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형(黃衡)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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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황형 |
한글표제 | 황형 |
한자표제 | 黃衡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무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성종~중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언평(彦平) |
시호 | 장무(莊武)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59년(세조5) |
사망 | 1520년(중종15) 12월 13일 |
본관 | 창원(昌原)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강화부(江華府) 장령리(長嶺里) 대묘동(大廟洞) |
증조부 | 황창(黃昌) |
조부 | 황선경(黃善慶) |
부 | 황예헌(黃禮軒) |
모_외조 | 의령남씨(宜寧南氏): 남인보(南仁甫)의 딸 |
처_장인 | 원주원씨(原州元氏): 원보륜(元甫崙)의 딸 |
자녀 | (1자)황찬(黃瓚) (2자)황침(黃琛) (3자)황유(黃瑜) (4자)황원(黃瑗) (5자)황기(黃琦) (1녀)권수용(權守庸)의 처 (2녀)이종(李琮)의 처 (3녀)이찬(李璨)의 처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황형(黃衡) |
총론
[1459년(세조5)∼1520년(중종15) = 62세]. 조선 전기 성종~중종 때의 무신. 자는 언평(彦平).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선공감 정황예헌(黃禮軒)이고, 어머니 의령남씨(宜寧南氏)는 사헌부 감찰남인보(南仁甫)의 딸이다. 대흥현감(大興縣監)황선경(黃善慶)의 손자이고, 사정(司正)황지헌(黃智軒)의 조카이다.
성종시대 활동
1480년(성종11) 22세에 무과(武科)에 급제하였다. 그때 성종이 그가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은 것을 알고는 기뻐하며 그에게 무사(武士)들을 가르치도록 하고, 경전(經傳) 한 질(帙)을 하사하면서 격려하였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그를 부러워하였고 문무를 겸전한 양장(良將)이라 칭송하였다. 이어 상서원 직장에 임명되어 사복시를 겸임하였다. 무사들이 말 타고 활 쏘는 도시(都試)가 봄가을에 열렸는데, 그는 여덟 차례나 연달아 1등을 차지하였고, 그때마다 자급(資級)이 올랐다. 또 진현시(進賢試)에 합격하여 상서원 판관으로 승진하고 내승(內乘)을 겸임하였다. 1486년(성종17) 무과 중시(重試)에서 장원을 하여 정3품상 절충장군(折衝將軍)으로 승품되어 유원진첨절제사(柔遠鎭僉節制使)에 임명되었다. 이어 1490년(성종21) 혜산진첨절제사(惠山鎭僉節制使)로 옮겼다.
성종때 우디케 여진의 정벌
1491년(성종22) 만주 내지(內地)에 살고 있던 우디케(兀狄哈)가 두만강의 국경을 침범하여 변방의 수령(守令)들을 살해하자 성종은 도원수(都元帥)허종(許琮)을 보내어 야인(野人)을 대규모로 정벌하도록 하였다. 이때 황형은 표획장(豹獲將)으로서, 정벌 당시에는 선봉(先鋒)이 되었고, 귀환할 때는 후미(後尾)의 군을 이끌었다. 귀환 길에, 황형은 울지령(蔚地嶺)에서 우디케족의 습격을 받았으나, 대파하여 정벌군 전체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했다. 울지령은 wedi고개라고도 하는데, 오늘날 만주 동북부의 장광재 고개[長廣才嶺]로 보기도 한다. 성종이 황형의 전공을 1등으로 삼으려고 하였으나, 도원수허종이 반대하여 2등이 되었다. 상호군으로 있다가, 1493년(성종23) 평안도조방장(平安道助防將)으로 나가서 평안도절도사(平安道節道使)조극치(曹克治)와 함께 의주(義州)의 방비 대책을 마련하였다. 1494년(성종25) 훈련원 도정에 임명되었다가, 경상우도수군절도사(慶尙右道水軍節度使)로 나갔다.
연산군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1) 의주목사(義州牧使)에 임명되어, 조선과 명(明)나라 간의 교역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의주는 중국과 물화(物貨)를 교역하는 곳이므로, 서울의 경상(京商)과 개성의 송상(松商)뿐만 아니라 평양의 유상(柳商)까지 지점을 두고 있었다. 그러나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에는 이때의 황형의 활동에 대해 “백성들을 구휼(救恤)하지 않고 중국 물화[唐物]를 무역하기만 일삼으니, 고을 사람들이 괴로워하여 그를 가리켜 ‘채단적(採段賊)’이라 하였다.”라고 혹평하였다. 그 뒤에 평안도우후(平安道虞侯)로 옮겼다가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되었고, 이어 중추부 동지사가 되었다. 황형이 활쏘기와 말부리기를 잘하였으므로, 연산군은 그의 재능을 아껴 사냥할 때 그를 데리고 다녔다. 1505년(연산군11) 황형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자, 연산군은 임금의 강무(講武)에 타위 대장(打圍大將)의 일이 중요하다고 하여, 그 대신 다른 사람을 사신으로 보냈다. 1506년(연산군12) 함경북도병마절도사(咸鏡北道兵馬節度使)에 임명될 때, 연산군의 명으로 초자(超資)하여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다.
중종 때 삼포왜란의 진압
1510년(중종5) 동래의 부산포(釜山浦), 웅천의 제포(薺浦), 울산의 염포(鹽浦)의 3포(浦)에 거주하는 왜인들 4, 5천여 명이 대마도주(對馬島主) 소오사타모리[宗貞盛]의 원조를 얻어 폭동을 일으켰다. 이들은 3포의 관원과 군사를 죽이고 제포와 부산포를 점거한 다음에, 지금의 창원인 웅천성(熊川珹)을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이는 반정 후 중종이 개혁의 일환으로 세종 때 일본과 맺은 <계해조약(癸亥條約>에 따라 항거왜인(恒居倭人)의 숫자를 줄이고 밀무역을 엄격히 통제하자 왜인들이 이에 반발하여 일으킨 반란이었다. 그 해 4월 중추부 지사황형은 경상좌도방어사(慶尙左道防禦使)가 되어 전 방어사로 경상우도방어사가 된 유담년(柳聃年)과 함께, 경상 좌우도의 군사를 정비하여 왜인들을 토벌하였다.(『간이집(簡易集)』 권4)
중종시대 활동
1510년(중종5) <3포 왜란> 승전 첩보(捷報)를 받은 중종은 승지를 보내어 선유(宣諭)하고 황형을 정2품상 정헌대부(正憲大夫)로 승품하여 경상도절도사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그는 1511년(중종6) 흥청(興淸)의 기녀 서강월(西江月)과 놀아났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1512년(중종7) 중종은 파직된 황형을 다시 서용하기 위하여, 도적 소탕을 빌미로 그를 포도대장(捕盜大將)으로 삼았다. 1513년(중종8) 훈련원 지사를 겸임하였고, 1514년(중종9) 평안도절도사에 임명되었다. 그가 풍토병에 걸려 사임하자 중종은 그가 아니면 맡을 사람이 없다고 만류하였다. 이 일에 대해 사신(史臣)은 “황형은 욕심이 많은 폐단이 있었으나, 재간과 지략(智略)은 그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었다. 그러므로 임금도 그의 위세와 명망을 매우 무겁게 여겼던 것이다.”고 논평하였다. 1515년(중종10) 함경북도절도사로 옮겨서 북방의 여진족을 방어하였다. 오랫동안 북방의 여진족을 진무하였는데, 여진족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자기 아들의 이름을 황형이라고 지은 자도 있었다. 1516년(중종11) 중추부 지사, 1517년(중종12) 공조 판서를 차례로 맡았다. 이어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어, 오위도총부 도총관과 훈련원 지사를 겸임하였다. 1520년(중종15) 12월 13일 서울 본가에서 돌아가니, 향년 62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풍채가 헌칠하고 기골이 비범하여 멀리서 바라보더라도 그 모습이 헌걸차고 의젓하였다. 어려서부터 생김새가 우람차고 활을 쏘는 무예가 절륜(絶倫)하였다. 그는 경서와 사서(史書) 읽기를 좋아하여 처음에는 문과 공부를 하였다. 아버지 황예원이 문천군수(文川郡守)로 있을 때, 하루는 당시 21세이던 황형이 아버지의 사냥에 따라나섰다가 갑자기 튀어 나온 큰 멧돼지를 화살 한 발로 쓰러뜨린 일이 있었다. 황예원은 “사람은 저마다 다른 재주가 있으니, 문과 무는 애당초 서로 다른 것이 아니다.”고 하고, 아들에게 활과 말을 사 주면서 무예를 익히도록 권하였다. 그 뒤에 채 1년도 안 되어 황형은 무과에 급제하였다.
황형이 <3포 왜란> 때 왜구를 토벌하러 가면서 일찍이 그를 논핵한 자를 종사관으로 자벽(自辟)하니, 친구들은 그 종사관이 혹시라도 그를 해칠까봐 걱정하였다. 그러나 그는 종사관에게 자기의 속마음을 털어놓으면서, 털끝만큼도 꺼림직한 낌새를 드러내지 않았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평소보다 한결 더욱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작은 예절에는 구애받지 않았으나 엄숙하고 침착하여 시위(侍衛)하는 병졸들도 그를 두려워하였다. 사는 집의 청사 마루에 층을 만들어, 공사로써 찾아오는 낭료(郞僚)들로 하여금 비록 문사(文士)라 하더라도 반드시 아래층에서 절하게 하고 감히 방자하게 굴지 못하게 하였다.(『송와잡설(松窩雜說)』) 그러므로 남의 말을 귀담아 듣지 않는 단점도 있었다.
그는 젊어서부터 군대의 진법(陣法)에 정통하고, 지형의 생김새와 적군의 강약(强弱) 등을 미리 정확히 조사하여 면밀한 작전을 세워서 지휘하였으므로 사졸(士卒)들의 신망이 두터웠다. 임금은 국가에 중대한 기무(機務)에는 반드시 그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였으며 변경에 위급한 경보(警報)가 발생하면 반드시 그를 보내어 진압하였다. 여진족의 침략을 우려하던 성종과 중종은, 그들을 복종시키는데 황형만한 인물이 없다고 여겨 그를 오랫동안 북병사(北兵使)로 두었다. 『중종실록(中宗實錄)』「황형 졸기」에서 사신은 “황형은 무예에 능하고 책략(策略)이 많아서 훌륭한 장수의 재목이었다. 그러나 본디 조행(操行)이 없어서 재물을 탐하고 색(色)을 좋아하였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장무(莊武)이다. 묘소는 경기도 강화부(江華府) 동쪽 장령리(長嶺里) 대묘동(大廟洞)에 있는데, 치천(稚川)윤방(尹昉)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부인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군수원보곤(元甫崑)의 딸인데, 자녀는 5남 3녀를 두었으니, 장남 황찬(黃瓚)은 부사, 차남 황침(黃琛)은 한성부판윤, 3남 황유(黃瑜)는 첨정, 4남 황원(黃瑗)은 별좌, 5남 황기(黃琦)는 경기도관찰사를 지냈다. 3녀는 이찬(李璨)의 처가 되었다. 손자 황대수(黃大受)는 황원의 아들인데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을 지냈고, 증손자 황치경(黃致敬)은 문과에 급제하여 관찰사와 참의를 지냈다.
참고문헌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재잡기(寄齋雜記)』
- 『간이집(簡易集)』
- 『국조보감(國朝寶鑑)』
- 『상촌집(象村集)』
- 『성호사설(星湖僿說)』
- 『송와잡설(松窩雜說)』
- 『순암집(順菴集)』
- 『역대요람(歷代要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용재집(容齋集)』
- 『음애일기(陰崖日記)』
- 『임하필기(林下筆記)』
- 『재조번방지(再造藩邦志)』
- 『패관잡기(稗官雜記)』
- 『해동잡록(海東雜錄)』
- 『홍재전서(弘齋全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