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원(陵園)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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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능원 |
한글표제 | 능원 |
한자표제 | 陵園 |
하위어 | 산릉(山陵), 왕릉(王陵), 원소(園所) |
동의어 | 원릉(園陵) |
관련어 | 강릉(康陵), 건릉(健陵), 건원릉(健元陵), 경릉(景陵), 광릉(光陵), 단릉(單陵), 명릉(明陵), 목릉(穆陵), 빈전도감(殯殿都監), 산릉도감(山陵都監), 선릉(宣陵), 소경원(昭慶園), 소령원(昭寧園), 수경원(綏慶園), 순강원(順康園), 순창원(順昌園), 숭릉(崇陵), 쌍릉(雙陵), 영릉(寧陵), 영릉(英陵), 영회원(永懷園), 예릉(睿陵), 원릉(元陵), 원소도감(園所都監), 유릉(裕陵), 의령원(懿寧園), 의릉(懿陵), 인릉(仁陵), 장릉(長陵), 정릉(靖陵), 정자각(丁字閣), 창릉(昌陵), 헌릉(獻陵), 현릉(顯陵), 혼전도감(魂殿都監), 홍릉(洪陵), 효릉(孝陵), 효창원(孝昌園), 후릉(厚陵), 휘경원(徽慶園) |
분야 | 왕실/왕실건축/능·원·묘 |
유형 | 개념용어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신지혜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능원(陵園)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영조실록』 40년 5월 19일, 『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정조실록』 13년 8월 9일, 『고종실록』 36년 9월 1일, 『예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현종실록』 14년 6월 12일 |
능과 원을 통칭하는 조선 왕실의 무덤.
개설
조선 왕실의 무덤은 위계에 따라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하였다. 왕과 왕비 및 추존된 왕과 왕비의 무덤은 능이라고 하며, 세자·세자빈과 왕위에 오른 아들을 낳은 후궁의 무덤은 원이라고 불렀다. 이를 통칭하여 능원이라 한다. 그 외에 왕자와 공주, 대군 등의 왕족 무덤은 묘라고 불렀다. 그리고 왕위에는 올랐으나,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군과 광해군의 무덤은 묘가 되었다.
능·원·묘의 위계는 매장된 사람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면서 변하기도 하는데, 사도세자(思悼世子)의 묘가 대표 사례이다. 사도세자는 영조대 정치적인 문제로 세자의 신분에서 역적으로 죽음을 당하여 묘호 없이 매장되었다가 1762년(영조 40)에 영조가 수은묘(垂恩墓)라는 묘호를 내렸다(『영조실록』 40년 5월 19일). 이후 그의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우원(永祐園)으로 이름을 바꾸고 격상시켰다(『정조실록』 즉위년 3월 20일). 1789년(정조 13)에는 영우원을 화성으로 옮기면서 현륭원(顯隆園)이라 이름을 바꾸었다(『정조실록』 13년 8월 9일). 이후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가 되면서 8대조를 황제로 추숭하는 과정에 장조(莊祖)가 되었으며, 현륭원은 융릉(隆陵)으로 승격되었다(『고종실록』 36년 9월 1일).
조선시대 능원에서 현존하는 왕릉은 40기 정도이며, 원은 13기가 보존되어 있다. 왕릉으로는 태조의 건원릉(健元陵)을 시작으로 정종과 정안왕후(定安王后)의 후릉(厚陵), 태종과 원경왕후(元敬王后)의 헌릉(獻陵), 세종과 소현왕후(昭顯王后)의 영릉(英陵), 문종과 현덕왕후(顯德王后)의 현릉(顯陵), 세조와 정희왕후(貞熹王后)의 광릉(光陵), 예종과 안순왕후(安順王后)의 창릉(昌陵), 성종과 정현왕후(貞顯王后)의 선릉(宣陵), 중종의 정릉(靖陵), 인종과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孝陵), 명종과 인순왕후(仁順王后)의 강릉(康陵), 선조와 의인왕후(懿仁王后)·인목왕후(仁穆王后)의 목릉(穆陵), 인조와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장릉(長陵), 효종과 인선왕후(仁宣王后)의 영릉(寧陵), 현종과 명성왕후(明聖王后)의 숭릉(崇陵), 숙종과 인현왕후(仁顯王后)·인경왕후(仁敬王后)의 명릉(明陵), 경종과 선의왕후(宣懿王后)의 의릉(懿陵), 영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원릉(元陵), 정조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건릉(健陵),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인릉(仁陵), 헌종과 효현왕후(孝顯王后)·효정왕후(孝定王后)의 경릉(景陵), 철종과 철인왕후(哲仁王后)의 예릉(睿陵), 고종과 명성황후(明成皇后)의 홍릉(洪陵), 순종과 순명황후(純明皇后)·순정황후(純貞孝皇)의 유릉(裕陵)으로 24기가 있다. 이 중 홍릉과 유릉은 황제릉이다.
왕과 따로 묻힌 왕비의 능으로 태조원비 신의왕후(神懿王后)의 제릉(齊陵)과 태조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정릉(貞陵)이 있으며, 단종비 정순왕후(定順王后)의 사릉(思陵)과 예종비 장순왕후(章順王后)의 공릉(恭陵), 성종비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의 온릉(溫陵),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 중종의 두 번째 계비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 인종비 장렬왕후(莊烈王后)의 휘릉(徽陵), 숙종의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翼陵), 경종의 원비 단의왕후(端懿王后)의 혜릉(惠陵),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弘陵)으로 모두 12기가 있다.
추존되어 왕릉으로 조성된 사례는 조선전기부터 후기까지 나타난다. 성종의 아버지 덕종과 소혜왕후(昭惠王后)의 경릉(敬陵)이 있으며, 인조의 생부 원종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장릉(章陵)이 있다. 정조의 생부인 사도세자를 장조로 추존하고 그의 무덤을 융릉(隆陵)으로 조성하였다. 정조는 왕위를 계승하기 위하여 영조 맏아들의 양자가 되는데, 영조의 맏아들 진종의 무덤이 영릉(永陵)이다. 순조의 맏아들인 효명세자(孝明世子)는 그의 아들 헌종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으로 추존되어 수릉(綏陵)이 조성되었다.
원(園)에는 명종의 맏아들 순회세자(順懷世子)와 세자빈 공회빈(恭懷嬪)의 순창원(順昌園)이 있으며,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소경원(昭慶園)과 그의 부인인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영회원(永懷園), 정조의 맏아들 순효세자(順孝世子)의 효창원(孝昌園), 사도세자의 맏아들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의령원(懿寧園)이 있다. 아들이 왕위에 오른 후궁으로는 인조의 생부인 원종을 낳은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순강원(順康園)이 있고,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소령원(昭寧園), 사도세자의 어머니 영빈이씨(暎嬪李氏)의 수경원(綬慶園), 순조의 생모인 수빈박씨(綏嬪朴氏)의 휘경원(徽慶園) 등이 있다.
내용 및 특징
능원은 도성에서 가까운 곳 가운데 풍수적 조건을 고려하여 조성되었다. 대개 도성에서 4㎞에서 40㎞ 이내로 정해졌다. 능원에서 장례 의식을 행하고 첫날에 초우제(初虞祭)를 지내는데, 혼전에서 설행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조선초기에는 왕이 직접 능에 행차하여 장례 의식에 참여했으며, 이후에도 능에 행행하는 일이 있으므로 이를 고려하여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하였다. 가장 가까운 사례는 헌릉·인릉과 선릉·정릉인데, 당시에는 도성 밖이었으며, 현재는 서울특별시 서초구와 강남구에 위치하고 있다.
이외에 대부분의 능원은 경기도에 위치하며 하나의 산기슭에 여러 능이 군집하고 있다. 서울의 동쪽에는 동구릉이 있는데, 현재 경기도 구리시에 위치한다.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건원릉을 중심으로 동쪽에는 목릉이 위치하며, 그 남쪽으로 현릉이 있고 그다음으로 수릉이 자리 잡고 있다. 건원릉의 서쪽에는 휘릉과 경릉·원릉·혜릉·숭릉이 있어 모두 9개의 능이 자리 잡고 있는데, 9개의 능이 있다고 해서 동구릉이라고 하였다. 서울의 서쪽에는 서오릉과 서삼릉, 공릉(恭陵)·순릉(順陵)·영릉(永陵) 등이 있다. 서오릉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있으며 덕종의 경릉, 예종의 창릉, 숙종의 명릉, 숙종 원비 인경왕후의 익릉,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의 홍릉의 5개 능이 있으며 그 외에 순창원과 수경원이 있다. 인근에 서삼릉이 있는데, 희릉과 효릉·예릉의 3개 능이 이곳에 있다. 공릉·순릉·영릉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조리면에 위치하며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의 공릉, 성종비 공혜왕후의 순릉, 영조의 장자 진종의 영릉이 같은 능역 안에 있다.
서울에서 멀리 위치하는 사례로는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과 후릉이 있으며 경기도 여주의 세종의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 강원도 영월의 단종 능인 장릉이 있다. 후릉은 정종이 개성을 도성으로 삼고 있을 당시 조성되었으며, 제릉과 장릉은 처음에는 능이 아니었다가 나중에 능으로 조성되었기 때문이다. 세종의 영릉과 효종의 영릉은 모두 나중에 옮겨진 사례이다. 그중 효종 영릉은 효종 비 인선왕후의 국장이 여주로 옮겨진 이후 일어났다. 여주까지 발인 행렬이 3일이 소요되었으며, 대여(大輿)를 이끌고 한강을 건너기 위한 공역도 대단했다. 아마도 이러한 번거로움 때문에 도성과 가까운 곳에 능원의 터를 선택했을 것이다.
능원을 들어서는 입구에는 개천이 흘러 능역을 구분하고 있으며, 개천을 건너도록 금천교가 놓여 있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있으며, 홍살문 안쪽이 본 능역이라 할 수 있다. 궁궐의 전면에 금천과 금천교를 놓는 것과 유사한 방식이다.
능역은 크게 제례를 지내는 정자각을 중심으로 하는 능하(陵下)와 봉분이 조성된 능상(陵上)으로 구분된다. 대개 정자각은 능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그 앞쪽으로 동쪽에는 수복방이 있고 서쪽에는 수라간이 위치한다. 정자각의 동북쪽에는 비석이 세워져 있으며, 비석을 보호하기 위한 비각이 있다.
정자각 북쪽으로는 높은 언덕을 조성하여 그 위에 봉분이 형성되어 있다. 봉분은 한 명만 매장된 단릉인 경우가 있고, 왕과 왕후가 함께 매장된 쌍릉, 철종과 같이 왕과 두 명의 왕후가 모셔져 3개의 봉분이 나란히 배치된 사례도 있다. 봉분 주변에는 석호(石虎)와 석양(石羊)이 각각 4마리씩 번갈아 가며 빙 둘러 있으며 그 외곽으로 곡장(曲墻)을 둘렀다. 봉분의 앞에는 혼유석이 있으며, 그 좌우에 망주석이 세워져 있다. 혼유석 앞에는 장명등이 있으며, 그 앞으로 문인석과 무인석이 한 쌍씩 세워져 있고 문·무인석의 뒤에는 각각 마석(馬石)이 세워져 있다.
조선시대에는 국상이 발생하면 상·장례를 원활하게 진행하고 능원을 조성하기 위해 빈전도감(殯殿都監)·국장도감(國葬都監)·산릉도감(山陵都監) 등의 임시 기관을 설치하고 총괄 책임자로 총호사(摠護使)를 선정하였다. 능을 조성할 때는 산릉도감을 설치하며 원을 조성할 때는 원소도감(園所都監)이 된다. 대부분 총호사는 좌의정이 맡으며 왕과 산릉 조성에 안건을 논의하고 공역을 총괄한다.
산릉을 조성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터를 고르는 일이다. 산과 물의 형세를 살펴 터를 정하면 그 주변으로 봉표하고 공역에 필요한 석재와 목재를 수급하기 시작한다. 터를 선정한 곳에서 묏자리가 될 혈처를 파내어 누른빛의 고운 진토가 나오면 완벽하게 터가 정해지고 건축 공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그러나 계속 나뭇잎 등이 썩은 부토가 나오면 혈처를 변경해야 하므로 매우 예민한 일이 된다. 묏자리가 확정되면 산릉도감 혹은 원소도감에 소속된 삼물소(三物所)에서 묘소의 회곽을 조성하고, 조성소(造成所)에서 정자각과 재실, 능상각, 홍살문, 수라간, 수복방 등의 건축 공사를 책임진다. 대부석소(大浮石所 )에서는 봉분 주변에 문·무인석과 석양·석호·혼유석·장명등·망주석 등을 조성한다. 보토소(補土所)에서는 봉분 주변의 지세를 살펴 흙을 쌓아 돋우기도 하고 평평하게 고르기도 하여 명당의 형세를 보강한다. 그 외에 건축 자재를 수급하기 위한 부서가 있는데, 소부석소는 건축물에 들어가는 석물을 제작하고, 번와소에서는 지붕에 올릴 기와를 제작하며, 분장흥고에서는 건물 내부의 도배에 쓸 종이와 바닥 깔개, 휘장 등을 공급한다. 또 별공작은 내부에 배치되는 가구를 제작한다.
산릉도감의 각 부서에서 분담하여 일을 신속하게 마치면 능원 조성에 대한 시작부터 끝까지 오고 간 문서와 공역에 들어간 목재·석재 등의 물목을 정리하여 의궤를 작성하였다. 의궤를 작성해 두면 이후 능원 조성에 참고가 되며, 능원 조성에 참여한 관원들의 공로 크기에 따라 상을 내리는 데 자료가 된다.
변천
조선초기의 능원 제도는 고려대의 관습을 이어받아 행해졌으나, 이를 세종대에 유교적 사상에 맞게 변형하여 정비하였다. 당시 묘는 석실을 만들고 석실 내부에는 사면에 청룡, 백호, 현무, 주작을 그려 방향을 상징하고 수호하도록 하였다. 뚜껑돌에는 별의 운행 길에 따라 일월 성신(星辰) 은하를 그렸다. 봉분 주위에는 병풍처럼 호석(護石)과 난간석을 배치하고 호석은 12면을 이루도록 하여 12신을 새겨 수호의 의미를 담았다. 그 위로 흙을 쌓아 봉분을 만드는데, 호석의 높이보다 12자 5치 정도 높게 조성하였다고 한다.
세조대에 왕릉의 조성에 변화가 생긴다. 세조는 자신의 능에 석실(石室)과 석곽(石槨)을 만들지 말라고 명하였다(『예종실록』 즉위년 9월 17일). 따라서 세조의 광릉 이후 석실을 조성하지 않고 석회를 이용하여 회곽을 만드는 제도로 변하였다. 세조는 또한 사대석(莎臺石)을 쓰지 않고 난간석만을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대석은 봉분 주위에 병풍처럼 두른 호석을 말하는데, 호석은 봉분을 높이 쌓을 때 흙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지탱하는 역할을 했다. 따라서 광릉에 사대석을 쓰지 않자 봉분의 흙이 자주 무너지는 폐단이 생겼고, 이후로는 다시 사대석을 사용하였다.
능원에 제향의 중심 건물이 되는 정자각은 고려시대부터 조성되었다. 정자각은 건물의 평면형이 ‘丁’ 자형으로, 정전과 배위청으로 공간이 구분된다. 정자각의 조성 규모는 5칸으로 조성된 사례와 8칸으로 조성된 사례가 있다. 대부분 정전 3칸에 배위청 2칸, 총 5칸으로 조성하였으나, 일부는 정전 3칸 좌우에 익각을 두어 5칸으로 하고 배위청을 3칸으로 확장한 사례가 있었다. 그 대표가 되는 것이 세조의 광릉이다.
1673년(현종 14) 현종이 효종의 영릉을 여주로 옮기면서 새롭게 정자각을 조성할 때 세조의 광릉 정자각 제도에 따라 영릉을 8칸으로 조성하였다(『현종실록』 14년 6월 12일). 이를 시작으로 숙종 연간에 현종의 영릉, 장렬왕후의 휘릉, 인경왕후의 익릉, 인현왕후의 명릉 등을 조성할 때 정자각의 규모를 8칸으로 하였다. 또한 1724년(영조 즉위)에 경종의 의릉을 조성할 때도 8칸으로 조성하였다. 그러나 1757년(영조 33)에 인원왕후와 정성왕후의 국상이 한 달 사이 발생하여 산릉 조성 공역이 겹쳐 국가 재정과 민력에 폐를 끼치게 되자 정자각의 제도를 5칸으로 축소하였다. 영조는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라는 책을 통해 왕실의 상장례 기준을 규정하였으며 이후 5칸의 정자각으로 일정한 규격을 갖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 국립문화재연구소 무형문화재연구실 편, 『(국역)국조상례보편』, 민속원, 2008.
- 문화재청, 『조선왕릉 세계유산 등재 추진 종합 학술 연구-부록』, 문화재청,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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