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원(懿寧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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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

개설

오늘날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자리하고 있다. 1752년(영조 28) 의소세손이 세상을 떠났을 때, 안장된 곳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북아현동에 해당하는 양주 안현(鞍峴)으로, 당시에는 의소묘(懿昭墓)라고 불렀다. 1870년(고종 7)에 의령원으로 원호를 고쳤으며, 1949년 6월 7일에 현재의 위치로 이장하였다.

조성 경위

의소세손은 사도세자와 혜빈홍씨의 적장자로,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다. 1751년(영조 27) 5월 13일에 세손으로 책봉되었으나, 세 살이 되던 해인 1752년(영조 28)에 창경궁통명전(通明殿)에서 죽었다. 죽은 지 석 달 만인 5월 12일에 양주 안현 남쪽 기슭에 예장하고 묘는 의소묘라 불렀다.

조성 상황

의령원은 세손 묘의 격식을 갖추고 있어 매우 간소하다. 봉분 사방에 호석과 양석 각 2개씩이 설치되어 있으며, 상계에는 표석과 혼유석, 망주석 1쌍이 있다. 표석은 영조가 직접 쓴 것이다. 하계에는 가운데에 장명등이 있고, 좌우에 문인석과 마석이 각 1쌍씩 배치되어 있다.

변천

의소묘는 편의에 따라 도성에서 가까운 곳에 조성했기 때문에, 묘역의 숲에 사는 호랑이와 표범이 백성들의 걱정을 사는 경우가 있었다. 1779년(정조 3)에는 이를 염려하여 묘역의 수목을 베어 내는 작업을 진행했다. 1870년(고종 7)에는 모든 능·원·묘의 정자각을 일제히 수개하였는데, 이때 의소묘의 정자각도 개수되었다. 같은 해 12월에 원호를 의령원으로 고쳤으며, 1899년(광무 3)에는 정자각 내에 설치한 신욕(神褥)과 좌면지(座面紙)가 사라지는 사건이 발생하여 다시 마련하여 배설했다.

일제강점기 때 전국에 흩어져 있던 태실과 효장묘(孝章墓), 문효묘(文孝墓) 등을 모두 서삼릉 내로 옮겼는데, 의령원은 해방 이후인 1949년에 효장묘 뒤쪽으로 이장되었다.

관련 사항

영조는 의소세손의 명복을 빌기 위해 봉원사(奉元寺)를 의소묘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특교(特敎)를 내려 용인의 땅을 사위전(寺位田)으로 획급하였다(『영조실록』 31년 11월 20일).

참고문헌

  •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육백년사 Ⅴ. 문화사적』, 서울시사편찬위원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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