다. 광해군이 임해군(臨海君)과 영창대군 등 형제를 죽이는 옥사를 잇달아 일으키자, 황신은 “정사가 이러하니, 앞으로 10년도 못 가서 나라가 망할 것이다.”고 탄식하였다. 그는 유배당한 지 5년 만에 풍토병에 걸려, 1617년(광해군9) 3월 14일 옹진에서 돌아갔는데, 향년이 56세였다. 그의 부음을 듣고 광해군은 애도하면서 “황신은 나라에 공이 많은 사람인데 적소(謫所)에서 죽었다니, 몹시 불쌍하다. 그의 관작을 회복시키고 예장하라.” 하여, 나라에서 장사를 지내주었다.
저서로는 『추포집(秋浦集)』이 있고, 일본으로 사신 다녀온 기록인 『일본왕환일기(日本往還日記)』 · 『막부삼사수창록(幕府三槎酬唱錄)』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황신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의 성품은 청결하고 정직하였다. 천성이 단정하고 성실하며, 기품이 아름답고 빼어났다. 총명함이 남보다 뛰어나고 절의가 있었으므로 존경을 받았다. 관직에 부임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는 자기의 이해관계에 따라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다. 왜란 중,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도 자신의 안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왜인들도 감탄하였다.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황신이 심유경의 접반사가 되어서 왜군 진영에 갔을 때의 일화를 전하고 있다. 이때 고니시 유키나가는 심유경을 접대하면서 그에게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자 황신은 버럭 성을 내고 일어나 나가려 하였다. 그러자 고니시는 그에게 사과하고 정중하게 영접하여 앉게 하고 나중에 “조선이 명맥을 유지하는 것은 이러한 인물이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왜란 중, 명나라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이 선조에게 학문이 높은 선비와 함께 강학하고 싶다고 청하였으므로 황신이 선발되어 함께 경서를 강론하였다. 송경략은 양명학(陽明學)의 학설을 주장하였고, 황신은 이에 반론을 펴다가 정주학(程朱學)의 훈석(訓釋)을 연역(演繹)하여 『대학설(大學說)』 10여 편을 지어 보이니 송경략이 더 이상 논란하지 않았다. 황신은 고금의 제자백가(諸子白家)와 사서(史書)에 통달하여 다른 사람들이 미칠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글을 잘 지었는데, 특히 ‘사륙변려문(四六叴儷文)’에 뛰어났다. 명나라에 세자 책봉을 청하는 표문(表文)을 지으면서 “하늘은 장차 이 사람에게 임무를 맡기려고 지성스레 명하시는데, 일은 반드시 기다림이 있은 다음에 이루어지는 것이니, 우선은 천천히 하라고 명하실 뿐입니다.” 하였는데, 세상에서 절묘한 글이라고 칭찬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문민(文敏)이다.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서산(西山)의 선영에 있는데, 부인의 묘소 오른쪽에 묻혔다. 송시열(宋時烈)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죽은 뒤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공주의 창강서원(滄江書院)에 제향되었다. 부인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종실(宗室) 원천군(原川君)이휘(李徽)의 딸이다. 외동딸은 홍문관 응교심광세(沈光世)의 처가 되었다. 그의 아우 황척(黃惕)의 아들 황일호(黃一皓)를 양자로 삼았다. 황일호의 아들 황윤(黃玧)은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승지를 지냈고, 황일호의 딸은 대사헌이민적(李敏廸)의 처· 참판이선(李選)의 처 · 우의정김석주(金錫胄)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추포집(秋浦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해동역사(海東繹史)』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명재유고(明齋遺稿)』
- 『간이집(簡易集)』
- 『갑진만록(甲辰漫錄)』
- 『계곡집(谿谷集)』
- 『담헌서(湛軒書)』
- 『동각잡기(東閣雜記)』
- 『동사일기(東槎日記)』
- 『문견별록(聞見別錄)』
- 『미수기언(眉叟記言)』
- 『백사집(白沙集)』
- 『백호전서(白湖全書)』
- 『사계전서(沙溪全書)』
- 『사상록(槎上錄)』
- 『상촌집(象村集)』
- 『서애집(西厓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속잡록(續雜錄)』
- 『시정비(時政非)』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약천집(藥泉集)』
- 『연행록(燕行錄)』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증정교린지(增正交隣志)』
- 『청음집(淸陰集)』
-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하담파적록(荷潭破寂錄)』
- 『혼정편록(混定編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