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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상일]](徐相日)[1886~1962]은 개항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몽운동, 비밀결사, 언론활동, 경제활동, 자치운동, 한국민주당 활동, 제헌국회 의원, 야당통합운동, 진보당과 사회대중당 및 혁신정당 활동 등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다양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 ||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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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제5대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큰 활동을 못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 1960년 제5대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큰 활동을 못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 ||
− | 상훈과 추모 | + | [[서상일]]은 1909년 대구에서 ‘조선인 청년의 교육과 실업의 장려’를 표방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서울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대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3년 대구의 안일암(安逸庵)에서 ‘한일병합’으로 해산되었던 달성친목회를 재건하였으며,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태궁상회(太弓商會)[태궁상점]를 설립하였다. 태궁상회는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대구 지역 연락사무소 역할도 맡았다. 달성친목회 재건 이후 서상일은 상업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형 서상규(徐相奎)를 방문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만주 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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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년 [[서상일]]은 대구권총사건[일명 애국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대구권총사건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포문과 강령 각 10매를 문상직(文相直)으로부터 전달받아 대구 지역에 배포하였으며, 독립의군부의 자금 모집원으로 파견된 대구 출신 정운해(鄭雲海)를 통영의 부호 [[서상호(통영)|서상호]](徐相灝)에게 연결하여 주었다. 이 때문에 [[서상일]]은 내란죄로 투옥되었고, 1920년 초에 석방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 유학 중이던 동생 [[서상한]]이 영친왕 이은(李垠)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서상일]]은 동생의 재판을 돕기 위하여 일본 도쿄[東京]에 한동안 머물렀다. 1921년부터 [[서상일]]은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와 조선인산업대회 위원을 지냈고, 1922년 대구운송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서병조]]·[[서창규]] 등과 함께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를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서상일]]은 1920년 대구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는데, 1922년 7월 대구청년회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대구 지역 정치세력의 활동 공간 역할을 한 조양회관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3년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敎)[현 대륜중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7월 무렵에는 대구구락부 결성을 주도하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1925년에는 정운해·[[서만달]] 등과 함께 농촌 개량과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대구농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1927년 11월에는 일본인 중심의 대구상업회의소에 맞서 한국인 중소 상공업자의 발달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구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1937년 부동산 매매 및 알선을 주업으로 하는 경북상공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었고, 1942년에는 경상북도양곡주식회사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서상일]]은 전시체제기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을 지내며 친일단체와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서상일]]은 경북 지역 우익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경북치안유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얼마 후 경북치안유지회는 좌익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8인의 총무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미군정청 경제고문·비상국민회의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대구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장 겸 산업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 6월 이승만 저격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구형받았다. [[서상일]]은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 반대와 야당 통합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때 [[서상일]]은 민주대동파에 가담하여 조봉암의 야당 통합운동 참여를 찬성하였고, 1955년 9월 1일 진보당(가칭)추진위원회가 구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에 선임되었다. [[서상일]]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이후 진보당과 결별하고, 1957년 10월 15일 민주혁신당을 결성하여 간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4·19혁명 이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10월 민주혁신당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사회당을 결성하였으며, 1961년 1월 비진보당 계열과 연합하여 사회민주주의 우파를 표방한 통일사회당을 결성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통일사회당은 7·29선거 이후 진보당계의 사회대중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맞서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을 구성하고, ‘선 영세중립화 후 남북협상’이라는 남북통일 방안을 내놓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서상일]]은 이른바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서상일]]은 1962년 2월 14일에 열린 결심 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4월 1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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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저술 및 작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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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상일은 1931년 자치운동을 정당화한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을 작성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만이 약소민족인 조선족이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1951년에는 『현하의 국난타개책』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1921년 「조선청년회의 이상과 사업」, 1957년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이 길」, 1959년 「헌정 11년」 등의 여러 논설을 남겼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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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묘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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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상일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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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훈과 추모] | ||
− |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 + |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일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
== 가족 == | == 가족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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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서씨 [[서한(고려)|서한]]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jha5bGTbwHk]] | 대구서씨 [[서한(고려)|서한]]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jha5bGTbwHk]] | ||
연산서씨시조 [[서준영(고려)|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uEEKPu0-mBI]] | 연산서씨시조 [[서준영(고려)|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https://www.youtube.com/watch?v=uEEKPu0-mBI]]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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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북한산 순국선열ㆍ애국지사 묘역]] == | ||
== [[조선국권회복단]] == | == [[조선국권회복단]]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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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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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민족일보]] == | ||
+ |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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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구 3·8만세운동]] == | ||
+ | 3·8만세 운동은 '박상진·윤상태·[[서상일]] 등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을 펼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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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 | ||
+ |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응창 선생과 [[서상일]] 선생이 설립한 70년 전통의 사학으로, ‘진실’이라는 교훈 아래 바른 마음 참된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달서지역 명문 여자학교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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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조양회관]] == | ||
+ | 조양회관은 1992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주도로 세워진 교육회관으로, 대구 민중계몽운동 진원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 ||
+ | 현재는 대구 지역 광복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으며, 항일독립운동 전시실이 조성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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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 == | ||
+ |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2길 94 (효목동)에 있는 공원이다. 정확히는 화랑로를 두고 북쪽은 동구 효목동, 자전거경기장 등이 있는 남쪽은 수성구 만촌동 관할에 속해 있다.원래 이름은 망우공원이었으나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으로 개칭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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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서상일묘]] == | ||
+ | 서울 강북구 수유리는 애국지사와 민주열사 등의 묘역이 많다. 4.19국립 민주묘역은 물론 후손이 없는 17위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 애국선열 묘역 등도 조성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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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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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동청년당]] == | ||
+ |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조직. | ||
+ | 대동청년당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계통의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등에 의해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다 | ||
== 서씨 분파 == | == 서씨 분파 == |
2024년 8월 16일 (금) 20:52 기준 최신판
서상일(徐相日)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9공사사건과 관련된 독립운동가. 정치인.
개설
본관은 달성 서씨(達城). 호는 동암(東菴). 대구 출신. 서봉기(徐鳳基)의 아들로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서상일(徐相日)[1886~1962]은 개항기부터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계몽운동, 비밀결사, 언론활동, 경제활동, 자치운동, 한국민주당 활동, 제헌국회 의원, 야당통합운동, 진보당과 사회대중당 및 혁신정당 활동 등 독립운동가이자 정치인으로 다양한 행적을 남긴 인물이다.
1909년 안희제(安熙濟)·김동삼(金東三)·윤병호(尹炳浩)·남형우(南亨祐)·박중화(朴重華)·배천택(裵天澤) 등 80여 명의 동지들과 국권회복을 위한 비밀청년단체로서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조직, 지하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를 병탄하자 ‘9인결사대’를 조직, 민족의 강경한 반일의지를 담은 선언문을 서울에 있던 각국 공사에게 돌린 뒤 전원이 할복자살을 계획했던 세칭 ‘9공사사건’을 일으켰다.
1913년 대구에서 박상진(朴尙鎭) 등과 함께 광복단(光復團)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집사업을 했으며,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 중앙총부에서 활동하였다. 1919년 대구에서 3·1운동에 참가했으며, 1920년 3월 만주에서 무기를 반입해 일제 관서를 습격할 계획을 세우다가 일본 경찰에 붙잡혀 투옥되었다.
1921년 8월 미국에서 열리는 태평양회의에 동지들과 함께 독립청원서를 보내고 이 청원서에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4년『농림(農林)』 과 『민중운동(衆運動)』 이란 잡지를 발행하고, 흑우회(黑友會) 계통의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45년 광복 후 송진우(宋鎭禹)·장덕수(張德秀) 등과 한국민주당(韓國民主黨)을 창립하여 총무로 선임되었고, 국민대회준비위원회 부위원장의 직책을 맡기도 하였다. 1946년 비상국민회의 의원에 취임하였고, 1947년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度立法議院)의 민선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48년 제헌국회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어 헌법기초위원으로 활약했으며, 제헌국회 말기에는 내각책임제 개헌을 발기하여 최초의 개헌안을 제출하였다. 1950년대는 사회민주주의 정당 활동을 벌여, 1956년진보당(進步黨) 창당에 참가해 간부로 활동하고, 1960년사회대중당(社會大衆黨)을 창당해 대표총무위원에 취임하였다.
1960년 제5대민의원으로 당선되었으나 신병으로 큰 활동을 못하였다. 1961년 사회대중당이 분열되자 재야 혁신세력을 정비, 결집하여 통일대중당(統一大衆黨)을 발기하였으나 5·16으로 무산되었다.
서상일은 1909년 대구에서 ‘조선인 청년의 교육과 실업의 장려’를 표방한 달성친목회(達城親睦會)와 서울의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대구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 결성에 참여하였다. 1913년 대구의 안일암(安逸庵)에서 ‘한일병합’으로 해산되었던 달성친목회를 재건하였으며, 강유원간친회(講遊園懇親會)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나섰다. 1914년 독립운동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할 목적으로 태궁상회(太弓商會)[태궁상점]를 설립하였다. 태궁상회는 안희제(安熙濟)가 경영하던 백산상회(白山商會)의 대구 지역 연락사무소 역할도 맡았다. 달성친목회 재건 이후 서상일은 상업 시찰을 명목으로 러시아령 니콜리스크우수리스키에서 독립운동을 벌이고 있던 형 서상규(徐相奎)를 방문하였으며, 블라디보스토크와 중국 만주 지역을 돌아보고 귀국하였다.
1916년 서상일은 대구권총사건[일명 애국단사건]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다. 대구권총사건은 지역의 뜻있는 인사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1919년 4월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선포문과 강령 각 10매를 문상직(文相直)으로부터 전달받아 대구 지역에 배포하였으며, 독립의군부의 자금 모집원으로 파견된 대구 출신 정운해(鄭雲海)를 통영의 부호 서상호(徐相灝)에게 연결하여 주었다. 이 때문에 서상일은 내란죄로 투옥되었고, 1920년 초에 석방되었다. 이 무렵 일본에 유학 중이던 동생 서상한이 영친왕 이은(李垠)의 결혼식장에 폭탄을 투척하기로 계획을 세웠다가 검거되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서상일은 동생의 재판을 돕기 위하여 일본 도쿄[東京]에 한동안 머물렀다. 1921년부터 서상일은 본격적인 경제활동을 시작하였다. 1921년 대구곡물신탁주식회사 이사와 조선인산업대회 위원을 지냈고, 1922년 대구운송주식회사 설립에 참여하고 감사가 되었다. 1924년에는 서병조·서창규 등과 함께 조양무진회사(朝陽無盡會社)를 설립하였다. 이에 앞서 서상일은 1920년 대구청년회 결성에 참여하였는데, 1922년 7월 대구청년회 임시총회에서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21년에는 대구 지역 정치세력의 활동 공간 역할을 한 조양회관의 설립을 주도하였다. 1923년 사립 교남학교(嶠南學敎)[현 대륜중고등학교] 설립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7월 무렵에는 대구구락부 결성을 주도하고 동아일보 대구지국을 운영하였다. 1925년에는 정운해·서만달 등과 함께 농촌 개량과 발달을 목적으로 하는 대구농촌사를 설립하였다. 이어 1927년 11월에는 일본인 중심의 대구상업회의소에 맞서 한국인 중소 상공업자의 발달을 도모할 목적으로 대구상공협회를 설립하였다. 1937년 부동산 매매 및 알선을 주업으로 하는 경북상공주식회사의 이사가 되었고, 1942년에는 경상북도양곡주식회사의 이사로 활동하였다. 서상일은 전시체제기 조선임전보국단의 평의원을 지내며 친일단체와 관련을 맺기도 하였다. 광복 직후인 1945년 8월 17일 서상일은 경북 지역 우익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경북치안유지회 결성을 주도하고 대표로 선출되었다. 얼마 후 경북치안유지회는 좌익의 건국준비위원회 경북지부와 통합하여 건국준비경북치안유지회로 바뀌었다. 이후 한국민주당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8인의 총무 중 한 사람으로 선출되었다. 그 뒤 미군정청 경제고문·비상국민회의 의원·남조선과도입법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48년 5월 10일 대구 을구에서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제헌국회에서 헌법기초위원장 겸 산업분과위원장으로 활동하였다. 1950년 5월 30일 치러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대구 을구에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고, 1952년 6월 이승만 저격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6년형을 구형받았다. 서상일은 1954년 호헌동지회에 참여하여 이승만 독재 반대와 야당 통합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때 서상일은 민주대동파에 가담하여 조봉암의 야당 통합운동 참여를 찬성하였고, 1955년 9월 1일 진보당(가칭)추진위원회가 구성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총무에 선임되었다. 서상일은 제3대 정부통령 선거 이후 진보당과 결별하고, 1957년 10월 15일 민주혁신당을 결성하여 간사장으로 활동하였고, 1960년 4·19혁명 이후에 치러진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 사회대중당 후보로 대구 을구에 출마하여 민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60년 10월 민주혁신당 세력을 중심으로 독립사회당을 결성하였으며, 1961년 1월 비진보당 계열과 연합하여 사회민주주의 우파를 표방한 통일사회당을 결성하고 정치위원이 되었다. 통일사회당은 7·29선거 이후 진보당계의 사회대중당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에 맞서 중립화조국통일총연맹을 구성하고, ‘선 영세중립화 후 남북협상’이라는 남북통일 방안을 내놓았다. 1961년 5·16군사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서상일은 이른바 ‘중앙통일사회당사건’으로 군사혁명재판소에 기소되었다. 서상일은 1962년 2월 14일에 열린 결심 공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언도받았으나, 4월 18일 지병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서상일은 1931년 자치운동을 정당화한 「합법운동과 비합법운동에 관한 사견」을 작성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만이 약소민족인 조선족이 나아갈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1951년에는 『현하의 국난타개책』을 저술하였다. 그 외에도 1921년 「조선청년회의 이상과 사업」, 1957년 「험난할망정 영광스런 이 길」, 1959년 「헌정 11년」 등의 여러 논설을 남겼다.
[묘소]
서상일의 묘소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애국선열·광복군 합동묘역에 있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서상일의 공적을 기려 1963년 대통령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가족
시조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부총리)
2세 서필(徐弼 내의령(內議省).종 1품.국무총리)
3세 서희(徐熙 내사령(內史令).종 1품.국무총리)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
이천서씨는 서신일(徐神逸)(아간대부 정2품)- 서필(徐弼)(내의령 종1품) 서봉(徐逢)(광평시랑평장사 정2품) - 서희(徐熙)(내사령 종1품) - 서눌(徐訥)(문하시중 종1품) 서유걸(徐維傑)(좌복야 정2품) 서유위(徐維偉)(장야서령 정3품)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서정(徐靖)(판삼사사 종1품) 서존(徐存)(병부상서 정3품)-서균(徐鈞)(우복야 정2품) 서린(徐嶙)(판대부사 정2품) 서석(徐碩)(시랑평장사 정2품)-서원(徐元)(평장사 정2품) 서공(徐恭)(판삼사사 종1품) 서순(徐淳(徐諄)(동지추밀원사 종2품) 서성(徐成)(평장사 정2품) 서염(徐廉)(사복부령 종2품)에 걸쳐 칠대(7 대) 동안 연속 재상직에 임명된 고려 최고 문벌 귀족 가문이다.
무신란 이후에도 이부판사 서신(徐愼 종1품),봉성군 서약진(徐若珍),좌복야 서효리 (徐孝理 정2품),밀직사사 서무질(徐無疾 종2품),중추원사 서숭조(徐崇祖 종2품),판도판서 서진(徐晉 정3품),승지 서욱(徐勖), 부령 서익(徐翼),문하찬성사 서기준(徐奇俊 종2품),정당문학 서희팔(徐希八 정2품),판내시부사 서춘(徐椿 종2품), 문하시중 서릉(徐稜 종1품),대광내의령 서린(徐鱗 종1품), 판도판서 서적(徐迪), 문하시중 서원경(徐元敬 종1품),문하찬성사 서영(徐穎 종2품),동지밀직사사 서신계(徐臣桂 종2품),승지 서녕(徐寧), 판밀직사 서념(徐恬 종2품),판내부사사 서진(徐璡 종2품) 평장사 서충(徐忠 정2품) 평장사 서윤(徐玧 정2품), 판사재사 서효손(徐孝孫 종2품),진현관대제학 서성윤(徐成允 정2품),밀직사 서원(徐遠 종2품), 추밀원사 서후상(徐後祥 종2품), 평장사 서희찬(徐希贊 정2품),밀직사 서영계(徐永桂 종2품), 밀직사 서천량(徐天亮 종2품), 봉익대부 서윤현(徐允顯 종2품),정당문학 서균형(徐鈞衡 종2품),평장사 서인한(徐仁漢 정2품) ,문하시중 서신(徐信 종1품),병부령 서수(徐秀 정2품) ,예빈사 소윤 서첨(徐詹),병부낭중 서저(徐氐), 판도좌랑 서평(徐坪), 예빈소경 서광(徐珖), 감찰어사 서의(徐義),계성군 서원기(徐原奇) 주부 서면(徐冕), 소감 서정(徐程),사인 서단(徐亶),병부시랑 서장기(徐長己),주부 서경의(徐聲宜),소감 서화흡(徐化洽),축하사절 서조(徐助),예빈시윤 서추(徐諏), 어사중승 서염(徐琰), 집의 서연(徐延),내의시랑 서희적(徐希積),병부상서 서희량(徐希亮 정3품),승지 서령(徐領),생원 서영보(徐永甫),중정대부 서선(徐瑄), 만호 서혼(徐琿),소감 서황(徐晃),통직랑 서중린(徐仲麟),별가 서윤공(徐允公),호조전서 서의(徐議 정3품), 병부시랑 서의(徐誼), 병부시랑 서간(徐諫),소감 서시의(徐時義),판전객시사 서익진(徐益進),감무 서천부(徐天富),태관서령 서공기(徐公騏),전공총랑 서능준(徐能(陵)俊),판내부시사 서정수(徐貞壽),요동진무사 서현(徐顯),사마 서관(徐寬) ,판도찬중 서원절(徐元節),비인현사 서유(徐愈), 성균관진사 서문찬(徐文贊) 주부동정 서무(徐茂),봉례공 서박(徐樸),연산공 서직(徐稷), 전서 서의(徐義 정3품),봉정대부 서호덕(徐好德) 등 15대 대대로 많은 재상을 배출하였다.
상장군 서보(徐甫 상서우복야.정2품),서유(徐裕),서균한(徐均漢),서민경(徐敏敬),서찬(徐贊),서돈경(徐敦敬),서정희(徐廷希),서홍찬(徐洪贊),서인조(徐仁朝),상호군 서응려(徐應呂),대장군 서후(徐厚),서희(徐曦),서준(徐俊),대호군 서찬(徐贊),장군 서지(徐趾),서칭(徐贊),서정(徐挺),서광순(徐光純),서금광(徐金光) ,중낭장 서긍(徐肯),서찬(徐贊),서정(徐靖),서오(徐敖),시중랑 서문한(徐文漢),호장 서필중(徐必中),서전금(徐田金),서순인(徐純仁),서복(徐福),서자번(徐自蕃) 등이 이름을 드높였다.
대학자로 서시랑도 서석(徐碩 정2품),박사 서선(徐禪),삼국사기 서안정(徐安貞),국성전교수 서인(徐諲),고려화가 서구방(徐九方),고려음악가 승지 서온(徐溫),고려국사 원묘국사 요세(了世),고려대사 서영관, 고려 효자 서식(徐湜),고려 혁명가 서언(徐彦),낭장 서준명(徐俊明),교위 서유정(徐惟挺),서규(徐規)가 화려한 명맥을 유지했다.
고려 황제국 충신으로 사재승 서숭(徐崧),서대창(徐大昌),서필중(徐必重),진봉사 서방(徐昉),위위경지 태사국사 서웅(徐雄),합문통사사인 서연(徐延),예빈시윤 서찬(徐瓚),사복부령 서염(徐廉),정치도감 좌랑 서호(徐浩),항적 서효관(徐孝寬),내수 서양수(徐良守), 기거사인 서언 (徐彦),생원 서복례(徐復禮),공조전서 서보(徐輔), 직제학 서중보(徐仲輔), 중생원 서희준(徐希俊), 사재감정 서광준(徐光俊),통훈대부 서운(徐暈), 장령 서견(徐甄)은 조선이 건국된 뒤에도 충절을 지켜 끝내 벼슬에 오르지 않아 시흥의 충현서원(忠賢書院)에 제향됐다.
대구달성 서씨(달성 서씨 대구 서씨)(大丘達城徐氏)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주행(徐周行 달성군)-서한(徐閈 군기소윤 종3품.차관)-서신(徐愼 이부판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무질(徐無疾 밀직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진(徐晉 판도판서 정3품.장관)-서기준(徐奇俊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영(徐穎 문하시중찬성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균형(徐鈞衡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 서익진(徐益進 판전객시사 종2품.부총리 재상)-서침(徐沈 조봉대부 정3품.장관) 서의(徐義 호조전서 정3품.장관) 이다
연산 서씨 계보는 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직(徐稷 연성군)-서준영(徐俊英 연성군)- 서보(徐寶 연성군(連城君) 으로 이어진다.
부여 서씨 계보는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춘(徐椿 판내부사사 정2품.부총리 재상) 서박(徐樸 봉례공) 으로 이어진다.
남양당성 서씨 (남양 서씨 당성 서씨) 계보는 서간(徐趕 태사.남양군. 종1품. 국무총리 재상)-서신일(徐神逸 아간대부 정2품.부총리 재상)-서필(徐弼 내의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희(徐熙 내사령 종1품.국무총리 재상)-서유걸(徐惟傑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존(徐存 병부상서 정3품. 장관)-서청습(徐淸習 판전의시사 정2품.부총리 재상)-서효리(徐孝理 좌복야 정2품.부총리 재상)-서찬(徐贊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희팔(徐希八 정당문학 종2품.부총리 재상)-서적(徐迪남양군)으로 이어진다.
중화 서씨(中華徐氏) 계보는 단군조선 여수기(余守己)-번한조선(番韓朝鮮) 서우여(徐于餘)-고조선(古朝鮮) 소호(少昊), 고도(皋陶), 백익(伯益)의 아들 약목(若木)-서국(徐國)에 30세 서구왕(駒王=徐駒王), 32세 서언왕(徐偃王)-진나라 재상 서복(徐福)-삼국시대(三國時代) 서선(徐宣),서유자(徐孺子; 徐穉) 서서(徐庶), 오(吳) 나라에는 서성(徐盛),부여 동명왕(東明王),백제 온조왕(溫祚王)근초고왕(近肖古王)무령왕(武寧王)-의자왕(義慈王)부여융(扶餘隆),신라 서두라(徐豆羅)- 남송(南宋) 서희(徐煕), 서도(徐道), 서도(徐度), 서숙향(徐叔嚮), 서중융(徐仲融), 서문백(徐文伯), 서사백(徐嗣伯)- 북제(北齊) 서지재(徐之才), 서임경(徐林卿), 서동경(徐同卿)- 원위(元魏) 서건(徐謇), 서웅(徐雄)- 수 나라 서민제(徐敏齊) -원나라 말기 호족 서수휘(徐壽輝)청나라- 지리학자 서하객(徐震客),대학자 서광계(徐光啓)
가족
시조: 서신일 (徐神逸 아간공. 종1품)
- 고고고조할아버지: 서필(徐弼)(종1품 내의령)
- 고고고조할머니 : 평양 황씨(平壤黃氏)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조할아버지: 서눌(徐訥)(종1품 문하시중)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걸(徐惟傑)(정2품 좌복야)
- 큰고조할아버지 : 서유위(徐惟偉)(정3품 장야서령)
- 고조할아버지: 서주행(徐周行)(달성군)
- 증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할아버지: 서신(徐愼 정2품 이부판사)
- 증조할아버지: 서한(徐閈 정4품 군기소윤)
- 고고조할아버지 : 서희(徐熙)(종1품 내사령)
- 큰고고고조할아버지 : 서목(徐穆)(종1품 문하시중.이천백)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에서 거행된다.
서씨일가연합회(徐氏一家聯合會) 서용관 회장 서씨 시조 서신일 묘소 참배 [[2]]
달성서씨 서진 시조묘소 참배 [[3]]
대구서씨 서한 시조묘소 참배 [[4]]
연산서씨시조 서준영 시조묘소 참배 [[5]]
북한산 순국선열ㆍ애국지사 묘역
조선국권회복단
1915년 2월 28일 윤상태, 서상일, 이시영, 신상태, 남형우, 김재열, 홍주일, 박영모, 이영국, 김규, 정순영, 서병룡, 황병기 등 13인의 대구 청년들이 안일암에서 회동을 가졌다. 그들은 일제의 감시 눈초리를 피하기 위해 시회(詩會)를 가장해 모였다.
당연히 시를 짓는 사람은 있을 리 없었다. 그들은 오랜 회의 끝에 부서별 책임자를 정했다. 외교부장 서상일, 교통부장 이시영과 박영모, 기밀부장 홍주일, 문서부장 이영국과 서병룡, 권유부장 김규, 유세부장 정순영, 결사부장 황병기가 선임되었다.
민족일보
4월혁명을 맞아 귀국한 조용수는 사회대중당으로 경북 청송에서 7·29총선에 입후보했으나 낙선하고, 서상일·윤길중·고정훈·김달호·이동화·송지영·이종률·안신규 등 혁신계 및 진보적 인사들과 61년 2월 13일 <민족일보>를 창간했다. 신문은 4대 사시를 내걸었다.
대구 3·8만세운동
3·8만세 운동은 '박상진·윤상태·서상일 등이 중심이 돼 독립운동을 펼쳤다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
대구 원화여자고등학교는 독립운동가 이응창 선생과 서상일 선생이 설립한 70년 전통의 사학으로, ‘진실’이라는 교훈 아래 바른 마음 참된 교육을 실천하고 있는 달서지역 명문 여자학교다.
조양회관
조양회관은 1992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서상일 선생의 주도로 세워진 교육회관으로, 대구 민중계몽운동 진원지 역할을 해왔던 곳이다. 현재는 대구 지역 광복회 사무실이 들어서 있으며, 항일독립운동 전시실이 조성돼 지역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
대구광역시 동구 효동로2길 94 (효목동)에 있는 공원이다. 정확히는 화랑로를 두고 북쪽은 동구 효목동, 자전거경기장 등이 있는 남쪽은 수성구 만촌동 관할에 속해 있다.원래 이름은 망우공원이었으나 망우당공원(忘憂堂公園)으로 개칭하였다.
서상일묘
서울 강북구 수유리는 애국지사와 민주열사 등의 묘역이 많다. 4.19국립 민주묘역은 물론 후손이 없는 17위 무후 광복군 합동묘역, 애국선열 묘역 등도 조성돼 있다.
북한산 백련사 쪽으로 향하면 심산 김창숙 선생, 동암 서상일 선생, 현곡 양일동 선생, 상산 김도연 선생, 강재 신숙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또한 아카데미하우스 쪽으로 향하면 이시영 선생과 인근에 무후 광복군 합동 묘역, 김병로 선생, 이준 열사, 신익희·신하균 선생 등의 묘역이 있다. 통일교육원 내에는 이명룡 선생의 묘역이 있다. 그래서인지 이곳 북한산 둘레길을 중심으로 독립운동가 묘역 순례길이 조성돼 있다. 묘역을 가르키는 표지판도 잘 돼 있다.
대동청년당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조직되어 만주까지 확대된 항일 비밀결사조직. 대동청년당은 1909년 10월 경상남도 동래에서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 계통의 안희제(安熙濟), 서상일(徐相日), 남형우(南亨祐) 등에 의해 조직된 항일 비밀결사조직이었다
서씨 분파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 서상공(徐相公)이 대구 서씨 보(大丘 徐氏 譜 – 1702년간) 서문에 이르기를 서씨(徐氏)는 애당초 두 관적(貫籍)이 없었는데 뒤에 8파로 나뉘었으니 이천(利川) 달성(達城) 대구(大丘) 장성(長城) 연산(連山) 남평(南平) 부여(扶餘) 평당(平當) 남양(南陽) 당성(唐城)이 이것이다. 그 분파된 이유인즉 문헌에 증거가 없어 알 수는 없으나 대개 이천(利川)의 선조는 아간공(阿干公) 서신일(徐神逸)이요. 대구(大丘)의 선조는 서한(徐閈)이요. 달성(達城)의 선조는 서진(徐晋)이요. 장성(長城)의 선조는 서능(徐稜 문하시중.종1품)이요. 연산(連山)의 선조는 서보(徐寶 연성군)요. 남평(南平)의 선조는 서린(徐鱗 대광내의령.종1품)이요. 부여(扶餘)의 선조는 서수손(徐秀孫)이요. 평당(平當)의 선조는 서준방(徐俊邦 형부상서.정3품)이요. 남양 서씨(南陽 徐氏)의 선조는 서간(徐趕)이요. 당성 서씨(唐城 徐氏)의 선조는 서득부(徐得富)이니 계파를 따져 보면 모든 서씨(徐氏)가 다 이천(利川)에서 나왔고 나머지 7관(七貫)은 곧 이천(利川)의 별파라 했다. 또 의성(義城) 김씨(金氏)의 족보를 보니 서씨(徐氏)의 선조(先祖)는 기자(箕子)로부터 나왔고 신라말년(新羅末年)의 서신일(徐神逸)이 있었고 고려초에 서목(徐穆)이 있었으니 이천서씨(利川徐氏)는 그 후손이요. 대구(大丘),봉성(峯城),남양(南陽),당성(唐城)이 이천에서 다 같이 나뉘었으니 서신일(徐神逸)의 후손이라 한다. 동국의 서씨(徐氏)는 모두 아간(阿干)을 선조로 함에 의심이 없고 또 몽어(夢漁) 서문중(徐文重)의 박식원견으로 반드시 고증을 거쳐서 그 족보 끝에 썼을 것으로 생각되어 우리 서씨(徐氏)가 타족(他族)과 다른 점이다.
1742년 이천 서씨(利川徐氏) 문중에서 간행된 족보인 《임술보》(壬戌譜) 서문에는 “무릇 나뭇가지가 천이라도 뿌리는 하나요, 물 갈래가 백이라도 근원은 하나이니 우리나라에 달성(達城), 대구(大丘), 부여(扶餘), 평당(平當), 장성(長城), 연안(延安), 전주(全州), 남평(南平), 남양(南陽), 당성(唐城)의 서씨(徐氏)중에 누가 아간공(阿干公)을 조상으로 해서 나뉜 자가 아니랴. 아간(阿干)공의 줄거리는 이천(利川)이다”라고 쓰여 있어, 부여 서씨(扶餘徐氏)가 이천서씨(利川徐氏)의 한 갈래임을 밝히고 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의 족보 「계미보癸未譜(1763년)」 서문에 보면, 우리나라 서씨(徐氏)는 3관(貫)이 저명한데, 이천조(利川祖)는 아간(阿干) 서신일(徐神逸)이고 부여조(扶餘祖)는 백제의 온조왕(溫祚)이며, 달성조(達成祖)는 소윤(少尹) 서한(徐閈)이라고 했다. 이천 서씨(利川徐氏), 달성 서씨(達城徐氏), 부여 서씨(扶餘徐氏)는 아간대부 서신일(阿干大夫 徐神逸)의 후손이라고 참찬(參贊)을 지낸 달성인 서명응(達城人 徐命膺)이 썼다.
효양산 전설문화축제(孝養山 傳說文化祝祭)
장위공 서희(徐熙) 선생을 되새겨 볼 수 있고, 서신일(徐神逸)선생의 은혜 갚은 사슴과 황금송아지 전설이 있는 효양산의 주요 6개소(물명당, 효양정, 금송아지상, 은선사, 서씨(徐氏)시조 서신일(徐神逸)묘, 금광굴)를 탐방하며, 효양산의 청취를 만끽할 수 있다. 서희문화제(徐熙文化祭)로 명칭 변경
이섭대천(利涉大川)
창전동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세워져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하면서 후백제와 마지막 일전을 치르기 위해 출정길에 올랐다가 장마로 물이 불어난 복하천(福河川)을 건너지 못해 곤경에 빠졌을 때 '서목(徐穆)'이라는 이천 사람의 도움으로 무사히 복하천을 건너 후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그 후 왕건이 서목(徐穆)의 도움에 대한 보답으로 '이섭대천'이라는 고사에서 따다가 이 지역에 ‘이천(利川)’이라는 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이천의 유래에 관한 이 일화를 기념하기 위해 1989년 11월 이천 지역 토박이 원로들의 모임인 이원회(利元會)가 중심이 되어 이천시민회관 구내에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2단으로 된 방형의 대좌 위에 길고 커다란 자연석 형태의 흑요암을 올려놓았으며 흑요암 중앙에 '利涉大川(이섭대천)'이라는 글씨를 커다랗게 새겨 넣었다.
서씨 시조 서신일 추향대제(徐氏 始祖 徐神逸 秋享大祭)
모든 서씨 시조 서신일(徐神逸)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전 11시에 효양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산19(경기 이천시 부발읍 산촌리 329)에서 거행된다. 서필 (徐弼)선생,서희 (徐熙)선생 시제는 (음력) 매년 10월 첫째 토요일 오후 2시에 경기 여주시 산북면 후리 166-1에서 거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