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장(國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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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과 왕후의 상장(喪葬) 의례.

개설

국장(國葬)은 왕이나 왕후의 장례(葬禮)일 때에만 쓰는 표현이다. 그에 비해 세자와 세자빈, 후궁, 대원군(大院君) 등의 장례는 예장(禮葬)이라 일컬었다. 전통시대 ‘예(禮)’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가 등급을 구분 짓는 것이기 때문에 왕실의 장례를 일컫는 명칭도 인물의 신분에 따라 달랐던 것이다. 조선후기에 편찬된 의궤의 서명에서 이런 구분을 가장 뚜렷하게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정조의 장례는 『정조국장도감의궤(正祖國葬都監儀軌)』라고 한 반면, 왕위에 오르지 못한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장례는『사도세자예장도감의궤(思悼世子禮葬都監都廳儀軌)』라고 하여 등급을 구별하였다.

연원 및 변천

흉례(凶禮)는 오례(五禮)의 하나로 조상(弔喪)이나 기근·재해 등에 대한 구휼(救恤) 등에 행하는 모든 의식 절차를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에서 중국의 흉례, 그 중 상례(喪禮)를 수용하였고, 고려와 조선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당나라 때에 이의부(李義府)·허경종(許敬宗)이 국가의 흉사(凶事)는 신하들이 말할 수 있는 바가 아니라고 하여 국장 기록 자체를 없애고 기록 또한 하지 않았고, 명나라 때 『대명집례(大明集禮)』를 편찬할 때까지 이러한 기조는 변화가 없었다. 따라서 신라 때 수용된 상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는 없지만, 『대당개원례(大唐開元禮)』에 수록된 당나라 관료들의 상례 과정이 남아 있어, 그 모습을 대강을 짐작해볼 수 있다. 관리들의 상례이지만 대체로 조선 왕실의 국장과 유사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신라 이후 고려에서 오례 중 흉례가 『고려사(高麗史)』에 실려 있고 국가의 장례인 국휼(國恤)이 항목으로 들어가 있다. 그러나 국휼에 관한 의식은 당나라처럼 제정하지 않았고,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면 임시로 고전을 참고하고 전례를 전용하여 일을 치렀으며, 일이 끝난 뒤에는 공식 기록으로 전하지 않았다. 그에 따라 고려의 왕실에서 국장 절차를 어떻게 진행했는지 정확하지 않다.

조선에 이르러서는 태종대에 처음 태조의 국장을 치렀고, 세종대에는 태종의 국장이 있었으며, 그 중간에 여러 왕과 왕후 등의 국장을 치르면서 유교적 상장 의례를 정비해 나갔고, 그 내용을 국가 전례서(典禮書)에 반영한 것이 1451년(문종 1)에 편찬된 『세종실록』「오례」의 흉례조였다. 이를 바탕으로 1474년(성종 5)에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의 흉례조는 『세종실록』「오례」의 그것과 거의 변화가 없었다. 이후 1744년(영조 20)에 『국조오례의』에 변화가 있거나 새롭게 추가된 전례를 정리하여 『국조속오례의(國朝續五禮儀)』가 편찬되었다.

『국조오례의』와 『국조속오례의』는 왕의 국장 위주로 정리되어 있기 때문에 세자나 세자빈의 예장이 발생했을 때 문제가 되었다. 이를 보완하기 위해 1752년(영조 28)과 1758년(영조 34)에 『국조상례보편(國朝喪禮補編)』이 편찬되었다. 특히 1758년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은 조선왕실의 상장 의례를 정비한 최종 결과물이었고, 이후에 편찬된 정조대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과 『춘관통고(春官通考)』에도 1758년에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을 수록하였다.

그러다가 1897년(광무 1)에 고종이 대한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면서 제후국에서 천자국으로 국체가 승격되었다. 그에 따라 1898년(광무 2) 연말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 『대한예전(大韓禮典)』이라는 국가 전례서를 편찬하였다. 다만, 여기에는 흉례 항목이 있으나 고려처럼 국장 절차를 싣고 있지 않다.

절차 및 내용

왕이 승하하면, 햇솜을 왕의 입과 코 사이에 얹어서 숨이 끊어졌는지를 확인한 뒤 안팎으로 곡하였다. 내시(內侍)는 왕이 평소 입던 웃옷을 매고 지붕에 올라가 왕의 몸에서 떠난 혼(魂)을 다시 돌아오라고 불렀다. 이어 왕의 시신을 목욕시키고, 사자(死者)에게 일체의 의복(衣服)을 갈아입히는 습(襲)을 행하였다. 시신에 옷을 입혀[衣衾] 이불로 싸는 예식[收斂]인 소렴(小斂), 시신을 입관하는 대렴(大斂)을 마친 뒤, 왕 혹은 왕비의 시신을 안치한 관(棺)인 재궁(梓宮)빈전(殯殿)에 봉안하였다. 빈전은 별도의 전각을 새로이 짓지 않고 기존에 있던 전각 중에서 택해서 사용하였고, 빈전 이름도 별도로 정하지 않았다. 재궁은 이후 발인 때까지 빈전에 봉안되어 있었다. 이어서 새 왕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새 왕과 신하들은 승하한 전 왕의 묘호(廟號)·시호(諡號)·능호(陵號)·전호(殿號)를 정하였다. 묘호는 승하한 왕의 신위를 종묘에 봉안할 때 일컫는 칭호이다. 시호는 죽은 뒤 이름을 대신하여 부르는 명칭이다. 능호는 왕릉의 명칭이고, 전호는 혼전의 전각 이름을 가리킨다.

왕이 승하하고 5개월째 되는 그달에, 빈전에 봉안되어 있던 재궁을 왕의 상여인 대여(大轝)에 싣고 궁궐을 떠나 장지인 산릉으로 이동하였다. 산릉에서 재궁을 내리고, 명주나 모시로 접어서 만든 임시 신주인 혼백(魂帛)을 봉안하기 위해 임시로 가설한 길유궁(吉帷宮)에서 신주에 글을 썼다. 이때 신주를 우주(虞主)라고 하는데, 뽕나무로 만들었다.

신주에 글을 쓴 뒤, 산릉에서 우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혼전에 봉안하였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종묘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을 위한 별도의 전각을 건립하지 않고 기존에 있던 전각 중에서 택하였는데, 주로 편전에 마련하였다. 혼전은 빈전과 달리 별도의 이름이 있었는데, 왕과 대신들이 함께 논의해서 결정하였다. 예컨대, 정조의 혼전은 ‘효원전(孝元殿)’, 숙종의 혼전은 ‘효령전(孝寧殿)’이라고 한 것과 같다.

혼전에 우주를 봉안한 때부터 혼을 편안하게 하는 우제(虞祭)를 지냈다. 조선 왕은 제후에 해당하므로 우제를 일곱 번 지냈다. 초우제(初虞祭)는 일반적으로 장례 지낸 날에 거행하고, 제이우(第二虞)부터 제육우(第六虞)까지는 유일(柔日)에, 제칠우(第七虞)는 강일(剛日)에 지냈다. 유일은 간지에 을(乙)·병(丁)·기(己)·신(辛)·계(癸), 강일은 갑(甲)·병(丙)·무(戊)·경(庚)·임(壬)이 들어간 날이었다. 칠우제를 지낸 뒤 졸곡제(卒哭祭)를 지냈다. 졸곡제를 지내면서 그동안 수시로 곡하던 것을 그치고 아침저녁으로 혼전에서 상식(上食)할 때만 곡하였다.

왕이 승하한 지 1년이 되는 첫 번째 기일에 연제(練祭)를 지냈다. 연제는 소상(小祥)이라고도 하였다. 그런데 연제를 지내기 하루 전에 신주를 교체하는 절차를 거행하였다. 그동안 혼전에 우주를 봉안하고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밤나무로 만든 연주(練主)로 바꾸었다. 이 연주가 바로 최종적으로 종묘 정전에 봉안되는 신주다.

왕의 승하 후 두 번째 기일에 대상제(大祥祭)를 지냈다. 대상제를 지낸 후 1개월을 건너 뛴, 승하한 지 27개월이 되는 때 담제(禫祭)를 지내고서 마침내 상복을 벗었다. 그러고 나서 종묘 정전에 신주를 봉안함으로써 왕의 삼년상을 마쳤다.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국조오례통편(國朝五禮通編)』
  • 『춘관통고(春官通考)』
  • 『대한예전(大韓禮典)』
  • 강문식·이현진, 『종묘와 사직』, 책과함께, 2011.
  • 이현진, 「영조대 왕실 喪葬禮의 정비와 『국조상례보편』」, 『한국사상사학』37, 2011.
  • 이현진,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 『서울학연구』43, 2011.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국장 절차와 의미」, 『태동고전연구』27, 2011.
  • 채미하, 「신라 凶禮 수용과 그 의미」, 『한국사상사학』42,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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