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략(經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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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청 시기 전쟁 발발 등 군사적 임무가 중요한 경우에 임시로 설치한 특별한 관직.

개설

명은 13개의 성과 요동 등 변방에 지방의 군정을 담당하는 도지휘사사(都指揮使司)를 설치하였는데, 도지휘사사 이하에 설치된 위소(衛所) 단위의 군사가 각각의 임무나 수비 범위에 따라 지방의 실질적인 병력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 후금의 흥기와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는 더 큰 권한을 부여받은 지휘관이 필요하였고 이에 설치된 것이 경략(經略) 또는 독사(督師)의 관직이다. 이러한 관직은 모두 문관에서 선발되었으며, 현지의 총독(總督)·순무(巡撫)와 총병관(總兵官)을 지휘하에 두고 광역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다.

담당 직무

명·청 시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설치되는 비상설(非常設) 관직으로 총독보다 높은 직위에 있었다. 한 개 로(路) 혹은 몇 개 로의 군정 사무를 담당하였다. 한 예로 임진왜란이 발발한 시기에 경략에 임명된 송응창(宋應昌)은 명나라 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참전하여 군사적 지원 및 전략, 전술을 수립하여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이에 선조는 경략은 명나라 조정의 중신으로 조선을 구원하려고 왔기 때문에 직접 맞이해야 한다는 전교를 예조에 내리기도 하였다(『선조실록』26년 1월 29일). 또한 경략의 직위에 있던 송응창은 조선 국왕이었던 선조에게 격문을 보내 분투를 역설하기도 하였다(『선조실록』25년 11월 15일).

변천

남북조 시기 일찍이 경략을 두었고, 당나라 초기 변주(邊州)에 경략사(經略使)를 설치하였으며, 송나라 시기 경략안무사(經略安撫使)를 설치하였다. 한 개 로(路)의 민병(民兵)과 관련된 일을 주관하였으며 모두 약칭하여 경략이라 하였다. 명·청 시기에는 중요한 군사적 임무가 있을 때 특별히 설치된 관직이었으며 민국 초기에도 여전히 설치되었다.

명나라 초기에는 조정에서 군정을 정돈하기 위해 지방으로 파견한 관원이었다. 1412년(명 영락 10) 시강(侍講)양영(楊榮)으로 하여금 감숙(甘肅)을 다스리도록 한 것에서 비롯되었으나 이후 오랜 기간 설치하지 않았다. 1592년(명 만력 20) 병부 우시랑송응창에게 임진왜란을 의미하는 비왜(備倭) 사무를 담당하도록 하여 현지로 파견해 군무(軍務)를 총괄 관리하도록 하였다.

경략은 상황에 따라 설치하였으며 제도화하지 않았다. 만력, 천계 연간 요동에 설치하고 도어사(都御史)가 겸하여 맡도록 하였는데, 요동 군무와 관련한 일을 주관하도록 하였다. 1631년(명 숭정 4) 총독에 통합되었다.

참고문헌

  • 김경태, 「임진전쟁기 강화교섭 연구」, 고려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4.
  • 진상승, 『명 만력시기 조선원조전쟁에 관련된 중요인물』, 「사회과교육」51, 한국사회과교육연구학회, 2012.
  • 中國歷史大辭典·明史編纂委員會編, 『中國歷史大辭典·明史卷』, 上海辭書出版社, 1995.
  • 沈起煒·徐光烈, 『中國歷代職官辭典』, 上海辭書出版社,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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