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호군(副護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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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중앙의 오위(五衛)에 소속된 종4품 서반직.

개설

군의 말단 벼슬 중의 하나로 고려시대부터 조선전기까지 섭장군(攝將軍)이라는 직위로 불리던 것이 세조 때에 관제 정비를 통해 종4품의 정식 관제로 법제화되었다. 부호군(副護軍)은 도성 문 파수 및 도성 치안 감찰 등 군사적인 임무가 있었지만, 양란 이후 오위제(五衛制)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이후에는 명칭만 유지한 채 현직이 없는 문관, 무관, 음관 등에게 실무 없이 녹을 계속 주기 위한 구실로 사용되었다.

담당 직무

1466년(세조 12)에 관직을 정비했을 때 섭호군(攝護軍)을 부호군으로 바꾸면서 비로소 성립되었다(『세조실록』 12년 1월 15일). 원래 섭직(攝職)은 고려 관직 체계에서는 널리 사용되었다. 초창기에는 ‘대신하여’ 어떤 일을 처리하는 직위라는 의미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점차로 정규적인 관직 체계의 한 단계로 성장하였다. 한편 고려 의종 말년까지는 주로 문반직에 설치되었는데 그 이후에는 거의 모두 무반직에 두었다. 이는 섭직의 성격 변화와 함께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었다. 그런데 섭장군의 제수 사례는 비교적 자주 발견되나 상대적으로 섭호군은 현재까지 그 예가 매우 드물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섭직은 무반직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제수되었다. 하지만 섭호군의 경우에는 기록상 세조 때부터 나타난다. 1457년(세조 3) 중앙군 조직을 5위제로 개편하면서 섭호군 75명을 오위에 분속시켜 모위(某衛) 모호군(某護軍)이라 일컫게 하라는 것이 시초였다. 명확하지 않으나 그 이전에도 더러 제수되었을 것이나 5위제로 개편되면서 그 위상이 분명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무관이 아닌 종친에게도 제수되었던 적이 있는데, 이후에도 그런 경향은 더욱 강해진다. 즉 단지 무반직으로 기능하지 않고 기타 여러 가지 이유로 관직을 제수해야 하는 경우가 발생했을 때 주어졌다.

한편 부호군으로의 바뀜은 그동안 사용했던 섭직 체계를 철폐하고 무관직에서 ‘부(副)’의 의미를 확고히 한다는 뜻도 포함되었다. 섭은 본래 ‘대신하여’의 의미가 강했던 반면 부는 ‘버금간다’, ‘다음간다’, ‘둘째’라는 뜻으로 사용되므로 무관직의 생리에 적합하였다. 이로써 섭호군을 대신하여 부호군이라 칭하고 법제화했던 것이다.

변천

『경국대전』에서는 종4품, 정원 54명으로 규정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 등을 거치면서 중앙의 5위 조직은 기능이 정지되었고, 호군 이하는 관명(官名)만 유지하면서 녹과(祿窠)를 줄여서 승진 또는 강등하여 내부(來付)한 각색(各色) 인원(人員)을 대우하도록 했다. 부호군의 경우 『속대전』에서는 정원이 22명 늘어 76명이 되었다. 즉 친공신(親功臣) 5명, 승습군(承襲君) 1명, 공신적장(功臣嫡長) 2명, 금군(禁軍) 별장(別將) 1명, 금군장(禁軍將) 7명, 호위별장(扈衛別將) 3명, 선전관(宣傳官) 1명, 훈련도감(訓鍊都監) 장관(將官) 8명·군병(軍兵) 2명, 금위영(禁衛營) 장관 6명, 어영청(御營廳) 장관 8명, 총융청(摠戎廳) 장관 3명, 수어청(守禦廳) 장관 5명, 내의원(內醫院) 의원(醫員) 4명, 사자관(寫字官) 1명, 이문학관(吏文學官) 1명, 포도군관(捕盜軍官) 5명, 금군 13명 등으로 규정되었다.

『대전회통』에서는 7명을 줄여 69명이 되었다. 금군장 1명, 어영청 장관 1명, 수어청 장관 5명을 줄이고, 이문학관 1명을 대신하여 통제중군(統制中軍) 1명을 넣었다.

참고문헌

  • 『경국대전(經國大典)』
  • 『속대전(續大典)』
  • 『대전회통(大典會通)』
  • 박용운, 『고려시대 관계·관직연구』, 고려대학교출판부, 1997.
  • 천관우, 『근세조선사연구』, 일조각, 1979.
  • 윤훈표, 「5위체제의 성립과 중앙군」, 『한국군사사 5 조선전기Ⅰ』, 육군본부,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