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응서(朴應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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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3년(인조 1) = ?]. 조선 중기 광해군 때 활동한 문사(文士). 본관은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영의정(領議政)박순(朴淳)이며, 어머니 고씨(高氏)는 고덕부(高德符)의 딸이다. 증조부는 박지흥(朴智興)이고, 증조모 서씨(徐氏)는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거주지는 경기도 여주(驪州)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그는 영의정박순(朴淳)의 서자(庶子)로서 시문(詩文)에 능하고 학문이 깊은 쟁쟁한 문사였으나 서출(庶出)이어서 출세의 길이 막혀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과거 시험을 보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서얼차대(庶孽差待)에 불만을 품고 같은 명가(名家) 출신 서인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허홍인(許弘仁)·박치의(朴致毅)·김평손(金平孫)·박치인(朴致仁) 등과 생사를 같이 한 친구 관계를 맺고, ‘강변 7우(江邊七友)’ 또는 ‘죽림7우(竹林七友)’라 자처하며 때도 없이 어울려 돌아다녔다. 이 중 서양갑은 서익(徐益)의 아들이고, 심우영은 심전(沈銓)의 아들이다. 1609년(광해군 1)부터는 경기도 여주의 강변으로 거처를 옮긴 뒤 각 집안을 합쳐 재물을 공동으로 사용하면서 매우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였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1613년(광해군 5) 3월 문경(聞慶) 새재[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행상인을 죽이고 은자(銀子) 수백 냥을 탈취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 절도 사건은 그 일당인 허홍인의 노비 덕남(德男) 등이 체포됨으로써 발각되었고, 그 해 4월에 그 일당들 모두가 검거되었다. 이 사건으로 사형수가 된 박응서는 화를 면하게 해주겠다는 대북파(大北派) 이이첨(李爾瞻)의 비밀스런 사주를 받고 옥중에서 상소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金悌男)이 모반을 꾸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세우려 하고 있다.”고 날조하였다. 이에 영창대군은 강화에 유배되고,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아버지이자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은 사형되었으며, 기타 소북파(小北派)들이 숙청당한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7서일당(七庶一黨)’이 모두 연루되어 치죄되었으나 그 혼자만 죄가 용서되어 그 해 11월에 석방되었다. 1623년(광해군 15) 3월 <인조반정(仁祖反正)> 때 잡혀 같은 해인 1623년(인조 1) 3월 19일 주살되었다.

계축년 박응서의 옥사

명문가의 서자로 태어난 그는 자신이 벼슬하지 못하는 데 대하여 울분을 품고 같은 처지의 서자들과 결사(結社)하여 소양강(昭陽江) 등지에서 시주(詩酒)로 소일하였다. 용돈이 궁하자 문경 새재에서 상인(商人)을 죽이고 금품을 강탈한 사실이 발각되어 잡혀 구금되었다. 그때 감히 목숨을 부지할 계책을 내어 옥중에서 상소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연흥부원군김제남이 모반을 꾸며 영창대군을 세우려 하고 있다.” 라고 하며 있지도 않은 말을 날조함으로써 임금인 광해군의 뜻에 맞추고 시의(時議)에 붙좇아 마침내 큰 옥사를 이루었다. 이것이 1613년(광해군 5)에 일어난 <박응서(朴應犀)의 옥사>, 곧 <7서지옥(七庶之獄)>, <계축옥사>이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명륜록(明倫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