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기(黃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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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98년(연산군4)∼1539년(중종34) = 42세]. 조선 중기 중종 때의 문신. 자는 중온(仲韞), 호는 월보(月甫)이다. 본관은 창원(昌原)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판서황형(黃衡)이고, 어머니 원주원씨(原州元氏)는 군수(郡守)원보곤(元甫崑)의 딸이다. 선공감 정황예헌(黃禮軒)의 손자이고,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황침(黃琛)의 동생이다.

중종시대 활동

1524년(중종19) 27세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 급제하였다. 처음에 승문원 정자에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에 임명되었다. 1530년(중종25)에 성균관 전적과 예조 좌랑, 1531년(중종26)에 이조 좌랑을 역임하였다. 1533년(중종28) 홍문관 부교리, 사간원 헌납, 사헌부 지평을 거쳐, 의정부 사인으로 승진하였다. 1534년(중종29) 홍문관 교리, 사헌부 지평, 사헌부 장령을 차례로 맡았다. 1535년(중종30) 홍문관에 들어가 부응교 · 응교 · 전한으로 승진하였고,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 이어 사간원 사간이 되었는데 세자시강원 보덕을 겸임하였다. 1536년(중종31) 홍문관 직제학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로 발탁되었다.

1537년(중종32) 우의정김안로(金安老)의 천거로 사간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 그때 김안로가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을, 헌릉(獻陵)의 우강(右岡)으로 모신 반대파를 탄핵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러나 그가 정론(正論)을 펴면서 이를 거절하자, 길주목사(吉州牧使)로 좌천되었다. 그해 김안로가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폐위를 도모하다가 복주(伏誅)되자, 다시 승정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다. 1538년(중종33) 우승지와 좌승지를 거쳐 도승지로 영전하였다. 1539년(중종34)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공조 참판에 임명되었다가, 경기도관찰사로 나가 도내의 인사를 바로잡았다. 1539년(중종34) 11월 초9일에 갑자기 병으로 쓰러져서 일어나지 못하니, 향년이 42세였다.

성품과 일화

황기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용모가 준수하고 아름다워 멀리서 바라보면 마치 신선처럼 보였다. 행실이 점잖고 물욕(物慾)이 적었으며, 집안의 살림과 재산, 권세나 이익 따위에 욕심이 없었다. 평소에 급하게 서두르는 말이나 기색이 없어서, 언제나 화기(和氣)가 넘쳤다. 그러나 관직을 맡아서 일을 처리할 때에는 남들이 감히 사적인 일을 부탁하지 못하였다. 어려서부터 머리가 영민하여 또래 아이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1524년(중종19) 한성시(漢城試)에 응시하였다가 친구 김성구(金成九) · 원수장(元壽長) 등과 함께 시험 보조원인 지동관(枝同官)이 되었다. 마침 이들과 아는 거자(擧子)가 있었는데, 그 거자의 시권(試券)을 그에게 들어서 보여주고 과차(科次)를 말하여 주다가 적발되었다. 의금부에서 그들의 죄가 곤장 80대의 형벌에 해당한다고 보고하였으나 중종은 그 아버지 황형의 체면을 보아 죄를 1등급 감해 주었다. 황형은 중종이 가장 신임하는 명장이었는데, 당시 북병사(北兵使)로 함경도에 나가 오랫동안 고생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서쪽 묘동(廟洞)의 언덕에 있는데, 양곡(陽谷)소세양(蘇世讓)이 지은 비명이 남아 있다. 부인 청주양씨(淸州楊氏)는 장사랑(將仕郞)양세준(楊世俊)의 딸로, 자녀는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황대용(黃大用)은 참봉을 지냈고, 차남 황대임(黃大任)은 백부 한성부판윤황침의 양자로 갔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각잡기(東閣雜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역사(海東繹史)』
  • 『어촌집(漁村集)』
  • 『지퇴당집(知退堂集)』
  • 『야당유고(野堂遺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