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릉(溫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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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능.

개설

단경왕후는 1499년(연산군 5) 중종이 진성대군(晋城大君)으로 있을 때 그와 혼인하여 부부인(府夫人)이 되었다. 그 뒤 1506년(중종 1), 반정을 통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이 등극하면서 왕비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처남인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반정을 반대하다 반정 추진파에 의해 살해된 까닭에, 역적의 딸이라 하여 왕비가 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다. 1557년(명종 12) 12월 7일에 승하하여 양주 서산 장흥면에 있는 친정의 묘역에 해좌사향(亥坐巳向)으로 안장되었다. 1739년(영조 15)에 왕후로 복위되었는데, 시호는 ‘단경’, 능호는 ‘온릉’이라 하였다. 온릉은 오늘날 경기도 양주군 장흥면 일영리에 자리 잡고 있다.

조성 경위

1510년(중종 10) 중종의 제1계비인 장경왕후(章敬王后)가 승하한 뒤, 박상(朴祥)과 김정(金淨) 등이 폐출된 신씨를 복위할 것을 상소하였으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 뒤 1697년(숙종 24)에는 신규(申奎)가 노산군(魯山君) 즉 단종의 복위와 더불어 신씨를 추복(追復)할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런데 신씨의 위호를 추복하여 원비(元妃)가 되면 계비인 장경왕후의 윗자리가 되므로 쉽게 결정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인조의 맏아들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사당인 소현묘(昭顯廟) 담장 밖에 신씨의 사당을 짓고, 제물을 내려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또 한식과 기일에는 묘소에서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숙종실록』 25년 5월 28일).

신씨는 영조대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복위되었다. 1739년(영조 15) 3월 11일 김태남(金台南)의 상소로 발의되어, 3월 28일에는 신씨의 시호를 단경, 능호를 온릉으로 정하였으며, 봉릉도감(封陵都監)을 설치하였다(『영조실록』 15년 3월 28일).

조성 상황

온릉은 기존 신씨의 묘를 왕비 능의 격에 맞게 규모와 석물을 갖추는 방식으로 조성되었다. 온릉을 조성하면서 작성한 『온릉봉릉도감의궤(溫陵封陵都監儀軌)』에는 봉릉(封陵) 이전의 묘소 상태가 기록되어 있다. 그에 따르면 봉분은 지름이 19자에 높이가 7자로 작았고, 석물은 석인 1쌍, 망주석 1쌍, 상석 1개, 장명등 1개로 단출했으며, 표석에는 ‘폐비신씨지묘(廢妃愼氏之墓)’라고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능으로 격상된 뒤에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의 능인 사릉(思陵)과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神德王后)의 능인 정릉(貞陵)의 예에 따라 조성하였는데, 능상의 지름은 영조척으로 25자, 높이는 9자로 하였다. 봉분 주위에는 곡장을 둘렀으며, 난간석이나 병풍석은 두지 않았다. 석물은 혼유석 1개, 장명등 1개,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 망주석 1쌍, 양석(羊石)과 호석(虎石) 각 2개씩으로, 상단과 하단으로 나누어 배치하였다. 석물의 수가 다른 능에 비해 적은 것은 추봉된 왕비의 예에 따랐기 때문이다.

변천

1770년(영조 46)에 각 능에 비를 세우면서 온릉에도 비를 세울 것을 명하였으나 세워지지 않았던 듯하다(『영조실록』 46년 윤5월 9일). 이로부터 5년이 지나 운봉군(雲峰君)이심(李杺)이 공릉(恭陵)·순릉(順陵)·온릉에 비석을 세우기를 상소하였으나 다음 봄으로 미루었다(『영조실록』 51년 6월 6일). 1788년(정조 12)에도 한 차례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으나 세워지지 않았고, 1800년(정조 24)에 사간(司諫)심규로(沈奎魯)의 건의로 비석을 세우게 되었다(『정조실록』 24년 5월 10일).

참고문헌

  • 『온릉봉릉도감의궤(溫陵封陵都監儀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