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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9일 (화) 22:53 기준 최신판




총론

[1572년(선조 5)∼1657년(효종 8) = 86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호조 판서(判書)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 등을 지냈다. 자는 경진(景進)이고, 호는 후추(後瘳) 또는 후추재(後瘳齋)이며, 봉작은 청릉군(淸陵君)이다.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거주지는 서울과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곡성현감(谷城縣監)을 지낸 김급(金汲)이고, 어머니 풍천 임씨(豐川任氏)는 판교(判校)임보신(任輔臣)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를 지낸 김사원(金士元)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으로 추증된 김우맹(金友孟)이다. 북인(北人)소북(小北)대북(大北)으로 갈라지자, 소북의 영수로서 대북을 공격하였다. 광해군(光海君)과 인조 때 4차례나 호조 판서를 역임하면서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후 피폐해진 국가 재정을 회복하는 데에 탁월한 행정 능력을 발휘하였다. 또 평안도관찰사(平安道觀察使)로 있을 때 의주·안주·평양의 성을 새로 수축하여 여진의 침략에 대비하였고, 후금(後金)에 대한 정책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91년(선조 24) 사마시(司馬試)에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0세였다.[『방목(榜目)』]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김신국(金藎國)은 경상도 안동 처갓집에 있었는데, 고향 충주에서 막냇동생 김영국(金英國)이 왜군에게 살해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충주로 달려가니, 가족들은 피난가고 없었다. 그는 격문을 만들어 모집한 의병 1천여 명을 이끌고, 충주와 진천 사이의 험조한 산악에 의지하며 왜군을 방어하였는데, 조정에서 이를 듣고 그에게 참봉(參奉)을 제수하였다. 군중(軍中)에서 어머니가 여주(驪州)로 피난 갔다는 소문을 듣고,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여주로 찾아가서 겨우 어머니를 모시고 충주로 돌아왔으나, 아내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피난 중에 사망하였다.[『염헌집(恬軒集)』 권34 「보국숭록대부영중추부사김공행상(輔國崇祿大夫領中樞府事金公行狀)」 이하 「김신국행장」으로 약칭]

1593년(선조 26) 세자 광해군이 전주(全州)분조(分朝)에서 실시한 별시(別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22세였다.[『방목』] 처음에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에 보임되었다가, 곧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의 종사관(從事官)에 임명되어 공문서의 출납을 관장하였다.(『선조실록』 27년 10월 6일) 그 뒤 춘추관(春秋館)사관(史官)이 되었다가, 예문관 대교(待敎)로 옮겼다.(『선조실록』 27년 12월 22일) 1595년(선조 28) 예문관 봉교(奉敎)로 승진하였다가, 승정원 주서(注書)를 거쳐 병조 좌랑(左郞)에 임명되었는데, 새로 설치한 훈련도감(訓鍊都監)제조(提調)이덕형(李德馨)이 김신국을 병조 좌랑으로 천거하였기 때문이다.(『선조실록』 28년 2월 4일),(『선조실록』 28년 8월 1일),(『선조실록』 28년 8월 28일)[「김신국행장」]

1596년(선조 29) 이조 좌랑을 거쳐 병조 정랑(正郞)으로 승진하였는데, 영의정유성룡(柳成龍)이 김신국을 발탁하여 병서(兵書)·진법(陣法)을 가르치는 일을 맡겼기 때문이다.(『선조실록』 29년 11월 22일),[「김신국행장」] 홍문관(弘文館)교리(校理)에 임명되었다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자 중추부 영사(領事)김수(金晬)의 추천으로 군기(軍機) 선유관(宣諭官)에 임명되어, 엄정하게 군공을 논정하였다.(『선조실록』 30년 1월 23일) 또 접반사(接伴使)이덕형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평안도 지방으로 나가 명(明)나라 사신을 접대하였다.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에 임명되었고, 홍문관 수찬(修撰)을 거쳐 이조 정랑으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30년 4월 18일),(『선조실록』 30년 8월 17일) 1598년(선조 31)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를 거쳐 홍문관 전한(典翰)으로 승진하였고, 사간원 사간(司諫)을 거쳐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가 되었다.(『선조실록』 31년 3월 7일),(『선조실록』 31년 6월 3일),(『선조실록』 31년 10월 6일),(『선조실록』 31년 12월 25일) 독운어사(督運御史)에 임명되어 경상도와 전라도를 순행하며 명나라 군사들에게 공급할 군량미를 운송하는 일을 감독하였다.

1599년(선조 3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에 임명되었는데, 남이공(南以恭)과 함께 북인 홍여순(洪汝諄)을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마침내 파직되었다.(『선조실록』 32년 5월 25일),(『선조수정실록』 32년 12월 1일) 이때부터 북인은 홍여순·정인홍(鄭仁弘) 등의 대북(大北)과 김신국·남이홍 등의 소북(小北)으로 갈라졌다. 얼마 안 되어 사복시(司僕寺)정(正)에 임명되어 순무어사(巡撫御史)로서 평안도에 갔다 왔는데, 반대파에서 김신국과 남이공을 ‘김⋅남(金南)’이라고 일컫고 두 사람이 조정의 정사를 마음대로 한다고 공박하여 마침내 두 사람의 관직을 삭탈하였다.(『선조실록』 32년 7월 12일),(『선조실록』 32년 11월 22일),(『선조수정실록』 32년 12월 1일) 이에 김신국은 고향 충주로 돌아와서 9년 동안 은거하며 성리학에 관한 서적들을 읽고 연구하는 한편, 선현(先賢)의 언행과 사적을 베껴 모아 『경현록(景賢錄)』이라는 책을 편찬하였다. 1607년(선조 40) 귀양에서 풀려나 서울에 들어와 직첩을 되돌려 받았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대북이 정권을 잡고 소북의 영의정유영경(柳永慶)을 처형할 때 김신국과 남이공도 모주(謀主)로 지목되었다. 그러나 광해군의 처남 유희분(柳希奮)이 그를 감싸주고 추천하여 세자시강원 보덕에 임명되었다가, 홍문관 전한으로 전직되었다.(『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29일),(『광해군일기』 1년 1월 26일) 유희분은 일찍이 소북으로 활동하면서 김신국과 아주 가까웠기 때문이다. 1609년(광해군 1)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가 홍문관 직제학(直提學)을 거쳐 승정원 동부승지에 발탁되어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옮겼다.(『광해군일기』 1년 5월 13일),(『광해군일기』 1년 6월 17일),(『광해군일기』 1년 7월 3일),(『광해군일기』 1년 8월 10일) <임해군(臨海君) 옥사>가 일어난 후 그 옥사를 다스렸으나, 그는 중앙 정계를 떠나고 싶어 어버이를 봉양해야 한다는 핑계를 대고 자청하여 홍주목사(洪州牧使)로 나갔다. 홍주목사로 부임해서 간사한 아전을 억누르고 오랜 폐단을 개혁하니, 충청도관찰사(忠淸道觀察使)가 수령 가운데 치적이 제일이라고 보고하자 임금이 표리(表裡) 1벌을 하사하였다.

한편 북인은 선조 때 대북과 소북으로 나누어졌는데, 광해군 때 집권한 대북은 청북(淸北)과 탁북(濁北)으로 갈라지고, 소북은 골북(骨北)육북(肉北)으로 갈라졌으며, 당시 김신국과 남이공은 청북으로 분류되었다. 1610년(광해군 2) 호패청(戶牌廳)을 설치하고 8도에 호패를 실시하기 위하여 안무사(按撫使)를 보냈는데, 김신국은 충청도안무사(忠淸道按撫使)가 되어 충청도 지방에서 호패 사용을 독려하였다.(『광해군일기』 2년 12월 7일) 1612년(광해군 4) 임해군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사공신(翼社功臣)으로 녹훈되었고, 청릉군에 봉해졌다. 이듬해인 1613년(광해군 5)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에 임명되었다가, 얼마 안 되어 평안도관찰사로 나갔다.(『광해군일기』 5년 3월 29일),(『광해군일기』 5년 5월 19일) 그리고 평안도의 요충지인 안주·정주·의주 세 고을에서 성을 수축하였는데, 마침 평안도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창고의 곡식을 풀어 역사에 동원된 백성들에게 그 근만(勤慢)에 따라서 늠료(廩料)를 지급하였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두 열심히 일을 하였으므로, 굶주리는 백성들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축성(築城)의 역사도 쉽게 끝나서 전보다 높고 튼튼한 성곽이 새로 만들어졌다.[「김신국행장」] 이후 평안도 3대 요충지에 새로 성곽을 쌓았다고 조정에 보고하자, 김신국을 가의대부(嘉義大夫)로 승품하였다.

1615년(광해군 7) 평안도관찰사의 임기가 만료되었으나, 왕이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유임 하게 하였다. 1616년(광해군 8)과 1617년(광해군 9) 평안도관찰사김신국은 여러 번 사직을 요청하였으나, 광해군이 허락하지 않았다.(『광해군일기』 9년 1월 13일) 한편 김신국은 태조(太祖)의 영정을 봉안한 평양의 영숭전(永崇殿)을 다시 세워 준공하였는데, 그 공으로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품되었다. 1618년(광해군 10)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에 임명되어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10년 8월 5일),(『광해군일기』 10년 9월 12일) 1619년(광해군 11) 호조 판서에 임명되어, 세자시강원 빈객(賓客)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광해군일기』 11년 2월 23일),(『광해군일기』 11년 1월 6일) 이때 광해군이 낭비가 매우 심하여 국고가 많이 비었는데, 호조 판서김신국이 합리적으로 국가 재정을 관리하니, 백성들을 괴롭히지 않고도 국가 비용이 조금 넉넉해졌다. 이때부터 광해군 말년까지 4년 동안 김신국은 호조 판서로 재임하면서 오로지 국가 재정을 충실히 하려고 노력하였다.

인조~효종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서인(西人)이 집권하면서 광해군의 훈작(勳爵)을 삭탈하였으므로, 김신국도 익사공신을 박탈당하고 가의대부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반정을 이끈 대장김류(金瑬)가 김신국을 등용할 것을 청하여, 반정한 지 이틀 만에 김신국은 다시 평안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년 3월 14일),(『인조실록』 1년 3월 15일) 이때 평안도병마사(平安道兵馬使)이괄(李适)이 평안도감영(監營)의 군사를 병영(兵營)에 소속시키고 1천 명만 남기자, 관찰사김신국이 비변사에 강력히 항의하여 군사를 5천 명으로 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이 반란을 일으키자, 비변사에서 김신국을 평산부사(平山府使)에 임명하여 이를 막게 하였으며, 곧 비변사 제조에 임명되었다가 형조 참판이 되었다.(『인조실록』 2년 1월 20일),(『인조실록』 2년 2월 12일) 이런 가운데 이괄의 반란군이 서울을 공격하자, 인조는 충청도 공주로 피난을 갔는데, 참판김신국도 어가(御駕)를 호종(扈從)하였다. 그리하여 <이괄의 난>이 평정된 후 자헌대부로 승품되고, 한성부판윤이 되었다.[「김신국행장」],(『인조실록』 2년 3월 29일)

1625년(인조 3) 판서김상용(金尙容)이 김신국의 일 처리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를 천거하자, 인조가 특별히 명하여 김신국을 승정원 도승지(都承旨)로 발탁하였고, 김신국은 <이괄의 난> 이후 어지러운 정국을 바로잡는 데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런데 인조반정을 주도한 비변사당상관(堂上官)최명길(崔鳴吉)은 당시 어려운 나라 경제를 살리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최명길의 추천을 받아 인조는 김신국을 호조 판서로 임명하여, 피폐해진 나라 경제를 살리는 책임을 맡겼다.(『인조실록』 3년 9월 26일),(『인조실록』 3년 10월 4일) 이때 김신국은 나라의 재정을 충실하게 만드는 세 가지 방안을 제시하였는데, 첫째 국가 비용을 최대한 줄이고, 둘째 동전(銅錢)을 주조하여 통용시키며, 셋째 바다의 이익을 나라에서 관리하는 것이었다.[「김신국행장」],(『인조실록』 3년 10월 27일)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일어나서 후금의 아민(阿敏)이 오랑캐 기병(騎兵) 3만 명을 이끌고 침입하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였는데, 호조 판서김신국도 호종하였다. 후금의 오랑캐 군사가 평산(平山)에 이르러 강화(講和)를 청하였으므로, 인조는 김신국을 비롯하여 이정구(李廷龜)·장유(張維)에게 명하여 후금의 사신을 만나서 강화 조약을 협상하게 하였다. 후금의 사신은 명(明)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고 해마다 공물을 바치도록 요구하였으므로, 김신국 등은 의리에 의거하여 이를 거부하고 이틀 동안 버텼다. 그러나 전쟁을 빨리 끝내는 것이 이롭다고 여겨 강화를 맺고, 후금의 군사를 돌아가게 하였다. 서울로 돌아온 후에는 숭정대부(崇政大夫)로 승품되고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 이때 김신국은 오랑캐의 침입을 막기 위해 황해도에 둔전(屯田)을 실시할 것을 주장하였다. 각도에서 5~6만 명의 군사를 뽑은 후 계속하여 교대를 하면서, 항상 5~6천 명의 군사가 둔전에서 농사를 지으며 훈련을 하고 무기를 수선하게 하자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2만 명의 군사가 먹을 식량을 저축하고, 비상시에는 5~6만 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후금의 오랑캐 군사를 막을 수 있게 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비변사에서 난색을 표시하여 시행되지 못하였다.

1628년(인조 6) <유효립(柳孝立) 모반 사건>이 일어나자, 죄인들의 공초에서 그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하여 김신국이 석고대죄 하니, 인조가 이르기를, “이것은 국가에서 의지하고 믿는 신하를 해치려고 하는 말이다” 하고, 호조 판서의 업무를 그대로 보게 하였다.(『인조실록』 6년 2월 25일) 1628년(인조 6) 모친상을 당하여, 3년 동안 동생 김시국(金蓍國)과 함께 시묘살이를 하였고, 1630년(인조 8) 상복을 벗은 후 공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8년 6월 6일) 이어 천장도감(遷葬都監) 제조가 되어 목릉(穆陵 : 선조의 왕릉)을 천장하고 나서 숭록대부(崇祿大夫)로 승품되었다. 1631년(인조 9)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고 선혜청(宣惠廳) 제조가 되었다.(『인조실록』 9년 8월 8일) 이어 1632년(인조 10) 추숭도감(追崇都監) 제조가 되어 원종(元宗 : 인조의 생부)을 추숭한 후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가 되고,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어 호조 판서를 겸임하였다.(『인조실록』 10년 2월 24일),(『인조실록』 10년 5월 11일)

1633년(인조 11) 비변사에서 김신국을 ‘당상관 중에서 가장 시무(時務)에 익숙한 자’라며 함경도관찰사(咸鏡道觀察使)에 추천하였으나, 대간에서 품계와 관직이 맞지 않다고 반대하여 형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1년 5월 28일) 이어 1634년(인조 12) 병조 판서가 되었는데, 김신국이 굳이 사양하는 바람에 다시 호조 판서에 임명되었다.(『인조실록』 12년 9월 1일),(『인조실록』 12년 9월 15일) 1635년(인조 13) 호조 판서에서 해임되고 예조 판서에 임명되었다가, 1636년(인조 14) 다시 호조 판서를 거쳐 중추부 판사가 되었다.(『인조실록』 13년 5월 21일),(『인조실록』 14년 2월 21일),(『인조실록』 14년 10월 15일)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서 청(淸)나라 태종(太宗)홍타지가 오랑캐 기병 10만 명을 이끌고 침입하였다. 이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가려다가 오랑캐 군사들이 길을 막았기 때문에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갔다. 이튿날 김신국이 진언하기를, “신이 성 밖을 보니, 지금 온 적병의 숫자가 매우 적으나, 앞으로 며칠을 지나면 오랑캐 대군이 반드시 올 것이므로, 이때를 틈타서 포위를 뚫고 남쪽으로 내려가야 하겠습니다. 정예 포병 5~6천 명을 시켜서 조령(鳥嶺)·죽령(竹嶺)을 나누어 지키게 하면, 오랑캐는 감히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으나, 인조가 망설이다가 따르지 않았다. 이후 주화파(主和派) 최명길의 주장에 따라 사신을 보내 청나라와 강화를 교섭하려고 하자, 사람들이 모두 사신으로 가기를 꺼렸다. 그러나 김신국이 앞장서서 이경직(李景稷)과 함께 일곱 차례나 오랑캐의 진영에 드나들며 위험을 무릅쓰고 강화를 교섭하여 성사시켰다. 그 뒤에 인조는 “김신국이 적을 헤아리고 일을 추진하는 것은 옛날 명신이라고 하더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김시양(金時讓)이 김신국을 보고 말하기를,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어서 사직이 망하지 않았으니, 나라의 보배라고 하겠다”라고 하니, 김신국이 말하기를, “그대도 이런 말을 하는가. 나라에 남한산성이 있으므로 오히려 이 지경이 되었다” 하니, 김시양이 그 말에 매우 감탄하였다.[「김신국행장」]

1637년(인조 15) 호조 판서를 사직하였는데, 대간(臺諫)에서 청나라에 자식을 볼모로 보내지 않으려는 것이라고 논핵(論劾)하여 파직되었다.(『인조실록』 15년 2월 12일) 얼마 지나지 않아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어,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였다. 1638년(인조 16) 중추부 판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 강화도가 잔폐(殘弊)한 것을 걱정하여 김신국을 강화유수(江華留守)에 임명하였다.(『인조실록』 16년 1월 13일),(『인조실록』 16년 1월 26일) 이후 김신국이 불탄 건물을 수리하고 유망(流亡)한 백성들을 불러서 돌아오게 하니, 1년 만에 강화도가 회복되었으므로 인조가 내구마(內廐馬)를 내려주었다. 1640년(인조 18)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세자이사(世子貳師)가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배종(陪從)하여 청나라 심양(瀋陽)에 갔다.(『인조실록』 18년 3월 6일) 그런데 그해 겨울에 병이 나는 바람에 소현세자가 김신국으로 하여금 의주에 가서 치료하게 하였다. 1641년(인조 19) 병이 조금 나아서 곧 심양 관소(館所)로 돌아갔으나, 나이가 70세가 되었다며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조정으로 돌아와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집에 있으면서 항상 중추부의 한직에 있고 간혹 의금부 판사를 겸임하기도 하였다.(『인조실록』 23년 5월 30일)

1649년(효종 즉위년) 효종이 왕위에 오르자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고, 1652년(효종 3) 다시 의금부 판사에 임명되었다.(『효종실록』 즉위년 7월 14일),(『효종실록』 3년 2월 4일) 이어 1653년(효종 4) 중추부 판사에 임명되었으며, 선조 때 시종하던 신하라고 하여 특별히 늠미(廩米)를 하사하였다.(『효종실록』 4년 9월 21일) 1655년(효종 6) 가뭄 때문에 기우제를 지내고 비를 빌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자 「희우송(喜雨頌)」을 지어서 올리니, 효종이 비답을 내리고 칭찬하였다. 그리고 1657년(효종 8) 2월 초3일 노병으로 서울집의 정침(正寢)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86세였다. 그 날이 바로 그의 여든 여섯 번째 생일이었다.

성품과 일화

김신국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천품이 아주 고상한데다가 풍도(風度)가 엄숙하였으므로 남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였으나, 남과 말하면 화기가 넘쳐흘렀다. 김신국이 어려서 글을 배우고 글 뜻을 빨리 깨닫자, 할아버지 김사원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마침 집을 지으려고 하는데, 김사원이 목수에게 대문을 높고 크게 만들라고 부탁하면서 말하기를, “우리 아이가 반드시 출세할 것이니, 대문에 초헌(軺軒)이 드나들 수 있게 해야 한다” 하였다. 김신국은 아우 김시국과 우애가 깊어서, 서로 한 거리를 건너 살며 걸어서 자주 왕래하였다. 김신국은 가끔 술상을 마련하여 아우와 시를 주고받고, 진기한 물건을 하나라도 얻으면 아우를 불러 함께 즐겼다.[「김신국행장」]

김신국은 경사(經史)를 널리 보았는데, 기억력이 남보다 뛰어나게 좋아서 한 번 눈여겨보면 평생토록 잊지 않았다. 또 문장을 짓는 데에 구구한 자구(字句)에 매달리지 않았으므로, 시문(詩文)의 뜻이 깊고 넉넉하여 창작하는 문인의 기풍이 있었다. 또 김신국은 일찍이 말하기를, “정치하는 도리는 그 벼리를 총괄하면 모든 일이 저절로 잘 되는데, 어찌 잗단 일로 내 마음과 힘을 소모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러므로 관직에 있을 때에는 대체(大體)를 유지하고 조정하여, 번거롭게 그 내용을 밝히지 않아도 정사가 잘 다스려졌다. 그가 호조 판서로 있을 때에 내외의 결재할 서류들이 많고 저자 백성들의 송사가 많았다. 이때 김신국은 입으로 서류를 결재하고, 손으로 송사를 판결하여, 서류나 송사가 쌓이는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시일에 항상 여유가 있었는데, 그는 세밀히 살펴서 결재하가나 판결하지 않더라도 그 내용을 귀신같이 꿰뚫고 있어 사람들이 감히 그를 속이지 못하였다.[「김신국행장」]

호조 판서로 있을 당시 김신국이 한 아전을 시켜 자기 앞에서 금을 달게 하였다. 그 아전이 몰래 금 한 조각을 슬쩍 품에 넣었으나. 김신국은 이를 못 본 체하였다. 곧 창고를 관리하는 자에게 금을 인계할 적에 특별히 그 아전에게 금을 전해 주는 일을 맡기자, 그 아전이 어쩔 수 없이 품속의 금을 꺼내어 금의 합계를 맞추어 인계하였다. 또 문서를 위조한 아전이 여러 장부에 섞어 넣어서 판서가 모르도록 간계를 부리려고 하였는데, 호조 판서김신국은 그 장부를 한번 훑어보고서 그 정상을 알고, 장부를 책상 아래에 놓고 결재하지 않았다. 그 아전이 놀라 그 장부를 다시 정리하면서 말하기를, “귀신처럼 밝으니 도저히 속일 수 없다” 하고, 혀를 내둘렀다.[「김신국행장」]

김신국이 낭관(郎官)으로 있을 때에 동인(東人)의 재상 유성룡에게 문안하러 갔었는데, 유성룡이 평소에 그 이름을 들었던 터라 내실로 맞아들여 군국의 일을 함께 자세히 논하였다. 날이 저물어서 김신국이 물러가려고 하니, 유성룡이 굳이 머물게 하고 말하기를, “자네 말을 들으니, 그 내용이 내 가슴을 트이게 할 만하다” 하였다. 서인의 재상 이덕형은 당시의 인물을 논하면서 김신국을 장래 대신감이라고 칭찬하였다. 판서최천건(崔天健)도 김신국을 한 번 보고는 그가 훌륭한 인재라는 것을 알고 청선(淸選)에서 통과시켰다. 한편 김신국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무신(武臣)을 많이 천거하였는데, 유형(柳珩)·유비(柳斐)·원사립(元士立) 등은 판서김신국의 추천을 받아 대성한 자들이다.[「김신국행장」]

묘소와 후손

묘소는 충청도 충주(忠州) 금곡리(金谷里)의 선영에 있는데, 임상원(任相元)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있다.

첫째 부인 안동 권씨는 판사권식(權寔)의 딸인데, 임진왜란 때에 피란 중에 안동에서 작고하고 자녀가 없다.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병조 참의(參議)윤경립(尹敬立)의 딸인데, 자녀는 1남을 두었다. 부인 파평 윤씨는 병자호란 때에 피난하다가 광주(廣州) 고읍(古邑)에 이르러 오랑캐 군사에게 살해되었으므로, 조정에서 그 집에 정표(旌表)하였다. 이후 김신국은 21년 동안 홀로 살았다. 외아들 김시번(金始蕃)은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를 지내다가, 아버지 김신국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손자로는 김문수(金文遂)와 김문도(金文道), 그리고 김문원(金文遠)이 있다.[「김신국행장」]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선조수정실록(宣祖修正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효종실록(孝宗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염헌집(恬軒集)』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서애집(西厓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