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광경(鄭廣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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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86년(선조 19)∼1644년(인조 22) = 59세]. 조선 중기 광해군(光海君)~인조(仁祖) 때의 문신. 이조 참판과 예조 참판 등을 지냈다. 자는 공직(公直)이고, 호는 추천(秋川)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좌의정(左議政)정창연(鄭昌衍)이고, 어머니 청주 한씨(淸州韓氏)는 별좌(別坐)한세원(韓世遠)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좌의정을 역임한 정유길(鄭惟吉)이고, 증조할아버지는 영의정에 추증된 정복겸(鄭福謙)이다. 형조 판서(判書)정광성(鄭廣成)의 동생이자, 광해군의 왕비인 문성군부인(文成郡夫人)의 외사촌이기도 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12년(광해군 4) 사마시(司馬試)에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고, 그해에 증광(增廣) 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27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의 권지(權知)부정자(副正字)에 보임되었으며,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과 홍문관(弘文館)저작(著作)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로 전임(轉任)되었다가, 홍문관 정자(正字)가 되었다.[『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광해군 4년 12월 21일,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1613년(광해군 5) 성균관 박사(博士)를 거쳐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고, 이어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으로 승진하였으며,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전임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3월 4일, 광해군 5년 3월 27일, 광해군 5년 6월 4일]

이때 대북파(大北派)의 이이첨(李爾瞻)이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명인 박응서(朴應犀)으로 하여금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옹립하려 하였다고 거짓으로 자백하게 하면서, <계축옥사(癸丑獄事)>를 일으켰다. 강변칠우는 서인(西人)의 서자 7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세상을 원망하며 술을 마시거나 시를 짓다가, 조령(鳥領)에서 은상인(銀商人)을 죽이고 은(銀) 6, 7백 냥을 훔치는 바람에 체포되었다. 그러자 이이첨은 이들을 협박하여 훔친 은이 영창대군 옹립 자금이었다고 거짓 자백하게 하였던 것이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4월 25일] 이로 인하여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金悌男)이 죽었으며, 영창대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강화부사(江華府使)정항(鄭沆)에게 살해되었다. 그런데 정광경의 처인 여흥 민씨(驪興閔氏)의 외할아버지인 북병사(北兵使)이제신(李濟臣)의 서자가 강변칠우의 한 사람인 이경준(李耕俊)이었다. 그리하여 정광경은 이경준과 인척 관계라고 하여 피혐(被嫌)한 끝에 체차되었으나, 광해군이 처가의 친족이라며 용서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6월 6일] 이후 홍문관 수찬을 거쳐 사간원 정언과 이조 좌랑(佐郞), 홍문관 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는데, 여러 차례 관직을 옮겼지만 예전에 재임한 곳들을 벗어나지 않았고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6월 8일, 광해군 5년 6월 23일, 광해군 5년 7월 5일, 광해군 5년 8월 29일, 『국조인물고』] 1615년(광해군 7) 홍문관 부교리(副校理)를 거쳐 홍문관 응교(應敎)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7년 4월 28일, 광해군 7년 11월 9일] 이듬해인 1616년(광해군 8)에 사간원 사간(司諫)이 되었으나 배명(拜命)하지 않았고, 군기감(軍器監)정(正)상의원(尙衣院) 정, 의정부(議政府)사인(舍人)을 역임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8년 1월 26일, 광해군 8년 9월 24일, 『국조인물고』] 1617년(광해군 9) 홍문관 전한(典翰)을 거쳐서,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이 되었고, 이어 성균관 사성(司成)에 임명되었는데, 이후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을 겸임하였다.[『국조인물고』광해군 9년 3월 9일, 광해군 9년 3월 27일, 광해군 9년 4월 25일, 광해군 9년 8월 12일]

1618년(광해군 10) ‘폐모론(廢母論)’이 재론되면서, 대북파 이이첨이 <정청(庭請) 운동>을 전개하였다. 폐모론이 처음 제기된 것은 계축옥사 직후로 이이첨의 사주를 받은 대간(臺諫) 관원들이 “인목대비(仁穆大妃)는 종묘사직과 스스로 단절했으니, 모후(母后)로서 대우할 수 없다.”며 ‘폐모론’을 발론(發論)하였다. 그러자 당시 사간원 정언이었던 정광경은 사헌부(司憲府)헌납(獻納)오정(吳靖) 등과 함께 이를 일일이 반박하며 반대하였고, 그 결과 폐모론은 잠잠해졌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5월 26일, 『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22년 5월 2일] 그런데 몇 년이 지난 후 다시 폐모론이 제기되었던 것이다. 이때 정광경의 아버지 좌의정정창연은 이 논의에 반대하며 참여하지 않았으나, 두 아들에게는 정청 운동에 참여하라고 엄명(嚴命)하였으므로, 정광경은 형 정광성과 함께 정청 운동에 참여하였다.[『광해군일기』광해군 10년 1월 4일] 이것은 좌의정정창연이 문성군부인의 외삼촌이었기 때문에, 왕비의 체면을 살려주기 위한 최소한의 배려였다. 정광경 또한 아버지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워 부득이하게 청정 운동에 참여하였다.[『인조실록』인조 22년 5월 2일] 이후 문성군부인 또한 이들 형제가 정청한 사실을 구실로 정창연 일가를 보호하여 주었다.[『국조인물고』] 1621년(광해군 13) 사헌부 집의(執義)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13년 7월 12일, 광해군 13년 9월 25일]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자, 그는 황해도어사(黃海道御史)로 파견되었다. [『국조인물고』] 이어 추천을 받아 사간원 사간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1년 윤10월 25일] 이때 그는 광해군 때 정청 운동에 참여하였으므로 간관(諫官)의 자격이 없다며 사퇴하려고 하였지만, 사간원에서 계축옥사 직후 폐모론에 반대한 전력과 이후 아버지 정창연을 위하여 부득이하게 정청 운동에 참여한 것을 들어 반대하자, 인조가 이에 따랐다.[『인조실록』인조 1년 윤10월 27일]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公州)까지 호종하였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되어 병조 참지(參知)에 임명되었고, 예조 참의(參議)를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인조실록』인조 2년 7월 18일, 『국조인물고』] 1625년(인조 3) 사헌부 장령이 되었는데, 지제교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3년 1월 20일] 이어 세자를 책봉할 때 전교관(傳敎官)을 맡았던 까닭에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되어 용양위(龍驤衛) 부호군(副護軍)이 되었으며, 그해 9월에는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되었다.[『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인조 3년 2월 5일, 인조 3년 2월 6일, 인조 3년 9월 4일] 그리고 1626년(인조 4) 아버지 정창연의 병 때문에 상소하여 체직된 후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가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4년 10월 13일, 『국조인물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전주(全州)에 내려가서, 분조(分朝)에서 활동하였다.[『국조인물고』] 1628년(인조 6) 중추부(中樞府) 동지사가 되었다가 도승지로 영전되었는데, 형제가 나란히 도승지에 임명된 것은 드문 일이었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였다.[『인조실록』인조 6년 10월 18일, 인조 8년 12월 20일, 『승정원일기』, 인조 6년 10월 8일, 『국조인물고』] 1629년(인조 7) 양주목사(楊州牧使)가 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사건에 연좌되어 파직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7년 2월 13일, 『국조인물고』] 1631년(인조 9) 의금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9년 윤 11월 6일] 1632년(인조 10) 병조 참판과 형조 참판을 지내면서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임하였고,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10년 4월 8일] 1633년(인조 11) 1월 사간원 대사간(大司諫)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634년(인조 12)에는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1년 9월 4일, 『승정원일기』인조 12년 2월 15일] 1635년(인조 13) 인조가 자신의 아버지인 정원군(定遠君)을 원종(元宗)으로 추존(追尊)하고 종묘(宗廟)부묘(祔廟)할 때, 천조관(薦俎官)이 되었다.[『인조실록』인조 13년 3월 19일] 이어 호조 참판을 거쳐 다시 도승지(都承旨)에 임명되었다.[『국조인물고』]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정광경은 인조의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국조인물고』] 그러나 얼마 후 청나라 군사가 수원을 공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도승지를 사임하고 아버지 소식을 수소문하다가 아버지 정창연이 이미 피난 중에 고향인 수원에서 별세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6일, 『국조인물고』] 1639년(인조 17) 왕을 호종한 공로로 가의대부(嘉義大夫)에 승품되었고, 사간원 대사간과 사헌부 대사헌을 역임하였다.[『인조실록』인조 17년 3월 16일, 인조 17년 7월 13일] 1640년(인조 18) 예조 참판이 되어 사명(使命)을 받들고 심양(瀋陽)에 갔는데, 청나라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할 때에 조금도 기색이나 말씨를 낮추지 않았으므로, 청나라 측 통역들이 모두 그를 꺼렸다.[『인조실록』인조 18년 3월 22일, 『국조인물고』]

그해 12월 이조 참판이 되었으나 실수로 인하여 파직되었고, 이듬해에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대고 사양하였다.[『인조실록』인조 18년 12월 27일, 인조 19년 7월 13일, 『국조인물고』] 그는 오래 전부터 벼슬살이를 즐겁게 여기지 않았으므로, 외직을 자원하여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는데, 그의 아들이 죽으면서 병이 들어 체직되었다. 다시 조정에 들어와서 1643년(인조 21) 이조 참판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인조 21년 5월 6일] 이때 병이 나서 위독해졌는데도 약조차 물리치고 먹지 않다가, 1644년(인조 22) 5월 초1일에 성남(城南)에 있는 본가(本家)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59세였다.[『인조실록』인조 22년 5월 2일]

성품과 일화

정광경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사람됨이 홍의(弘毅)하고 역량이 있어서 항상 “사대부는 스스로 수립(樹立)할 수 있어야만 세상에 행세할 수 있다.”고 말하였다. 관직을 담당하여 일을 처리할 때에도 한결같이 의리로서 재정(裁定)하였고 비록 형세가 곤란한 경우에도 전혀 의리에 어긋난 방도를 따르지 않았다. 기개와 도량이 준엄하고 깊었고 내면은 차분하고 외면은 시원스러웠으며, 평상시에는 엄격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다. 마음가짐이 정대(正大)하여 항상 남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자기 자신을 속이지 않고자 스스로 면려하였다.[『국조인물고』]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는 일에 독실하여 비록 한밤중에 급히 관아에 나가게 되더라도 반드시 부모가 계신 곳에 나아가서 잠이 드셨는지 물어보고 난 뒤라야 길을 나섰다. 형을 섬기고 여러 여동생들을 대할 때에는 공경과 사랑하는 마음을 지극하게 쏟았으며, 서제(庶弟) 한 명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을 주어 살게 하였고 맛있는 음식이 생기면 반드시 그에게도 나누어주었다. 자기의 몸가짐을 청렴하고 단출하게 검속하여 조정에서 수십 년 동안 벼슬하면서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이외에는 조금도 재물을 불리지 않았으므로 집안사람들이 궁색한 살림을 면하지 못하였으며, 의복은 비단옷이 없고 식탁에는 두 가지 고기를 올리지 않았다. 부서진 가옥의 짧은 처마에서 종이 병풍으로 바람을 가리고 베 이불을 덮고 살면서도 느긋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지냈다. 그러나 이러한 행실로써 명성을 구하려고 하지는 않았다.[『국조인물고』]

성품이 본래 남들과 교유하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비록 평소에 사이가 좋았던 사람일지라도 그가 권세 있는 요직에 재직하고 있으면 명함 한 장조차 가볍게 통하지 않았다. 옳지 않다고 생각되는 상대에 대해서는 특히 나를 더럽히려는 사람처럼 멸시하였다.[『국조인물고』] 현달한 관직을 맡을 때마다 번번이 이마를 찡그리며 불안하게 여기고 누인(累人)으로 자처하였다. 일찍이 이조 판서의 후보자로 천거되었을 때 김자점(金自點)이 재상으로 있었는데, 그가 자기에게 아부하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어 마침내 그의 진로를 막았다. 그 뒤에 대신이 그를 형조 판서로 추천하려고 할 때 그는 절대 기뻐하거나 화낸 표정을 겉에 드러내지 않았다. 직무를 볼 때에는 자잘한 일이건 중대한 일이건 빠뜨리지 않았다. 대각(臺閣)에 재임할 때에는 자기의 논의를 소신껏 견지하면서 남들의 견해에 구차하게 동조하지 않았다.[『국조인물고』]

1613년(광해군 5) 김제남이 사사(賜死)되고, 이듬해에 영창대군이 살해당한 이후로 집에 있을 때면 항상 혀를 끌끌 차면서 혼자서 속으로만 시국(時局)을 슬퍼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그 이유를 물어봐도 대답하지 않았고, 벼슬에 임명될 때마다 반드시 극력 사양하였으며, 간혹 억지로 나아갔으나 평소 그의 뜻은 아니었다.[『국조인물고』]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서울특별시 동작구에 있는데, 문곡(文谷)김수항(金壽恒)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있다.[『국조인물고』]

부인 여흥 민씨는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민유경(閔有慶)의 딸인데, 자녀는 4남 3녀를 낳았다. 장남 정지화(鄭至和)는 찰방(察訪)이고, 차남 정채화(鄭采和)는 목사(牧使)이다. 3남 정지화(鄭知和)는 예조 판서이고, 4남 정이화(鄭以和)는 요절하였다. 장녀는 군수(郡守)이기선(李起先)의 처가 되었으며, 차녀는 홍주세(洪柱世)의 처가 되었고, 3녀는 사인(士人)한보(韓保)에게 시집갔다. 측실(側室)이 낳은 아들과 딸이 각기 1명인데, 아들은 정수(鄭守)이고, 딸은 진사(進士)황흔(黃昕)에게 시집갔다.[『국조인물고』]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청선고(淸選考)』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상촌집(象村集)』
  • 『속잡록(續雜錄)』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백일기(靑白日記)』
  • 『청음집(淸陰集)』
  • 『청강집(淸江集)』
  • 『월당집(月塘集)』
  • 『지천집(遲川集)』
  • 『용주유고(龍洲遺稿)』
  • 『낙전당집(樂全堂集)』
  • 『백헌집(白軒集)』
  • 『학주전집(鶴洲全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시남집(市南集)』
  • 『외재집(畏齋集)』
  • 『우담집(愚潭集)』
  • 『구봉집(九峯集)』
  • 『석담집(石潭集)』
  • 『죽당집(竹堂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