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조(金銚)
주요 정보 | |
---|---|
대표표제 | 김조 |
한글표제 | 김조 |
한자표제 | 金銚 |
분야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유형 | 인물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태종~세조 |
집필자 | 박순섭 |
이칭 | 김빈(金鑌) |
자 | 자화(子和) |
호 | 졸재(拙齋) |
시호 | 공간(恭簡)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사망 | 1455년(세조 1) |
본관 | 김해(金海) |
주거지 | 서울 |
자녀 | (1자)김여(金輿) (2자)김윤(金輪) |
저술문집 |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조(金銚)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태종실록』 16년 8월 17일, 『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세종실록』 11년 4월 12일, 『세종실록』 13년 3월 12일, 『세종실록』 15년 8월 11일, 『세종실록』 16년 7월 1일, 『세종실록』 16년 7월 2일, 『세종실록』 16년 8월 11일, 『세종실록』 18년 4월 9일, 『세종실록』 21년 12월 1일, 『세종실록』 23년 5월 12일, 『세종실록』 23년 윤11월 26일, 『세종실록』 25년 4월 12일, 『세종실록』 26년 4월 24일, 『세종실록』 26년 윤7월 27일, 『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 『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문종실록』 1년 7월 13일, 『단종실록』 1년 10월 11일, 『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세조실록』 1년 10월 11일, 『세종실록』 23년 윤11월 26일 |
총론
[?~1455년(세조 1)-?]. 조선 초 태종(太宗)~단종(端宗)때의 문신.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과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 예조 판서(判書) 등을 역임했다. 자는 자화(子和)이고, 호는 졸재(拙齋)이며, 시호는 공간(恭簡)이다. 뒤에 이름을 김조(金銚)로 개명하였다.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유학뿐만 아니라 역법·산술에도 뛰어나 천문 기술 및 과학 발전에 공헌하였다.
태종~세종 시대 활동
김빈(金鑌)은 1411년(태종 11)에 식년시(式年試)에서 13위로 급제해 관직에 진출하였다.[ 『방목(榜目)』] 이후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로 5년간 근무하다가 1416년(태종 16)에 당하관을 대상으로 한 과거인 중시(重試)에 응시하여 을과(乙科) 1등으로 급제하고 인녕부(仁寧府) 승(丞)으로 임명되었다.(『태종실록』 16년 8월 17일)
세종(世宗) 즉위 후 인동현감(仁同縣監)으로 종사하던 김빈은 1425년(세종 7) 변계량(卞季良)의 추천으로 집현전 수찬(修撰)에 제수되어 정인지(鄭麟趾), 설순(偰循) 등과 함께 사기(史記)를 읽고 임금의 고문에 대비하였다.(『세종실록』 7년 11월 29일) 이때부터 김빈은 집현전 교리(校理)와 집현전 직장(直長), 집현전 부제학을 역임하면서 세종에게 예법과 경전 내용을 조언했다.(『세종실록』 11년 4월 12일)
김빈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교리 시절에 세종의 명으로 산법(算法)을 익히면서 본격적으로 산술 및 과학 분야에 매진하였다.(『세종실록』 13년 3월 12일) 2년 후인 1433년(세종 15)에 집현전 응교였던 김빈은 예문관(藝文館)대제학(大提學)정초(鄭招)와 예문관 제학(提學)정인지, 중추원(中樞院)지사(知事)이천(李蕆)등과 함께 혼천의(渾天儀)를 제작하였다.(『세종실록』 15년 8월 11일) 이듬해인 1434년(세종 16)에는 호군(護軍)장영실(蔣英實)이 주도한 물시계 제작에 참여해 그 명(銘)과 서문을 작성했다.(『세종실록』 16년 7월 1일) 나아가 장영실, 주부(注簿)이순지(李純之) 등과 함께 갑인자(甲寅字) 주조에도 참여하였다.(『세종실록』 16년 7월 2일) 또한 산법 지식을 바탕으로『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수록된 일식 주기를 계산하는 임무도 수행하였다.(『세종실록』 16년 8월 11일)
1436년(세종 18) 집현전 직제학(直提學)이 된 그는 임금이 주관하는 과거 시험 책문(策問)에 대독관(對讀官)으로 참여하거나(『세종실록』 18년 4월 9일), 경연에서 세종의 고문에 답하는 등 집현전에서 활동을 이어갔다. 1439년(세종 21)에 집현전 부제학이 되었으며, 2년 후인 1441년(세종 23)에는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임명되었다.(『세종실록』 21년 12월 1일) 더불어 기존 이름인 빈(鑌)이 궁의 여자 하인을 부르는 소리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세종이 새로 내려준 이름인 조(銚)로 개명하였다.(『세종실록』 23년 5월 12일)
이후 김조는 승지로서 세종을 보좌하고 교지를 조정에 전달했다. 그 과정에서 세종이 강행한 불교 행사인 경찬회(慶讚會)에 대한 대간(臺諫)의 반대 상소를 세종에게 전달하지 않아 갈등을 빚기도 했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26일) 그밖에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조서강(趙瑞康),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이승손(李承孫) 등 다른 승지들과 함께 환관의 업무 분담 문제, 왕실 토지인 본궁장리(本宮長利)의 노비 문제 등 궁궐 내 사안들에 대해 세종에게 조언했다. 1443년(세종 25) 승정원 우승지(右承旨)가 된 김조는 임금의 지방 순례 전에 해당 지역 관찰사로부터 물품을 받은 것이 밝혀져,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고 중추원 첨지사(僉知事)로 좌천되었다.(『세종실록』 25년 4월 12일) 이후 4달 만에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에 제수된 김조는 세종에 명에 따라 충청도에 양전(量田)을 실시하고 중앙 조정에 구휼미(救恤米)를 요청하거나,(『세종실록』 26년 4월 24일) 농지를 잃은 농민들에 대한 세금 감면을 요청하는 등 (『세종실록』 26년 윤7월 27일) 지방민 구제에 힘썼다.
1448년(세종 30)에 정조사(正朝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온 동시에 병조 참판(參判)에 제수된 김조는 절제사 파견이나 군대 강무 등 군사 분야에서 주로 활동했다. 같은 해 병조 좌랑(佐郞)윤배(尹培)가 환관 최읍(崔浥)의 부탁을 받아 그의 족형인 김자려(金自麗)를 부당하게 승진시킨 것이 발각되어 다른 병조 관원들과 함께 의금부에서 국문을 받았다.(『세종실록』 30년 12월 24일) 그 와중에 또 다른 무관직 청탁 사건이 드러나 결국 김조의 고신(告身)은 회수되고 외지로 부처(付處)되었다.
문종~단종 시대 활동
1450년(문종 즉위년) 문종(文宗)이 즉위하자 김조는 형조 참판으로 중앙 정계에 복귀했다.(『문종실록』 즉위년 10월 6일) 다음해 중추원 동지사(同知事)였던 김조는 다시 사신단에 속해 명나라에 다녀왔고, 1451년(문종 1)에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임명되었다.(『문종실록』 1년 7월 13일) 일찍이『고려사(高麗史)』편찬에 관여했던 김조는 이 시기에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와 『세종실록(世宗實錄)』과 『문종실록(文宗實錄)』 등의 편찬에도 참여했다.
1452년(단종 즉위년) 단종이 즉위한 후 김조는 인임부(仁臨府尹) 윤(尹)과 춘추관(春秋館)동지사(同知事), 성균관 대사성, 인순부(仁順府) 윤, 호조 참판 등을 역임 했다. 1453년(단종 1) <계유정난(癸酉靖難)> 직후에는 예조 판서에 올랐다.(『단종실록』 1년 10월 11일) 이후 과거 및 비빈(妃嬪) 간택 등을 주관하다가 중추원 지사로 임명된 1455년(단종 3)에 세상을 떠났다. 같은 해 세조(世祖)가 즉위하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봉해졌다.(『세조실록』 1년 12월 27일)
성품과 일화
김조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단정하고 검소하며, 청렴한 성품을 지녔다. 어려서부터 재물에 관심 없이 학문을 추구해 그 수준이 매우 높았고 특히 역법·산술에 밝았다. 또한 효심이 깊어 부모의 묘를 3년 동안 지켰으며, 일찍 죽은 아버지 대신 숙부인 김작(金酢)과 그 아들들을 친아버지와 친동생처럼 대했다. 게다가 요절한 처형 박거선(朴居善)의 여러 딸들을 직접 데려다 키워 시집보냈다.(『세조실록』 1년 10월 11일)
김조는 역법과 산술에 밝아 세종에게 발탁된 후 천문·역법·산술·과학 분야에서 주로 활약했으며, 간의대·혼천의·활자 제작에도 참여했다. 1441년(세종 23)에 승정원 좌부승지로 임명된 후에는 한동안 승지로써 세종을 보좌했다. 이 과정에서 세종의 기분을 고려하여 불교 행사인 경찬회 개최를 반대하는 대간들의 상소를 전달하지 않아 갈등이 빚어졌다. 이때 대간들은“승정원에서 언관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지 않는 것은 임금의 귀와 눈을 가리는 재앙의 시작입니다. 언관의 말을 들을지 또는 듣지 말지 결정하는 건 임금의 마음에 달려있는 것인데, (승정원)에서 막고 가려서 보고하지 않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 입니까?”라고 김조를 비판했다.(『세종실록』 23년 윤11월 26일)
충청도관찰사 시절에도 세종에게 건강을 위해 충청도의 온천에 행차 할 것을 건의하는 등 세종에 대한 충성심이 각별했다. 이와 관련하여 또 다른 일화가 전해지는데, 어느 연회에서 세종이 신하들에게 평소의 소원을 묻자 김조가“신의 소원은 백 년 동안 매일 어탑(御榻)을 모시고 금규화(金葵花) 앞에 머무르거나 물러나며 고개 숙여 엎드려 있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다른 신하들도 김조와 소원이 같다고 답했다고 한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권3「세종조고사본말(世宗祖故事本末)」]
참고문헌
- 『태종실록(太宗實錄)』
- 『세종실록(世宗實錄)』
- 『문종실록(文宗實錄)』
- 『단종실록(端宗實錄)』
- 『세조실록(世祖實錄)』
- 『방목(榜目)』
- 『동문선(東文選)』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