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흔(尹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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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4년(명종 19)~1638년(인조 16) = 7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 예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고,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시회(時晦)이고, 호는 도재(陶齋), 또는 청강(晴江)이다. 본관은 해평(海平)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영의정윤두수(尹斗壽)이고, 어머니 창원 황씨(昌原黃氏)는 참봉(參奉)황대용(黃大用)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군자감(軍資監)정(正)을 지낸 윤변(尹忭)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충무위(忠武衛)부사용(副司勇)을 지낸 윤희림(尹希琳)이다. 초명은 윤양(尹暘)이다. 찬성(贊成)윤근수(尹根壽)의 조카이자, 영의정윤방(尹昉)의 동생이기도 하다. 성혼(成渾)과 이이(李珥)의 문인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고, 1595년(선조 28) 별시 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及第)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 급제 후 승문원(承文院) 정자(正字)에 보임되었다가, 아버지 윤두수와 형 윤방의 도움으로 성균관(成均館)전적(典籍)으로 특진되었다. 이어 형조 정랑(正郞)과 예조 정랑, 그리고 호조 정랑으로 전임되었다가, 평안도도사(平安道都事)로 나갔다. 그 뒤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 이어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을 거쳐서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에 임명되었으며, 사간원 사간(司諫)으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 홍문관(弘文館)으로 들어가 홍문관 수찬(修撰)과 홍문관 교리(校理)를 거쳐 홍문관 부응교(副應敎)로 승진하였다.[『학곡집(鶴谷集)』 권8 「지중추부사윤공묘갈명(知中樞府事尹公墓碣銘)」 이하 「윤흔묘갈명」으로 약칭]

1603년(선조 36)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3년 상례(常禮)를 마친 후 통례원(通禮院)상례(相禮)를 거쳐서 군자감 정, 그리고 통례원 좌통례(左通禮)를 역임하였다. 1605년(선조 38) 여주목사(驪州牧使)로 나갔으나 이듬해에 파직되었으며, 1608년(선조 41) 동지사(冬至使)의 부사(副使)로 임명되어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다녀왔다.[「윤흔묘갈명」]

광해군 시대 활동

1609년(광해군 1)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되었다가 장례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로 전임되었고, 다시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로 승진하였다.[「윤흔묘갈명」]

1613년(광해군 5)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발단은 강변칠우(江邊七友) 또는 죽림칠우(竹林七友)라고 자처하는 서양갑(徐羊甲) · 박응서(朴應犀) · 심우영(沈友英) · 박치의(朴致毅) · 박치인(朴致仁) · 허홍인(許弘仁) · 김평손(金平孫) 등으로부터 비롯되었다. 이들은 명가(名家) 출신의 자제들로 비록 재능은 있었지만 서자(庶子)라는 이유로 관리 등용의 길이 막혀있었으므로, 서얼 차별에 대한 사회적 불만을 품고 북한강 부근을 근거로 서로 시와 술로 교유하였다. 1612년(광해군 4) 조령(鳥嶺) 길목에서 도적이 은상인(銀商人)을 살해하고 은 600∼700냥을 강탈하다가 체포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들이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이듬해인 1613년(광해군 5) 모두 체포되었다.

광해군(光海君) 즉위 이후 정권을 잡은 대북파(大北派)의 이이첨(李爾瞻) · 정인홍(鄭仁弘)일파는 선조의 계비(繼妃)이며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인 인목대비(仁穆大妃)와 그의 친정아버지 김제남(金悌男)을 몰아낼 궁리를 하고 있었다. 때마침 이 사건이 일어나자, 이이첨 일파는 이들을 꾀어, 사면을 조건으로 은자를 탈취한 목적이 인목대비의 아버지인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김제남이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허위 자백을 하도록 하였다. 이 사건은 결국 계축옥사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는데, 1613년 6월 영창대군의 외조부인 김제남이 사사(賜死)되었고, 영창대군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강화(江華)에 유배되었다가 1614년 봄에 살해되었다. 인목대비 또한 강력한 폐모론(廢母論)에 따라 1618년(광해군 10)에 결국 폐위되었다.

윤흔(尹昕)은 첩의 남동생이 강변칠우의 한 명인 서양갑(徐羊甲)이었던 까닭에, 이 사건과 연좌되어 파직되었을 뿐 아니라 7년 동안 폐서인(廢庶人)이 되었다.[「윤흔묘갈명」] 그 뒤 1620년(광해군 12) 무관직에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대북파가 장악하고 있던 조정에 나가지 않았다.

인조 시대 활동

1623년(인조 1) 서인의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 등을 거쳐 한성부좌윤(漢城府左尹)과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을 역임하였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그는 인조를 공주까지 호종(扈從)하였는데, 그 공으로 종2품상 가의대부(嘉義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윤흔묘갈명」] 1627년(인조 5)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자 인조가 강화도로 피난을 갔고, 이번에도 대가(大駕)를 호종하였는데, 오랑캐와 강화하는 것을 강력히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1628년(인조 6) 내자시(內資寺)제조(提調)가 되었다가, 1630년(인조 8) 예조 참판(參判)이 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6년 5월 27일],[『승정원일기』인조 8년 12월 15일] 이어 1631년(인조 9)에는 교자(轎子)를 탄 죄로 인하여 파직 당하였다가, 곧 강릉부사(江陵府使)에 임명되었다.[『승정원일기』인조 9년 5월 14일],[『승정원일기』인조 9년 8월 26일] 1632년(인조 10) 예조 참판으로서 인목대비의 국장도감(國葬都監) 제조(提調)가 되었고, 1635년(인조 13) 인열왕후(仁烈王后)의 국장(國葬)에도 참여하였다.(『인조실록』 10년 5월 11일),[『청음집(淸陰集)』]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인조를 따라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들어가서 오랑캐 군사와 싸웠는데, 그 공으로 정2품 하 자헌대부(資憲大夫)에 승품되고 중추부 지사(知事)에 임명되었다.[「윤흔묘갈명」] 그리고 1638년(인조 16) 12월 17일 병으로 서울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 75세였다.

저서로는 『계음만필(溪陰漫筆)』과 『도재수필(陶齋隨筆)』 등이 있다.

성품과 일화

윤흔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담담하고 번화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 명리(名利)의 성쇠에 욕심이 없었다. 날마다 단정하게 방에 앉아 도서를 좌우에 두고 읊고 저술하는데 몰두하였다. 친구를 사귐에 있어서 성실과 신의를 다하였는데, 친구의 사생(死生)이나 성쇠(盛衰)에 따라 그 태도가 달라지지 않았다. 만약 재앙이나 변란을 당하거나 나라에 비상한 사건이 있으면 즉시 글을 올려 자기의 소견을 곡진하게 아뢰었으며, 한만(閒漫)한 벼슬에 임용되었다고 하여 스스로 위축되지 않고 국가를 위하여 독실하게 정성을 쏟았다.[「윤흔묘갈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정민(靖敏)이다. 묘소는 황해도 장단(長湍) 동도(東道) 오음리(梧陰里)에 있는데, 홍서봉(洪瑞鳳)이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있다.[「윤흔묘갈명」]

첫째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양원도정(陽原都正)이혜(李譓)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두었다. 아들 윤취지(尹就之)는 연안부사(延安府使)이고, 딸은 양성현감(陽城縣監)유시경(柳時慶)의 처가 되었다. 둘째 부인 영월신씨(寧越辛氏)는 부제학(副提學)신응시(辛應時)의 딸인데 자손이 없다. 측실에서 1남 1녀를 두었으니, 아들 윤태지(尹泰之)는 관상감(觀象監)직장(直長)이고, 딸은 무과(武科)에 급제한 유지만(柳之蔓)의 처가 되었다.[「윤흔묘갈명」]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순조실록(純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종묘의궤(宗廟儀軌)』
  • 『후광세첩(厚光世牒)』
  • 『상촌집(象村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 『응천일록(凝川日錄)』
  • 『청음집(淸陰集)』
  • 『택당집(澤堂集)』
  • 『포저집(浦渚集)』
  • 『동춘당집(同春堂集)』
  • 『학곡집(鶴谷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