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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회는 그 후에도 경북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 일본 헌병대 공격, 망명 독립운동가들에 군자금 전달, 독립군 희망 청년 만주 군관학교 소개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조직이 탄로나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이병호, 장두환, 임세규, 김경태가 사형당하면서 와해되고 말았지만, 만주로 피신한 황상규, 김대지 등 젊은 단원들이 의열단 창단의 노둣돌을 놓음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 광복회는 그 후에도 경북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 일본 헌병대 공격, 망명 독립운동가들에 군자금 전달, 독립군 희망 청년 만주 군관학교 소개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조직이 탄로나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이병호, 장두환, 임세규, 김경태가 사형당하면서 와해되고 말았지만, 만주로 피신한 황상규, 김대지 등 젊은 단원들이 의열단 창단의 노둣돌을 놓음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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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불교청년회 대구지회는 1920년 6월27일 대구 덕산동에 있는 선종 경북포교당에서 설립됐다.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백석기(白奭基)였다. 그는 포교당이 세워질 때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곳은 임제종 활동 당시 1912년 6월 범어사와 은해사가 함께 세운 포교당이었다. 일제의 사찰령으로 임제종 활동이 중지되자 곧바로 조선 선종 대구포교소로 개칭됐다. 뒤에 경북포교당으로 불렸다. 백석기는 포교당 건립 때 거액의 금액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몇 년간 총무를 맡아 많은 성과를 냈다. 자비를 들여 불교에 관한 환등(幻燈)을 준비해 경북 각지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에서 설행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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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 6월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설립되자 백석기는 곧바로 대구조선불교청년회를 설립하고 지회로 가입했다. 그는 6월27일 선종 경북포교당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와 함께 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부회장 김내명, 총무 이관우, 종교부장 김재규, 교육부장 서병길, 체육부장 곽병학, 서기 차련, 회계 백덕기, 간사 이갑동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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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지회가 제일 먼저 실행한 활동은 보통학교 내 상업 강습소 야학부를 세운 일이었다. 그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1920년 7월15일 강연회를 개최했다. 학생을 모집한 결과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각 은행 지배인을 교원을 두고 열성을 다해 교육한 끝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 1921년 6월1일부터 칠황관(七皇館)에서 근래 희유한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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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지회는 1년마다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임원진을 선출했다. 1921년 6월5일 오후 2시 포교당에서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회장 백련기, 부회장 [[서병룡]], 총무 김재달, 종교부장 [[서병길]], 교육부장 백석기, 체육부장 곽병학 등을 선출했다. 새로운 집행부는 음력 4월8일 경성 정동에 있는 불교중앙포교소 기념식에 참여하며, 대중들을 위해 석가여래 일대기를 연극으로 공연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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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구지회는 1933년 7월 무렵, 명칭을 대구불교청년회로 바뀌었다. 새로운 집행부는 9월12일부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십 일 동안 비누 행상을 하였다. 이익금으로 대구 시내 어려운 가구 400여 호를 방문해 물품을 전달하고, 덕산동 회관에서 백미 반 되씩을 나누어 주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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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년 7월15일에는 재창립 1주년을 기념해 대구 공회당에서 석가모니의 태자 시절 어려움을 표현한 ‘쫓겨 가는 태자’와 어머니의 죄를 자식이 속죄하는 ‘염라국의 심판’ 등 성극대회(聖劇大會)를 개최했다. 1935년 1월 명절이 다가오자 30여 석의 백미를 모아 기한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 ||
2024년 2월 2일 (금) 16:16 기준 최신판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시회를 가장하고 모여 항일비밀결사 창립
군사조직으로서의 성격을 분명히 하기 위해 총대장의 직책명을 단장이 아니라 통령으로 정했다. 통령에는 (스물다섯 이른 나이에 군수까지 지낸) 윤상태가 추대되었다. 조직 내정 후 결성식을 치렀다.
결성 행사는 수천 년 역사의 자랑스러운 나라를 한일병합으로 망하게 만들었다는 부끄러움을 단군 태황조(太皇祖)께 고백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나라를 빼앗긴 충격과, 놈들의 잔인무도한 무단정치에 짓눌려 우리 민족이 강력한 독립운동을 펼치려는 마음조차 제대로 먹지 못하는 이 시기를 돌파하기 위해서는 강인한 결의가 필요하다는 데 합의, 다섯 항에 이르는 맹서에 서약도 했다.
첫째, 우리는 한국의 국권 회복에 앞장선다!
둘째, 매년 정월 15일 단군의 위패 앞에서 목적 수행을 위해 기도한다!
셋째, 단원은 결코 이 결사항일조직을 탈퇴하지 않는다!
넷째, 단원은 비밀을 누설하지 않는다! 만약 이를 위반하는 사람이 있으면 신이 내리는 벌을 받을 것이다!
다섯째, 결사대를 조직해 일제와 친일 반민족 주구들을 살육한다!
창립을 마친 단원들은 각각 큰돈을 내놓아 그것을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로 보냈다. 회원 추가 모집과 모금 활동에도 나섰다. 회원들이 독립운동자금을 내놓는 행동도 훌륭한 일이지만 우리 민족 구성원들 다수가 십시일반 마음과 힘을 보태도록 할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라는 판단에서였다.
창단 반 년 만인 8월 25일에는 경북 영주 풍기광복단 등 다른 여러 단체들과 합세해 "1910년대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친 독립운동단체(제5차 교육과정 고등학교 국정 국사 교과서)" 광복회도 결성했다.
1915년 8월 25일 광복회 결성으로 확대 개편
조선국권회복단은 김재열, 정순영, 이시영, 변상태, 정운일, 홍주일, 황병기, 박상진 등 강성 단원들을 광복회 지도부에 결합시켜 두 갈래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1916년 5월 악명 높은 전라도 친일부호 서도현을 처단하고, 9월 4일 대구 부호 서우순의 집을 습격했다.
광복회는 그 후에도 경북 친일부호 장승원 처단, 일본 헌병대 공격, 망명 독립운동가들에 군자금 전달, 독립군 희망 청년 만주 군관학교 소개 등 많은 활동을 펼쳤다. 광복회는 1918년 1월 조직이 탄로나 박상진, 채기중, 김한종, 이병호, 장두환, 임세규, 김경태가 사형당하면서 와해되고 말았지만, 만주로 피신한 황상규, 김대지 등 젊은 단원들이 의열단 창단의 노둣돌을 놓음으로써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 거대한 자취를 남겼다.
조선불교청년회 대구지회는 1920년 6월27일 대구 덕산동에 있는 선종 경북포교당에서 설립됐다. 설립을 주도한 인물은 백석기(白奭基)였다. 그는 포교당이 세워질 때부터 활발하게 활동했다. 이곳은 임제종 활동 당시 1912년 6월 범어사와 은해사가 함께 세운 포교당이었다. 일제의 사찰령으로 임제종 활동이 중지되자 곧바로 조선 선종 대구포교소로 개칭됐다. 뒤에 경북포교당으로 불렸다. 백석기는 포교당 건립 때 거액의 금액을 출연했을 뿐만 아니라 몇 년간 총무를 맡아 많은 성과를 냈다. 자비를 들여 불교에 관한 환등(幻燈)을 준비해 경북 각지와 조선선종중앙포교당에서 설행해 많은 호응을 얻었다.
1920년 6월 경성에서 조선불교청년회가 설립되자 백석기는 곧바로 대구조선불교청년회를 설립하고 지회로 가입했다. 그는 6월27일 선종 경북포교당에서 개최된 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됐다. 그와 함께 임원으로 선출된 사람은 부회장 김내명, 총무 이관우, 종교부장 김재규, 교육부장 서병길, 체육부장 곽병학, 서기 차련, 회계 백덕기, 간사 이갑동이었다.
대구지회가 제일 먼저 실행한 활동은 보통학교 내 상업 강습소 야학부를 세운 일이었다. 그 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1920년 7월15일 강연회를 개최했다. 학생을 모집한 결과 학생 수가 80여 명에 이르렀다. 각 은행 지배인을 교원을 두고 열성을 다해 교육한 끝에 좋은 결과를 얻었다. 1921년 6월1일부터 칠황관(七皇館)에서 근래 희유한 활동사진을 상영하였다.
대구지회는 1년마다 정기총회를 개최하여 새로운 임원진을 선출했다. 1921년 6월5일 오후 2시 포교당에서 제2회 정기총회를 열고 회장 백련기, 부회장 서병룡, 총무 김재달, 종교부장 서병길, 교육부장 백석기, 체육부장 곽병학 등을 선출했다. 새로운 집행부는 음력 4월8일 경성 정동에 있는 불교중앙포교소 기념식에 참여하며, 대중들을 위해 석가여래 일대기를 연극으로 공연했다.
대구지회는 1933년 7월 무렵, 명칭을 대구불교청년회로 바뀌었다. 새로운 집행부는 9월12일부터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수십 일 동안 비누 행상을 하였다. 이익금으로 대구 시내 어려운 가구 400여 호를 방문해 물품을 전달하고, 덕산동 회관에서 백미 반 되씩을 나누어 주는 봉사활동을 하였다.
1934년 7월15일에는 재창립 1주년을 기념해 대구 공회당에서 석가모니의 태자 시절 어려움을 표현한 ‘쫓겨 가는 태자’와 어머니의 죄를 자식이 속죄하는 ‘염라국의 심판’ 등 성극대회(聖劇大會)를 개최했다. 1935년 1월 명절이 다가오자 30여 석의 백미를 모아 기한으로 힘들어하는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봉사활동을 했다.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목차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증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증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2]]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3]]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4]]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5]]
조선국권회복단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