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준(申浚)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총론

[1444년(세종 26)∼1509년(중종 4) = 66세.] 조선 중기 성종~중종 때의 문신. 이조 판서를 지냈으며 봉작은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이고, 시호는 소희(昭僖)다. 자는 언시(彦施)이고, 호는 나헌(懶軒)이다. 본관은 고령(高靈)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 신숙주(申叔舟)영의정(領議政)이고, 어머니 무송 윤씨(茂松尹氏)는 경상도 수사(慶尙道水使)윤경연(尹景淵)의 딸이고, 집현전(集賢殿)부제학(副提學)윤회(尹淮)의 손녀이다. 신숙주의 8남 1녀 중에서 다섯째 아들이다. 도승지(都承旨)신정(申瀞)의 동생이고, 좌의정(左議政)신용개(申用漑)의 숙부이다.

성종 시대 활동

1470년(성종 1) 나이 27세에 별시(別試)문과(文科)에 갑과(甲科) 1등 장원(壯元)으로 급제하였다.[『방목』] 정3품상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승품(陞品)되고 병조 참지(參知)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년 10월 25일] 1471년(성종 2) 성종의 즉위에 공훈이 많다고 하여 좌리공신(佐理功臣) 4등에 책훈(策勳)되었는데,[『이요정집(二樂亭集)』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高陽府院君申公墓誌銘)」] 아버지 신숙주가 원상(院相)으로서 세조의 왕비 자성대비(慈聖大妃: 정희왕후)와 상의하여 성종을 세우는 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472년(성종 3) 충청도 수군 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에 임명되었는데, 성종이 글을 내려서 조운(漕運)할 때 배가 전복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명하였다.[『성종실록』성종 3년 3월 14일] 1475년(성종 6) 아버지 신숙주의 상을 당하여 양주(楊州)의 선영(先塋)에 모시고 송산리(松山里)의 무덤 곁에 여막(旅幕)을 짓고 형제들과 함께 여묘살이를 3년 동안 하였다.

1477년(성종 8) 3년 상례를 마치자, 승정원(承政院)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고, 우승지(右承旨) · 좌승지(左承旨)를 거쳐 마침내 도승지(都承旨)에 영전되었다.[『성종실록』성종 8년 8월 15일 · 8월 17일 · 12월 19일, 『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아버지 신숙주가 영의정으로 있을 때 둘째형 신면(申㴐)과 넷째형 신잠(申潛)이 도승지를 지냈는데, 신준은 아버지가 돌아가고 난 다음에 도승지가 되었다. 조선조 5백여 년 동안에 3형제 도승지도 없었을 뿐더러 아버지 영상과 아들 도승지도 매우 드물었다.

1478년(성종 9) 호조 참판(參判)에 임명되었고,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품되고 고양군(高陽君)에 봉해졌다. 1480년(성종 11) 이조 참판으로 옮기고, 의금부(義禁府)동지사(同知事)를 겸임하였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중국 명(明)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태자(太子)의 생신을 하례하고 돌아왔다.[『성종실록』성종 11년 8월 19일] 1481년(성종 12) 의주(義州)의 선위사(宣慰使)에 임명되어 의주에 가서 중국 명나라 사신을 맞아서 접대하였다.[『성종실록』성종 12년 5월 1일]

1482년(성종 13) 종2품상 가정대부(嘉靖大夫)에 승품되고, 충청도 관찰사가 되었다.(『성종실록』 성종 13년 2월 21일) 1483년(성종 14) 예조 참판에 임명되고,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의 품계로 특진되어 고양군에 봉해지고,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도총관(都摠管)이 되었다. 1484년(성종 15) 영안도 관찰사(永安道觀察使)에 임명되었는데, 영흥부윤(永興府尹)을 겸임하였다.[『성종실록』성종 15년 4월 2일] 임기가 만료되자, 1486년(성종 17)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에 임명되었다가, 중추부(中樞府)지사(知事)를 거쳐, 이조 판서가 되었다.[『성종실록』성종 17년 3월 2일 · 5월 20일 · 9월 29일, 『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1487년(성종 18) 공조 판서로 옮겼다. 1492년(성종 23)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어, 경연(經筵)지사(知事)를 겸임하였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평안도 관찰사에 임명되었는데, 몸에 병이 있어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성종에게 아뢰어 사직을 청하니, 성종이 허락하였다.[『성종실록』성종 23년 4월 27일 · 5월 3일] 1494년(성종 25) 사은사(謝恩使)에 임명되어, 부사(副使)중추부 첨지사(僉知事)왕종신(王宗信)과 함께 표문(表文)과 전문(箋文)을 받들고 중국 명나라 북경에 가서 명나라에서 본국(本國)의 표류인(漂流人)을 돌려보내 준 것을 사례하였다.[『성종실록』성종 25년 8월 19일 · 10월 1일]

연산군~중종 시대 활동

1495년(연산군 1) 신준은 다시 사은사로 중국을 다녀오면서 면창(面瘡)을 치료하는 약(藥)을 구하여 가지고 와서 방문(方文)까지 아울러 바쳤다. 연산군이 이 약을 우선 다른 사람에게 먼저 징험해 보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20세의 연산군이 얼굴에 부스럼을 앓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공조 판서로 있다가 1497년(연산군 3) 형조 판서로 옮겨서, 경연의 지사를 겸임하였다.[『연산군일기』연산군 1년 1월 8일, 연산군 3년 11월 14일] 1498년(연산군 4) 여름에 사헌부 대사헌(大司憲)에 임명되었고, 가을에 세 번째로 공조 판서가 되었다가, 한성부 판윤으로 자리를 옮겼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1499년(연산군 5) 의정부 우참찬으로 있으면서, 좌의정한치형(韓致亨), 우의정(右議政)성준(成俊), 좌찬성(左贊成)이극균(李克均), 우찬성(右贊成)박건(朴楗) 등과 함께 언로의 개방, 공정한 상벌 등을 주장한 시무(時務) 10조를 연산군에게 진언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의정부 좌참찬(左參贊)이 되었다.[『연산군일기』연산군 5년 3월 27일, 연산군 7년 5월 12일] 1506년(연산군 12) 좌찬성(左贊成)으로 승진하였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1506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자, 이에 적극 가담하지 않았으나, 정국공신(靖國功臣) 3등에 책훈되고, 정1품하 보국 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로 승품되고, 고양 부원군(高陽府院君)에 봉해졌다.(『중종실록』 중종 1년 9월 13일 · 9월 14일) 1509년(중종 4) ) 7월 11일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향년이 66세였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성품과 일화

그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내외(內外)가 문벌(門閥)이었으나 젊어서부터 교만한 습속이 없었고, 성품은 포용력이 있었으며 원대한 기개가 있었다. 성품이 관후(寬厚)하고 순수하며 성실하였다. 남과 대할 때는 천진스러워 교만한 꾸밈이 없었으므로 지나치게 까다롭고 결백한 것을 현명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젊은 나이에 귀하고 현달하여 중외(中外)의 직책을 두루 거쳤고, 중임(重任)을 여러 차례 맡기도 하였지만 재난(災難)을 당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버지 신숙주가 일찍이 네 번이나 공신이 되었는데, 아들 신준도 능히 그 유업(遺業)을 계승하여 두 번이나 공신이 되면서 관직이 정1품 찬성에 올랐으니, 능히 그 가문을 이었다고 이를 만하다.[『이요정집』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

묘소와 후손

시호는 소안(昭安)인데, 소희(昭僖)라고도 한다.[『방목』] 묘소는 경기도 양주 송산리의 선영(先塋)에 있는데, 조카 신용개(申用漑)가 지은 행장(行狀)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이요정집(二樂亭集)』 권10 「고양부원군 신공 행장 (高陽府院君申公行狀)」, 『이요정집(二樂亭集)』 권11 「고양부원군 신공 묘지명(高陽府院君申公墓誌銘)」]

부인 문화 유씨(文化柳氏)는 판관(判官)유수창(柳秀昌)의 딸이다.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으니, 외아들 신복순(申復淳)은 중추부 첨지사를 지냈고, 딸은 종실(宗室)인 금천부정(錦川副正) 이변(李抃)에게 시집갔다.

참고문헌

  • 『세조실록(世祖實錄)』
  • 『성종실록(成宗實錄)』
  • 『연산군일기(燕山君日記)』
  • 『중종실록(中宗實錄)』
  • 『명종실록(明宗實錄)』
  • 『이요정집(二樂亭集)』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동각잡기(東閣雜記)』
  • 『사가집(四佳集)』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해동잡록(海東雜錄)』
  • 『은봉전서(隱峯全書)』
  • 『지퇴당집(知退堂集)』
  • 『충재집(冲齋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