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락(申景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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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6년(명종 11)∼1615년(광해군 7) =60세.] 조선 중기 선조~광해군 때의 문신. 자는 사중(士中)이고, 호는 송촌(松村)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지냈고, 증직(贈職)은 이조 판서이다. 아버지는 한성부 서윤(漢城府庶尹)신단(申湍)이고, 어머니 온양 정씨(溫陽鄭氏)는 좌의정(左議政)정순붕(鄭順朋)의 딸이다. 영의정(領議政)신숙주(申叔舟)의 6대손이고, 참찬(參贊)신준(申浚)의 5대손이다.

선조 시대 활동

1585년(선조 18) 사마시(司馬試) 생원과(生員科)에 3등으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여 공부하면서, 과거 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落榜)을 거듭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관군이 왜군(倭軍)을 물리치지 못하였으므로, 각지에서 의병(義兵)과 승병(僧兵)이 일어나서 왜군을 막았다. 그때 승통(僧統)휴정(休靜)의 제자 승장(僧將) 의엄(義嚴)이 수천 명의 승병(僧兵)을 이끌고 황해도 구월산(九月山)에서 왜군을 격퇴하였는데, 승장 의엄은 그 공(功)을 믿고 조정의 관리들에게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이에 성균관 유생(儒生)들이 상소하여 그 죄를 추국(推鞫)할 것을 청하였는데, 선조가 곧 이를 윤허하였다. 유생 신경락이 그 상소를 짓고 또 수소(首疏)가 되었다. 소수는 소두(疏頭) 곧 상소의 첫머리에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당시 신경락의 명망(名望)이 성균관에서 으뜸이었으므로, 성균관에서 그를 천거하여 의금부(義禁府)도사(都事)에 임명되었다.[「신경락 비명(申景洛碑銘)」]

1600년(선조 33) 이후로 사옹원(司饔院)에서 직장(直長) · 전생서(典牲署)주부(主簿)를 역임하고, 사헌부(司憲府)에서 감찰(監察)을 지내다가, 충청도연기 현감(燕岐縣監)으로 나갔다.[「신경락 비명」] 1604년(선조 37) 10월 충청도 어사(御史)김정일(金鼎一)이 충청도 지방을 염찰(廉察)하고 선조에게 보고하기를, “연기 현감신경락은 성품이 자상하여 백성들을 돌보는 데 정성을 쏟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표리(表裏) 1벌을 하사하였다.[『선조실록』선조 37년 10월 1일] 1605년(선조 38) 증광시(增廣試)문과(文科)에 응시하여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50세였다.[『방목』] 과거에 급제한 이후에 선조 말년에 호조와 형조의 좌랑(佐郞)을 거쳐, 성균관에 들어가서 직강(直講) · 사예(司藝) · 사성(司成)을 차례로 맡았다. 그 뒤에 내자시(內資寺)정(正) · 군자감(軍資監) 정을 거쳐, 장악원(掌樂院)의 정이 되어 음악을 정비하였다. 또 종부시(宗簿寺) 정 · 군기시(軍器寺) 정을 거쳐,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필선(弼善) · 세자시강원 보덕(輔德)에 임명되어, 세자 광해군(光海君)을 가르쳤다. 이때 광해군이 그의 학문과 인품을 남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하여 줄곧 신임하게 되었다.

광해군 시대 활동

1608년 2월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광해군 초기에 양사(兩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쳤다. 사헌부의 지평(持平) · 장령(掌令) · 집의(執義) 등을 역임하고,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 · 사간(司諫)을 역임하였다.[「신경락 비명」]

1609년(광해군 1) 사헌부 집의로 있을 때 대사헌김상용(金尙容)과 뜻이 맞지 않아서 피혐(避嫌)하다가, 파직되었다. 당시 대북(大北)의 정인홍(鄭仁弘) · 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고 대관(臺官)을 움직여 중요한 정책을 건의하거나 반대하게 하였는데, 신경락이 이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헌부와 사간원의 양사(兩司)의 대관들이 모여서 중요한 문제를 의논하고 동료 사이에 서신으로 회람(回覽)하여 서로 의견을 조절하는데, 대관의 동료 간에 서로 서신을 회람하는 것을 간통(簡通)이라고 한다. 대간은 간통에 대하여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없는데, 만약 다른 의견이 있으면, 피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때 사간원에서 광해군에게 아뢰기를, “대체로 대관은 서로 모이기 전에는 간통하지 않는 것이 예입니다. 같이 모여 일을 의논한 동료로 하여금 차례대로 간통하게 하는데, 깜빡 잊어버리거나 소홀하게 취급하여 중간에서 전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미리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사헌김상용은 출사(出仕)하게 하고, 지평신경락은 체직(遞職)하도록 할 것을 주장하니, 광해군이 그대로 따랐다.[『광해군일기』광해군 1년 12월 14일] 또 1610년(광해군 2) 사헌부 장령이 되었을 때 호패(號牌)를 중지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대사간이이첨과 서로 대립하다가, 또 파직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2년 12월 28일 · 12월 29일]

1611년(광해군 3) 사간원 헌납(獻納)과 장령을 거쳐 1612년(광해군 4)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3년 6월 2일 · 6월 3일 · 8월 26일, 광해군 4년 9월 15일] 1613년(광해군 5)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었다가, 사간원 사간이 되었다.[『광해군일기』광해군 5년 3월 4일 · 윤11월 7일] 1614년(광해군 6) 동부승지(同副承旨)가 되었다.[『광해군일가ㅣ』광해군 6년 6월 5일] 광해군이 그를 신임하여 승지로 데리고 있으려고 하였으나, 대북의 이이첨에 의하여 곧바로 쫓겨나서, 1614년(광해군 6) 충청도 홍주목사로 나갔다. 1615년(광해군 7) 12월 10일 병으로 홍주의 목사 관사(館舍)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0세였다.

성품과 일화

신경락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그의 비명에 다음과 같이 전한다.[「신경락 비명」] 그는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후덕하여 모난 점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중대한 일에 임해서는 우뚝하게 서서 남이 감히 하지 못하는 일을 곧잘 해냈다.

광해군 시대 이이첨 · 정조(鄭造)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하고자 하였다. 신경락은 집의가 되어 동료들에 앞장서서 정조를 논척(論斥)하면서 윤리 기강이 크게 무너졌다고 극간(極諫)하였는데, 그 말이 매우 적절하고 옳았다. 광해군이 그의 바른 논의를 꺼려한 나머지 비록 매우 노하였으나 그에게 벌을 내리지 않았으나, 대비를 폐지하자는 북인(北人)들의 논의가 이로 말미암아 한때 중지되었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의리(義理)에 합당하게 행동했을 뿐이고 자기 자신의 화복(禍福)은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에 검소하고 소박한 것을 숭상하여 집안 살림에 간여하지 않았고, 조용한 가운데 스스로를 지키면서 남과 교유(交遊)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일찍이 두 고을의 수령관으로 있으면서 정무(政務)를 잘 시행하여 백성들에게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송산(松山)의 선영에 있는데, 동명(東溟)정두경(鄭斗卿)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 있다.[「신경락 비명(申景洛碑銘)」] 홍주에서 객사(客死)하였으므로 반장(返葬)하여 1616년(광해군 8) 4월에 선영에 모셨다. 그때 비변사(備邊司)에서 홍주목사로 재임할 때 정사(政事)가 뛰어났다고 하여,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되었고 그 후에 아들 신육(申淯)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참여하게 되어서, 이로 말미암아 이조 판서에 추증되었다.[「신경락 비명」]

첫째 부인 제주 고씨(濟州高氏)는 부정(副正)고경류(高景柳)의 딸인데, 자녀는 1녀를 낳았으니, 딸은 군수(郡守)구심(具瀋)에게 시집갔다. 둘째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별제(別提)윤기무(尹起畝)의 딸인데, 자녀는 3남 1녀를 낳았다. 아들은 신육(尹淯) · 신숙(申洬) · 신절(申瀄)이고, 딸은 이직(李稷)에게 시집갔다.[「신경락 비명」]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속잡록(續雜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
  • 『정무록(丁戊錄)』
  • 『감수재집(感樹齋集)』
  • 『가휴집(可畦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