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주(綿紬)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중등품의 견사로 제직한 평견직물.

개설

꼬임이 있는 견방사로 제직하여 광택이 없고 면포와 같은 물성을 지닌 평견직물이다. 평견직물은 견사의 상태와 밀도 등에 따라 견(絹), 세주(細紬), 초(綃), 주(紬), 토주(吐紬), 면주 등으로 세분된다. 조선시대 면주는 왕실이나 사대부가에서 혼례를 치를 때 절약을 실천하고자 능금(綾衾)이나 채백(綵帛) 대신 사용하였으며, 조선후기까지 철릭[天翼], 도포(道袍), 중치막(中致莫), 창의(氅衣), 배자(褙子) 등에 사용하였다.

연원 및 변천

면주는 사용처에 따라 폭이 달랐는데 진헌(進獻)용은 폭을 넓게 짰으며, 상공(賞貢)용은 폭을 좁게 짰다. 조선의 면주는 질이 좋아 왕실과 사대부가에서 혼례를 치를 때도 사용하였다(『세종실록』 17년 2월 29일). 태조대부터 왕실에서 옹주의 혼례에 채백을 쓰는 것은 검약을 실천하는 길이 아니므로 면주를 사용하였다(『세종실록』 17년 1월 25일).

왕실에서 사용하는 면주 가운데 진상하는 의대는 12승 면주를 사용하였으나, 1457년(세조 3) 이후로는 모두 9승을 사용하도록 하였고, 별궁의 것은 8승을 사용하였다(『세조실록』 3년 2월 11일). 염습할 때에도 사라능단은 사용하지 말고 면주와 면포를 사용하라고 함으로써 사용례가 늘었다(『세조실록』 7년 12월 6일). 이는 조선의 면주가 검소함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사라능단을 대체할 정도로 질이 좋았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면주의 위상은 대마도 태수가 소망하는 대표적인 물건, 즉 면주·면포·백저포·인삼 등의 목록에서도 확인된다(『성종실록』 1년 9월 11일).

면주는 조선후기에 도포·철릭·창의·중치막·배자 등에 사용되었으며, 조선말까지 면주전(綿紬廛)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보편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고종실록』 43년 12월 14일)

용도

이불, 요, 공복(公服) 등을 만드는 데 사용한다.

참고문헌

  • 조효숙·이은진, 「김확묘 출토직물 제직 특성 연구」, 『복식』vol.61 , No.2, 20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