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회원(永懷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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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의 맏아들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비 민회빈(愍懷嬪) 강씨(姜氏)의 묘.

개설

민회빈은 우의정강석기(姜碩期)의 딸로, 1627년(인조 5) 9월에 소현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어 12월에 가례를 올렸다. 이후 병자호란 직후인 1637년(인조 15)부터 8년 동안 소현세자와 더불어 심양에 볼모로 억류되어 있었다. 1645년(인조 23) 귀국하였으나, 소현세자가 갑자기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역모에 연루되어 폐출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그 묘인 영회원은 오늘날 경기도 광명시 노온사동에 있다.

조성 경위

강씨의 복권은 숙종대에 이르러서야 거론되었는데, 1718년(숙종 44)에 위패와 시호를 회복시키기로 하고 시호를 ‘민회’로 정하였다(『숙종실록』 44년 4월 17일). 이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가 지위를 잃고 죽은 것을 슬퍼하고 가슴 아파하게 만들었다는 의미이다. 민회빈의 신위는 소현세자의 사당인 소현묘(昭顯廟)에 합사하였다.

묘는 강씨 집안의 묘역이 위치한 금천(衿川)에 있었는데, 세자빈의 격식에 맞게 묘를 개수하기 위해 봉묘도감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금천에 있는 묘를 봉심한 결과 보토해야 할 곳이 많았으며, 상설(象設)을 배치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좁았다. 그에 따라 소현세자의 묘에 쌍분으로 합장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그러나 70년이 넘은 묘를 옮기는 일이 어려워 묘를 개수하기로 결정하였다(『숙종실록』 44년 8월 28일).

조성 상황

민회빈을 복위한 뒤 그 묘를 개수하기 위해 처음에는 봉묘도감(封墓都監)을 구성하였다. 이후 소현묘(昭顯墓)에 합장하기로 함에 따라 천묘도감(遷墓都監)으로 변경했다가 개수하기로 결론을 내리면서 다시 봉묘도감으로 바꾸었다. 그러나 총책임자인 도제조(都提調)는 김창집(金昌集)이 끝까지 맡았다.

민회빈 묘의 개수는 봉분을 더 크게 쌓고, 지석과 죽책문을 새로 만들어 묻고, 석물과 정자각 등의 건물을 세자빈의 격에 맞게 조성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이때 각종 예제(禮制)는 단종의 비 정순왕후(定順王后)를 복위하면서 그 묘를 사릉(思陵)으로 봉릉할 때의 기록인 『사릉등록(思陵謄錄)』을 참조하였다.

석물의 수효와 규모 등은 단의빈묘(端懿嬪墓)의 예를 따랐다.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에 따르면 봉분에 난간석은 설치하지 않고, 동그란 성석(星石)을 박은 곡장을 둘렀다. 그밖에 혼유석과 장명등 1개, 문인석 1쌍과 마석(馬石) 2개, 호석(虎石) 2개와 양석(羊石) 2개를 설치하였다.

변천

1870년(고종 7)에는 세자나 세손의 묘호(墓號)를 원(園)으로 승격시키고 이어서 여러 원의 명칭을 고쳤는데, 이때 소현원(昭顯園)을 소경원(昭慶園)으로, 민회원(愍懷園)을 영회원으로 바꾸었다(『고종실록』 7년 12월 6일)(『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관련 사항

민회묘를 개수할 때 참조한 단의빈묘는 경종이 즉위하기 전인 1718년(숙종 44) 2월에 세상을 떠난 세자빈 심씨(沈氏)의 묘이다. 후에 경종이 즉위하면서 단의빈이 단의왕후로 추증됨에 따라 혜릉(惠陵)으로 격상되었다.

참고문헌

  • 『민회빈봉묘도감의궤(愍懷嬪封墓都監儀軌)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