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정(金安鼎)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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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김안정 |
한글표제 | 김안정 |
한자표제 | 金安鼎 |
분야 | 인물 |
유형 | 정치·행정가/관료/문신 |
지역 | 한국 |
시대 | 조선 |
왕대 | 중종 |
집필자 | 이현숙 |
자 | 진경(震卿) |
출신 | 양반 |
성별 | 남자 |
출생 | 1476년(성종 7) |
사망 | 1533년(중종 28) 10월 3일 |
본관 | 연안(延安) |
주거지 | 서울 |
묘소소재지 | 경기도 교하(交河) 파주(坡州)의 선영(先塋) |
증조부 | 김해(金侅) |
조부 | 김우신(金友臣) |
부 | 김흔(金訢) |
모_외조 | 파평 윤씨(坡平尹氏) : 윤지(尹墀)의 딸 |
형제 | (동생)김안세(金安世), 김안로(金安老) |
처_장인 | (첫째 부인)문화 유씨(文化柳氏) : 유계손(柳季孫)의 딸 →무후 (둘째 부인)경주 김씨(慶州金氏) : 김원필(金元弼)의 딸 →(자녀)3남 1녀 |
자녀 | (1자)김피(金彼) (2자)김이(金䄜) (3자)김위(金禕)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김안정(金安鼎)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중종실록』 3년 1월 20일, 『중종실록』 9년 8월 21일, 『중종실록』 10년 3월 17일, 『중종실록』 16년 11월 9일, 『중종실록』 16년 11월 20일, 『중종실록』 17년 3월 6일, 『중종실록』 17년 4월 23일, 『중종실록』 17년 9월 21일, 『중종실록』 17년 11월 2일, 『중종실록』 18년 6월 9일, 『중종실록』 18년 6월 23일, 『중종실록』 19년 5월 3일, 『중종실록』 19년 6월 17일, 『중종실록』 20년 11월 22일, 『중종실록』 24년 3월 8일, 『중종실록』 25년 4월 5일, 『중종실록』 25년 9월 24일, 『중종실록』 27년 3월 9일, 『중종실록』 27년 6월 21일 |
총론
[1476년(성종 7)∼1533년(중종 28) = 58세]. 조선 중기 연산군(燕山君)~중종(中宗) 때의 문신. 도승지(都承旨)와 개성유수(開城留守) 등을 지냈다. 자는 진경(震卿)이다. 본관은 연안(延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공조 참의(參議)김흔(金訢)이고, 어머니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평강현감(平康縣監)윤지(尹墀)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지낸 김우신(金友臣)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내자시(內資寺) 윤(尹)을 지낸 김해(金侅)이다. 영의정김전(金詮)의 조카이자, 이조 정랑(正郞)김안세(金安世)·좌의정김안로(金安老)의 형이다. 중종의 제 1왕녀 효혜공주(孝惠公主)의 시댁 큰아버지기도 하다.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501년(연산군 7) 26세 때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두 동생 김안세·김안로와 함께 3형제가 나란히 사마시 진사과에 합격하였다. 이후 3형제가 여러 번 대과에 실패하다가 1506년(중종 1) 막냇동생 김안로가 먼저 별시(別試) 문과에 장원 급제하고, 김안정은 1509년(중종 4) 34세 때 별시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동생 김안세도 함께 급제하였다.[『방목(榜目)』] 마침 어머니가 경상도 영천(榮川) 농장에 홀로 살고 있었는데, 김안정이 동생 김안세·김안로와 함께 한꺼번에 근친하고 축수연(祝壽宴)을 드리니, 보는 사람들이 이를 부러워하였다. 당시 3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였다고 하여, 그들의 명성이 전국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중종실록』 3년 1월 20일)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는데, 승문원 저작(著作)을 거쳐 승문원 박사(博士)로 승진하였다가, 전생서(典牲暑) 주부(主簿)로 옮겼다.김안정 1514년(중종 9) 홍문관(弘文館)에 선발되어 들어가서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와 춘추관(春秋館)기사관(記事官)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9년 8월 21일) 1515년(중종 10)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으며, 병조 좌랑(佐郞)과 호조 좌랑을 거쳐 강원도도사(江原道都事)로 나갔다.(『중종실록』 10년 3월 17일) 봉상시(奉常寺) 판관(判官)·중추부(中樞府)도사(都事)·예조 정랑 등 여러 벼슬을 지냈는데,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해서 외직(外職)을 자원하여 경상도양산군수(梁山郡守)로 나갔다. 1518년(중종 13) 동생 김안세가 이조 정랑으로 있다가 41세의 나이로 갑자기 죽자, 그 충격으로 어머니도 세상을 떠나면서 3년 동안 막냇동생 김안로와 함께 어머니 무덤에서 시묘살이를 하였다. 1521년 (중종 15) 12월 삼촌인 영의정김전의 도움을 받아 동생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가 중종의 제 1왕녀 효혜공주와 혼인하였다.
1521년(중종 16)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어 지제교와 사관(史官)의 관직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16년 11월 9일) 이어 사헌부 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승진하였고, 다시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중종실록』 16년 11월 20일),(『중종실록』 17년 3월 6일),(『중종실록』 17년 4월 23일) 1522년(중종 17)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으로 승진하였다.(『중종실록』 17년 9월 21일),(『중종실록』 17년 11월 2일) 1523년(중종 18) 사헌부 집의(執義)를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옮겼다.(『중종실록』 18년 6월 9일),(『중종실록』 18년 6월 23일),[『모재집(慕齋集)』 권12 「개성부류수김공신도비명(開城府留守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안정비명」으로 약칭] 1524년(중종 19) 평안도경차관(平安道敬差官)으로 파견되어 압록강 허공교(虛空橋)에서 여진족의 침입을 막지 못한 이함(李菡)·한규(韓珪) 등의 죄상을 추국(推鞫)한 후 유배시켰다.(『중종실록』 19년 5월 3일) 관품을 뛰어넘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품되었고,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 및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는데, 경연청(經筵廳) 참찬관(參贊官)과 춘추관 수찬관(修撰官)을 겸임하였다.(『중종실록』 19년 6월 17일),(『중종실록』 20년 11월 22일)
1525년(중종 20) 호조 참의를 거쳐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는데, 그때 여주 토호의 횡포를 막으려다가 여주 출신 권력자의 미움을 사서 어려움을 겪었다. 1527년(중종 22) 임기가 차자 조정으로 들어와서 병조 참의와 호조 참의를 거쳐, 1529년(중종 24) 승정원 우승지(右承旨) 및 승정원 좌승지(左承旨)로 승진하였다가, 백지(白紙)계본(啓本) 사건에 연루되었다.(『중종실록』 24년 3월 8일) 1530년(중종 25) 특명으로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거쳐 마침내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영전되었다.(『중종실록』 25년 4월 5일) 이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이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으며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중종실록』 25년 9월 24일) 1531년(중종 26) 호조 참판으로 옮겼다가 1532년(중종 27) 중추부 동지사를 거쳐 개성부유수(開城府留守)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겨우 1년 5개월 만인 1533년(중종 28) 10월 3일 개성의 관사(官舍)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나니, 향년 58세였다.(『중종실록』 27년 3월 9일),(『중종실록』 27년 6월 21일),[「김안정비명」]
성품과 일화
김안정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은 질박하고 과묵하며, 행동은 꾸밈이 없고 근엄하였다. 그는 분잡한 것을 싫어하여 관청에서 물러나 집에 돌아오면 반드시 조용한 서실(書室)에 홀로 앉아서 책을 읽었다. 좌우로 서책이 둘러 있는 서실 가운데에 꼿꼿하게 앉아서 밤새도록 책을 읽었을 뿐이고, 집안사람들과 친근하게 접촉하는 일이 드물었다. 다만 어린 종 하나가 방을 깨끗하게 청소하고 향을 피워서, 마치 승려가 거처하는 곳과 같았다. 그러나 정분(情分)이 두터운 벗들이 찾아오면, 반갑게 맞이하여 서로 이야기하면서 즐겁게 술을 마시고 고금의 시문을 논하면서 화락하게 밤을 지새웠다.[「김안정비명」]
벼슬살이할 때에는 스스로 근면하고 청렴하게 처신하고, 정사를 야박하게 처리하지 않으려고 힘썼다. 그가 여주목사로 있을 때 정사를 깨끗하게 베풀고 사건을 너그럽게 처리하였으므로, 아전과 백성들이 그를 좋아하고 존경하였다. 정사를 보는 여가에 반드시 손님에게 예의와 정성을 기울이고 객관(客館)의 음식을 모두 정갈하게 마련하였다. 공사의 구별 없이 찾아오는 손님들을 잘 응대하였을 뿐만 아니라, 지나가는 나그네라고 할지라도 일찍이 소홀하게 대접한 적이 없었다. 정사를 베풀 때에는 비록 온화한 주장을 폈으나, 정도를 벗어날 때에는 법을 집행하는 것이 매우 엄격하였다. 여주 고을에 권력 있는 토호 집안의 종들이 주인의 세도를 믿고서 여주의 사족을 능멸하는 일이 많았는데, 그가 그 종들을 잡아다가 법으로 엄하게 다스렸다가, 여주 토호 출신 권력가의 미움을 사서 중상모략을 당하였다.[「김안정비명」]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파주 교하현(交河縣) 남쪽 후율리(朽栗里)의 선영에 있는데, 김안국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남아있다.
첫째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서흥부사(瑞興府使)유계손(柳季孫)의 딸이고, 둘째 부인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충주판관(忠州判官)김원필(金元弼)의 딸이다. 문화 유씨는 자녀가 없고, 경주 김씨는 3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김피(金彼)·김이(金䄜)·김위(金禕)이다.[「김안정비명」] 김안정의 막냇동생 좌의정김안로가 며느리 효혜공주의 친동생이자 세자이던 인종(仁宗)을 보호하려고, 중종 말년에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대립하다가 패배하여 죽음을 당하는 바람에 김안정의 자손들도 소윤(少尹) 윤원형의 핍박을 당하여 벼슬하지 못하고 큰 어려움을 겪었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모재집(慕齋集)』
- 『악전당집(樂全堂集)』
- 『우복집(愚伏集)』
- 『상촌집(象村集)』
- 『청음집(淸陰集)』
- 『충재집(冲齋集)』
- 『희락당고(希樂堂稿)』