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익(魚震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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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25(인조 3)∼1684(숙종 10) = 60세]. 조선 중기 현종(顯宗)~숙종(肅宗) 때의 문신. 형조 참의(參議)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 등을 지냈다. 자는 익지(翼之)이고, 호는 겸재(謙齋)이다.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경기좌수운판관(京畿左水運判官)을 지낸 어한명(魚漢明)이고, 어머니 안동 권씨(安東權氏)는 권숙(權俶)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동몽교관(童蒙敎官)을 지낸 어몽린(魚夢麟)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평창군수(平昌郡守)를 지낸 어운해(魚雲海)이다.

효종~현종 시대 활동

1652년(효종 3)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658년(효종 9)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가 되고, 이후 내자시(內資寺)직장(直長)과 호조 좌랑(佐郞)이 되었다.[『한수재집(寒水齋集)』 권24 「관찰사어공신도비명(觀察使魚公神道碑銘)」 이하 「어진익신도비명」으로 약칭] 그러던 가운데 1662년(현종 3) 정시(庭試)문과(文科)대책(對策)으로 합격하여 병조 좌랑과 병조 정랑(正郞), 함경도도사(咸境道都事)와 성균관(成均館)직강(直講)을 차례로 역임하였다.[『방목(榜目)』, 「어진익신도비명」] 1665년(현종 6)에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는데, 이때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이무(李堥)가 허적(許積)은 우의정에 적합하지 않은 인물인데 직임을 맡겼다고 논핵한 것 때문에 파직되었다.[『현종실록(顯宗實錄)』현종 6년 1월 3일, 현종 6년 1월 21일, 현종 6년 1월 22일] 이에 어진익(魚震翼)은 동료들과 함께 항쟁(抗爭)을 하였으나, 이를 남인(南人)에 대한 서인(西人)의 공격으로 파악한 현종의 진노를 사서 삭직되었으며, 함경도 부령(富寧)으로 유배되었다.[『현종실록』현종 6년 1월 23일, 현종 1월 27일, 현종 6년 1월 26일] 영의정정태화(鄭太和)와 좌의정홍명하(洪命夏) 등의 대신과 간관(諫官)의 변호로 현종의 화가 누그러진 후에 어진익은 다시 사헌부 지평에 기용되었다.[『현종실록』현종 6년 1월 27일, 현종 6년 3월 10일,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현종 6년 1월 26일, 현종 6년 1월 28일, 현종 6년 2월 4일, 현종 6년 2월 23일] 이후 유배 중이던 윤선도(尹善道)를 감형하여 이배(移配)하라는 왕명을 취소해 줄 것을 요청하였으며, 이듬해인 1666년(현종 7)에는 1659년(현종 즉위년) <1차 예송논쟁(禮訟論爭)> 당시 서인 송시열(宋時烈)이 주장한 복제(服制)가 잘못된 것이라고 헐뜯어 무함하였다며 남인 유세철(柳世哲)을 논핵하였다.[『현종실록』현종 6년 3월 22일, 현종 7년 3월 25일, 『현종개수실록』현종 6년 3월 27일, 현종 7년 3월 25일, 「어진익신도비명」] 이어 그해 7월 사간원 정언에 임명되었다가, 1667년(현종 8)에 정계(停啓)하는 일에 연관되어 면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7년 7월 24일]

1669년(현종 10)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다가 영해부사(寧海府使)정승명(鄭承明)을 사실과 다른 내용으로 논핵하였다고 하여 체직되었다.[『현종실록』현종 10년 6월 20일, 현종 10년 7월 27일] 그리고 얼마 안 되어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으나, 삭거사판(削去仕版)의 형률을 시행하고자 한 것이 물의를 빚어 바로 물러나게 되었다.[『현종실록』현종 10년 8월 30일, 현종 10년 9월 3일] 1670년(현종 11) 사간원 정언에 제수되었으나, 이 해에 모친상을 당하였다.[『현종실록』현종 11년 2월 19일, 「어진익신도비명」] 1672년(현종 13) 다시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현종이 상소를 올린 이민적(李敏迪)에 대해 임금의 특명으로 그를 외직에 보임시키면서 당일로 발견(發遣)하라는 명을 내리는 일이 있었다. 그러자 어진익이 “이민적이 소장을 올리자마자 견벌(譴罰)을 바로 하여 빨리 발견하도록 재촉하시니, 이는 사람을 내쫓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라고 하고, 또 “근래에는 제신(諸臣)들의 상소한 내용이 조금이라도 상신(相臣)에게 관계가 되면 찬출(竄黜)이 잇따라서 조정이 거의 텅 빌 지경이니, 전하께서 장차 국사(國事)를 어디에 두시려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현종이 크게 노하여 그를 파직시켰다.[『현종실록』현종 13년 7월 8일, 『현종개수실록』현종 13년 7월 8일] 그러나 정치화(鄭致和), 김수항(金壽恒) 등이 다시 복직시킬 것을 청하여 이내 사헌부 장령에 제수되었다.[『현종실록』현종 13년 4월 22일]

1673년(현종 14)에는 사복시(司僕寺) 정과 세자시강원 사서 및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역임하고 사간원 헌납(獻納)으로 옮겼다.[『현종실록』현종 14년 3월 13일] 이듬해인 1674년(현종 15)에는 사간원 사간(司諫)과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이 되었는데, 이때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의 복제 문제로 <2차 예송논쟁>이 벌어지자 윤휴(尹鑴) 등의 남인을 공격하다가 동래부사(東萊府使)로 좌천되었다.[『현종실록』현종 15년 1월 3일, 현종 15년 5월 16일, 현종 15년 7월 22일]

숙종 시대 활동

숙종이 왕위에 오른 후에도 어진익은 동래부사로 재직하면서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동래성 전투>에서 창의순절(倡義殉節)한 김정단(金廷端)과 송계남(宋繼男) 등 24인의 후손 가운데, 천역(賤役)에 종사하는 자는 역을 면제시키고 정병(正兵)은 군관으로, 유학(幼學)과 교생(校生)은 본도에서 재능을 시험해 기용할 것을 요청해 실시하게 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년 5월 25일] 1677년(숙종 3) 형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마침 가뭄을 만나 죄인을 심리(審理)할 때에, 유배된 이세필(李世弼) 등을 석방해야 한다고 진술하고 연석(筵席)에서 강력히 쟁론하며 시의(時議)에 크게 거슬렸다가 마침내 다른 일로 견책을 받고 파직되었다.[「어진익신도비명」]

그 후 1678년(숙종 4) 동래부사로 재직할 때 왜관(倭館)을 옮기는 비용을 낭비했다 하여 파직되어 고양(高陽)에 유배되었다.[『숙종실록』숙종 4년 1월 18일] 곧 풀려나 이듬해에는 여주목사(驪州牧使)가 되었고, 1681년(숙종 7)에는 공청도관찰사(公淸道觀察使)가 되었으나, 박태손(朴泰遜)으로 인하여 체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7년 1월 19일, 숙종 7년 2월 13일, 『송자대전(宋子大全)』 부록 권8 「연보(年譜)」] 그러자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어진익은 권간(權奸)이 임금을 속이던 때에 우뚝 서서 흔들리지 않는 지조가 있었는데, 지금 남이 말한 것 때문에 사체되니, 신은 그윽히 애석하게 여깁니다. 바라건대, 대신(大臣)에게 물어서 다시 앞서 내린 관직 임명을 거듭 내리시어 어진익으로 하여금 그대로 버려진 인재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라고 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7년 2월 13일] 그리하여 이 해에 광주목사(光州牧使)와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취임하지 않았으며, 이듬해인 1682년(숙종 8) 승정원 승지에 제수되었다.[『숙종실록』숙종 8년 1월 18일, 「어진익신도비명」]

1683년(숙종 9)에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 이때 그는 요역을 균등히 하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을 임무로 삼았는데, 일을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병이 위중해져 해면을 요청하였다.[『숙종실록』숙종 9년 5월 26일, 「어진익신도비명」] 이듬해인 1684년(숙종 10)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으나, 이해 8월 25일에서 세상을 떠났으니, 향년 60세였다.[『숙종실록』숙종 10년 3월 10일, 「어진익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어진익의 성품과 자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그는 어려서부터 글을 잘 지어 15세가 되었을 때에 기예와 학업에 대한 명성이 높았다. 항상 무슨 일을 만나더라도 과감하게 거리낌이 없이 말을 하였으며, 비록 임금의 엄한 견책을 받더라도 지조는 더욱 확고하였다. 외직으로 나가서는 너그럽게 백성들을 대하였고, 청렴하고 신중하게 몸을 단속하였으며, 삼가고 힘써 법을 지키어 오직 자신의 직분만을 충실히 수행하였다.[「어진익신도비명」]

남보다 뛰어나게 총명하고 문재(文才) 또한 뛰어나서 사부(詞賦)를 짓는 데 있어 붓만 들면 막힘이 없이 써 내려갔고, 또 초서(草書)예서(隸書)를 잘 썼으나, 본래 겸손하여 일찍이 시부나 글씨에 능하다고 자처하지 않았다. 또 조용히 스스로를 지키고 출세의 길을 좇아 달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한때의 명류(名流)들이 모두 그를 향모(向慕)하였는데, 민정중(閔鼎重)과 이민서(李敏敍), 이단하(李端夏) 등과 친밀하게 교류하며 지냈다.[「어진익신도비명」]

동래부사 재직시 당시 왜인들이 불법을 자행함으로써 남방에 대한 근심이 한창 많았는데, 전(前) 부사권대재(權大載)는 가혹한 정사를 펼쳤던 반면, 어진익은 너그러움으로 대신하니 위엄과 은혜가 아울러 행해져서 변경이 편안하였다. 2년간 그곳을 다스리는 동안에 절의 있는 이를 포창하고 군졸을 훈련시켰으며 낭비를 줄이고 백성의 고통을 구제해주었다. 이에 백성에게 은혜가 깊었다는 명성이 넘쳐흐르고 백성과 오랑캐들이 서로 다투어 칭송하였다.[「어진익신도비명」]

평상시에는 효우(孝友)하고 돈목(敦睦)하여, 홀로 된 누이가 연로하여 병들자 그를 모셔다가 봉양하였으며, 여러 아우들과 의식(衣食)을 분담해서 누이의 자녀들을 결혼시켰다. 이러한 마음이 주변 친인척들에게까지 미치어 빈궁한 이들은 반드시 구휼하고, 재(才)와 선(善)을 장려하여 성취시켰으므로, 모두가 그의 덕에 감복하였다. [「어진익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어진익의 묘소는 경기도 고양(高陽)의 선영 곁에 있었는데, 1710년(숙종 36)에 경기도 풍덕(豐德)의 망포리(望浦里)로 천장(遷葬)하였으며, 부인 원주 원씨(原州元氏)와 합장하였다. 권상하(權尙夏)가 쓴 신도비명이 남아있다.

부인 원주 원씨는 통사랑(通仕郞)원빈(元玭)의 딸인데, 타고난 자품이 단장(端莊)하고 정순(貞順)하여 효성과 공경으로 시부모를 섬기고 동서들 사이에 처해서나 여러 조카들을 무양(撫養)하는 데 있어 매우 서로 화목하였다. 자녀는 1남 2녀는 두었다. 아들은 한성부우윤어사형(魚史衡)이고, 장녀는 영의정이유(李濡)에게, 차녀는 참판(參判)이의현(李宜顯)에게 시집갔다. 어사형의 차남이 경종(景宗)의 계비(繼妃)인 선의왕후(宣懿王后)의 아버지 어유구(魚有龜)이다.[「어진익신도비명」]

참고문헌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사마방목(司馬榜目)』
  • 『서계집(西溪集)』
  • 『송자대전(宋子大全)』
  • 『한수재집(寒水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