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순부(仁順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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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세종·문종·세조 때 세자를 봉공하기 위해 설치한 관서.

개설

1421년(세종 3)에 세자를 책봉한 후 세자부(世子府)로 인순부를 설치하였다(『세종실록』 3년 12월 4일). 이후 예종의 즉위와 함께 폐지될 때까지 존속하였다.

설립 경위 및 목적

고려시대 이래로 왕이 선위하거나 세자가 책봉되면 부(府)를 설치하여 봉공(奉供)하는 일을 맡겼다. 조선에서는 1421년 10월에 원자(元子) 향(珦)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과거 상왕비인 정종비(定宗妃)를 위해 설치했던 인녕부(仁寧府)를 경순부(慶順府)로 바꾸어 세자부로 삼았다. 경순부는 그 2개월 후에 이때의 인녕부가 인순부로 다시 개칭되면서 설립되었다.

세자와 관련해서는 일반적으로 세자의 학문을 담당한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즉 서연(書筵)과 시위(侍衛)를 담당한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가 설치되었다. 이에 반해 세자부에서는 세자의 일상과 관련된 전령·거마·의복·공궤 등의 일과 함께 이전부터 내려오던 토지·노비 등의 재산까지 관리하였다. 이 때문에 인순부는 세자가 책봉되지 않은 기간에는 왕실 어고로서의 기능을 수행하였다.

조직 및 역할

1421년 인순부가 설치될 때에는 인녕부 때의 관직을 계승하여 종2품 부윤 1직과 종4품 소윤, 정7품 승 2직, 정8품 부승 주부 2직 등이 있었고, 세자와 관련된 지대사와 재산을 관리하였다.

인순부는 기본적으로 세자에 대한 봉공(奉公)이 그 임무였지만, 인수부와 함께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일도 담당하였다. 때문에 인순부 소유의 토지나 노비에게서 전세(田稅)나 신공(身貢)을 거둬들이기도 하고, 이를 가지고 시장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또한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이들에 대한 판비를 담당하거나, 중국에 진헌할 세마포(細麻布)와 면주(綿紬)를 직조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같은 일을 담당하기 위해 선상노비(選上奴婢)가 배치되어 사역하였는데,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에 인순부에 속한 선상노비가 100명에 이르기도 하였다(『세종실록』 8년 11월 5일).

변천

세자로 있던 문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이어 세손이던 홍위(弘暐)가 세자로 책봉되면서 인순부는 계속 세자부로 존속하였다. 그러나 세자가 어린 나이에 단종으로 즉위한 후에는 세자가 책봉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인순부는 혁파되지 않고 왕실의 어고로 계속 존치되었다. 이후 세조가 즉위하고 세자가 책봉되면서 인순부는 다시 세자부로 기능하였다. 그러다가 1465년(세조 11) 말 이후가 되면서 인순부와 관련된 사료는 보이지 않고, 1468년 인순부가 이미 혁파되었음을 말해 주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다(『세조실록』 14년 5월 9일). 이로 미루어 인수부가 혁파되는 1465년에 인순부도 함께 혁파된 것으로 생각된다.

참고문헌

  • 최정환, 『역주 『고려사』 백관지』, 경인문화사, 2006.
  • 한충희, 『조선초기의 정치제도와 정치』, 계명대학교출판부,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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