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사형(魚史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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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47년(인조 25)~1723(경종 3) = 77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경종(景宗)때의 문신.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돈녕부(敦寧府)동지사(同知事),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 등을 역임하였으며,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자는 자평(子平)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를 지낸 어진익(魚震翼)이고, 어머니 원주 원씨(原州元氏)는 통사랑(通仕郞)원빈(元玭)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경기좌수운판관(京畿左水運判官)을 지낸 어한명(魚漢明)이며, 증조할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어몽린(魚夢麟)이다. 경종(景宗)의 계비(繼妃)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할아버지이기도 하다.

숙종 시대 활동

어사형(魚史衡)은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다가, 1698년(숙종 24) 음보(蔭補)로 선공감(繕工監) 감역(監役)에 임명되었다. 그 해 겨울에 장릉(莊陵)의 복위(復位)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였는데 장릉복위설도감차 겸 별공작(莊陵復位設都監差兼別工作)에 임명되었고, 이 일에 공을 세워 6품으로 승진되었다. 이듬해인 1699년(숙종 25)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자형(姊兄)인 이유(李濡)가 의금부 지사(知事)가 되자 일정 범위 내의 친척이 같은 관청 혹은 통속 관계에 있는 관청에서 근무할 수 없게 한 상피제(相避制)에 따라 체임되었다. 그리고 그 해 가을 의영고(義盈庫)주부(主簿)에 임명되었다.[『기원집(杞園集)』「선고한성부우윤증영의정부군묘지(先考漢城府右尹贈領議政府君墓誌) 이하 「어사형묘지」로 약칭」]

1700년(숙종 26) 신계현령(新溪縣令)이 되었는데, 이때 그는 부역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줄여 주어 실질적인 혜택이 백성에게 미치도록 하였으며, 사무 집행은 엄중하고 면밀하게 하였다. 아울러 군무(軍務)를 수리하고 다듬은 공을 인정받아 표리(表裏)를 하사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노력 덕에 1702년(숙종 28) 그가 신계현령에서 물러나자 신계 지역 백성들은 그를 위한 비(碑)를 세워 그 덕을 칭송하였다. 같은 해 가을 훈련도감(訓鍊都監)의 낭관(郎官)이 되었으며, 이듬해인 1703년(숙종 29)에는 양근군수(楊根郡守)가 되었다. 이때 어사형은 신계현(新溪縣)에서처럼 고을을 잘 다스렸으며, 특히 흉년으로 백성들의 삶이 어려워지자 그 극복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1705년(숙종 31)에 사직하여 체임되었으나 이듬해인 1706년(숙종 32) 다시 금오랑(金吾郞)에 임명되어 대궐 안에서 죄인을 심문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이후 서관(西關)으로 나갔다가 전생서(典牲署)주부(主簿)가 되었으며, 얼마 후에는 장악원(掌樂院)첨정(僉正)으로 자리를 옮겼다.[「어사형묘지」]

1708년(숙종 34) 강화부경력(江華府經歷)에 임명되었고, 이어 1710년(숙종 36) 인천부사(仁川府使)로 임명되었는데 부임한 지 몇 달 만에 구가(謳歌)와 옥송(獄訟)이 넘치는 바람에 그 해 겨울 벼슬에서 물러났다. 1712년(숙종 38)에는 군기시(軍器寺)부정(副正)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인 1713년(숙종 39)에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에 올랐다. 1716년(숙종 42) 70세가 되어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고, 1718년(숙종 44)에는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가 오위장(五衛將)이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44년 윤8월 12일, 「어사형묘지」] 이해 가을 차남 어유구(魚有龜)의 4녀가 왕세자빈(王世子嬪 : 훗날 선의왕후(宣懿王后))으로 책봉(冊封)되면서 그해 겨울 돈녕부 도정(都正)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1719년(숙종 45)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으며, 이어 돈녕부 동지사에 임명되었다.[「어사형묘지」]

경종 시대 활동

1720년(경종 즉위년) 6월 손녀가 중전의 자리에 오르고 차남 어유구가 돈녕부 영사(領事)가 되자 어사형은 돈녕부의 직함에서 해임되었다. 이듬해인 1721년(경종 1)에 장예원(掌隷院)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는데, 분수에 맞지 않은 직임이라고 여겨 여러 차례 사양한 끝에 체임되었다.[「어사형묘지」] 1722년(경종 2) 한성부우윤에 임명되어 재직하던 가운데, 1723년(경종 3) 6월 병에 걸려 그해 7월 3일 사망하였으니, 향년 77세였다.[『경종실록(景宗實錄)』경종 2년 5월 16일, 경종 3년 7월 4일]

일화와 성품

어사형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어사형은 식견과 사려가 두루 통달하여 일을 만나면 그 자리에서 분변하였고 경위(經緯)가 주도면밀하였으며 지키는 바가 확실하여 한번 정하면 흔들리지 않았다. 다만 여러 차례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여 50여 년을 침체되어 있다가 뒤늦게 음직으로 관직에 임명되어 그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누이와 우애가 돈독하여 모두 70세의 노인이 되서도 어머니를 모시며 매번 좋은 계절을 만나면 장수를 경하하면서 단란하게 모여 늙은 자식들이 새 옷을 입고 기쁘게 해드리니, 다른 사람들이 노래자(老萊子 : 중국의 유명한 효자)의 옛일을 오늘날에 다시 보는 듯하다고 하였다.

본인은 비록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였으나 자제에 대한 교육은 평소 엄격하여 짧은 시간이라도 방탕하게 노는 것을 두고 보지 못하였다. 이에 아들 셋이 모두 생원과 진사시 혹은 문과에 합격하여 주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묘소와 후손

어사형의 묘소는 경기도 풍덕군(豊德郡) 망포(望浦) 묘원에 있고, 장자 어유봉(魚有鳳)이 쓴 묘지명이 남아 있다.

부인 전주 유씨(全州柳氏)는 승정원 승지유거(柳椐)의 딸이며 자녀는 3남 1녀를 두었다. 장남은 사헌부(司憲府)집의(執義)어유봉이고, 차남은 돈녕부 영사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어유구이며, 삼남은 낭천현감(狼川縣監)어유붕(魚有鵬)이다. 딸은 보은현감(報恩縣監)김순행(金純行)에게 시집갔으나 일찍 죽었다. 차남 어유구의 넷째 딸이 경종의 계비 선의왕후이다.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경종실록(景宗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기원집(杞園集)』
  • 『농암집(農巖集)』
  • 『기봉집(碁峯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