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유경(閔有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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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5년(명종20)∼1632년(인조10) = 68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이길(頤吉), 호는 풍돈(楓墩) · 도촌(陶村)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성균관 생원(生員)민용(閔溶)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영천군(永川君)이미수(李眉壽)의 딸이다. 황해도관찰사민기문(閔起文)의 손자이고, 호조 정랑민유부(閔有孚)의 4촌 동생이다. 청강(淸江)이제신(李濟臣)의 문인이고, 상촌(象村)신흠(申欽)의 동서이다.

선조 시대 활동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는데, 같은 처지의 신흠과 함께 청강이제신에게 수학하다가, 두 사람 모두 그의 사위가 되었다. 1590년(선조23)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594년(선조27)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0세였다. 승문원 정자(正字)로 보임되었다가 예문관 검열(檢閱)에 임명되었고,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옮겼다가 예문관 대교(待敎)를 거쳐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형조 좌랑으로 옮겼다가 평안도병마평사(平安道兵馬評事)로 나갔는데, 잇달아 어천역승(魚川驛丞)과 함경도평사 · 황해도평사를 역임하면서 수년 동안 변방의 군사적 실무를 맡았다. 1601년(선조34) 내직으로 들어와서 공조 좌랑에 임명되었다가, 사간원 정언(正言) · 헌납(獻納)과 홍문관 수찬(修撰) · 교리(校理)를 거쳐, 사헌부 지평(持平)으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02년(선조35) 영남 유생 문경호(文景虎)의 상소로 인하여, 북인 정인홍(鄭仁弘)과 유영경(柳永慶) 등이 <기축옥사(己丑獄死)>에서 최영경(崔永慶)을 억울하게 죽인 서인을 공격하면서 그 배후로 이미 죽은 성혼(成渾)을 지목하였다. 그리하여 성혼의 벼슬을 추가 삭탈하였는데, 그는 대사헌황신(黃愼)과 함께 그것이 무함임을 힘껏 변명하다가 전주판관(全州判官)으로 좌천되었다. 또 유영경과 정인홍은 <기축옥사> 때 최영경에게 죄를 주도록 청했던 구성(具宬) · 이상길(李尙吉) · 이흡(李洽) 등과 성혼의 추가 삭탈에 반대하던 황신 · 이성록(李成祿) · 민유경 등을 아울러 탄핵하여 모두 귀양 보냈다. 이리하여 그는 황해도 봉산(鳳山)으로 유배되어 6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였다.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10년(광해군2) 홍문관 부수찬(副修撰)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장령(掌令)으로 옮겼다. 이듬해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교리로 옮겼다. 1613년(광해군 5) <폐모론(廢母論)>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반대한 것과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게 만든 ‘강변칠우(江邊七友)’의 한 사람인 이경준(李耕俊)과 가까운 친척이란 이유로 파직되었다. 이경준은 이제신의 서자로 민유경의 매제이다. 이리하여 그는 광해군 후반기에 10년 이상 칩거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홍문관 수찬에 복귀하였으나, 1624년(인조2) <이괄(李适)의 반란> 때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지 않았다고 하여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625년(인조3) 성균관에 들어가서 직강(直講) · 사예(司藝) · 사성(司成)으로 승진하였고, 내자시(內資寺) · 내섬시(內贍寺) · 사복시(司僕寺) · 예빈시(禮賓寺)의 정(正)을 역임하였다. 1627년(인조5) 감시(監試) · 회시(會試)의 고강시관(考講試官)에 차출되었고, 1628년(인조6) 승문원 판교(判校)에 임명되어,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1630년(인조8)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가 돈녕부(敦寧府)도정(都正)이 되었다. 1632년(인조10) 정월 14일에 병으로 서울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68세였다.

성품과 일화

민유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천성이 진솔하고 소탈하였으며 젊어서부터 남과 어울리기를 즐겼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에 남과 장벽을 두지 않았지만, 상대편의 마음 속을 꿰뚫어 보았으므로 자리를 같이 한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하여 감히 속이지 못하였다. 특히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여 하루 종일 두어도 싫증내지 않았다. 사헌부 · 사간원에 있을 때에 지론(持論)이 강직하였는데, 그는 자신을 굽혀서 시속에 아부하여 세상과 함께 부침(浮沈)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였다. 그는 4촌 형 민유부가 일찍이 죽어 고아가 된 여러 아이들을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교육시켰는데, 그 가운데 민성휘(閔聖徽)는 문과에 급제하고 형조 판서를 지냈다.

묘소와 비문

묘소는 경기도 여주(驪州) 신진리(新津里)의 언덕에 있는데, 그의 친구 청음(淸陰)김상헌(金尙憲)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부인 전의이씨(全義李氏)는 이제신의 맏딸인데, 자녀는 2남 3녀를 두었다. 차자 민성임(閔聖任)은 찰방(察訪)이며, 장녀는 참판(參判)정광경(鄭廣敬)에게 출가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간이집(簡易集)』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잠곡유고(潛谷遺稿)』
  • 『청백일기(靑白日記)』
  • 『택당집(澤堂集)』
  • 『우계집(牛溪集)』
  • 『청강집(淸江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