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朴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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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98년(선조 29)~1632년(인조 10) = 37세]. 조선 중기 광해군·인조 때에 활동한 문신. 행직(行職)은 이조 참판(參判)이다. 자는 대관(大觀)이고, 호는 하석(霞石)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인데, 아버지는 의정부(議政府) 좌참찬(左參贊)박동선(朴東善)이고, 어머니 전주이씨(全州李氏)는 청성군(淸城君)이걸(李傑)의 딸이다. 증조부는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박소(朴紹)이고, 조부는 사재감(司宰監)정(正)박응천(朴應川)이다.

광해군 · 인조 시대 활동

1615년(광해군 7) 사마시(司馬試)에 진사(進士)로 합격하였다. 1619년(광해군 11)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가 되었다가 그 뒤에 정자가 되었다. 당시 광해군이 모후(母后)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廢)하는 논의에 아버지인 박동선(朴東善)이 참여하지 않았다 해서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유배되자, 사직하고 경기(京畿)에 은거하며 독서로 자적하였다.

1623년 <인조 반정(仁祖反正)>에 참여하였다. 반정 후에 승문원 저작(承文院著作), 태상시(太常寺) 직장(直長)이 되었다가 검열(檢閱)이 되고, 그 해 9월에 홍문관(弘文館)정자(正字)가 되었으며, 윤10월에 홍문관 박사(博士)가 되었다. 그 달에 정사훈(靖社勳) 3등에 책록되었으며, 그 뒤 정언(正言)이 되었다가 1624년(인조 2) 3월 초순에 사간이 되었으며, 3월 말에 응교(應敎)가 되었다. 이때 시강관(侍講官)을 겸임하였다. 이 해 5월에 장령(掌令)이 되고, 7월 초순에 집의(執義)가 되었으며 7월 말에 다시 응교가 되었다. 8월 초에 검상(檢詳)이 되었다가 7일 만에 부응교(副應敎)가 되고, 10월에 집의가 되었다. 1625년(인조 3) 1월에 홍문관 교리(校理)가 되었다. 이 해 4월 24일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가 4월말 홍문관 응교가 되었다. 이때 그는 부응교유백증(柳伯曾), 교리나만갑(羅萬甲) 등과 함께 차자(箚子)를 올려 대사헌(大司憲)이 된 남이공(南以恭)이 광해군 때에 당파를 만들고 권력을 휘둘렀다는 이유로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오히려 인조의 의심을 사서 이 해 7월 초에 함평현감(咸平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626년(인조 4)에 문과(文科)중시(重試)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고, 다음 해인 1627년(인조 5)에 동부승지(同副承旨),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 1628년(인조 6)에 대사간(大司諫), 병조 참지(參知), 병조 참의(參議)를 지냈다. 그 뒤에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에 제수되었으나 병 때문에 부임하지 못하였다. 이해 9월에 가선 대부(嘉善大夫)로 승진하였고, 이어 금주군(錦洲君)에 봉해졌다. 1629년(인조 7)에 다시 <나만갑 사건>에 연루되면서 대사간으로부터 붕당을 만들고 자기파를 천거하였다는 이유로 지목받아 남원부사(南原府使)로 좌천되었다. 당시에 남원은 도적의 소굴이 되어 도륙(屠戮)이 자행되었는데, 사건이 발생해도 사람마다 감히 누구의 짓이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그런 지경이었다. 그가 부사가 되어 도적을 색출하는 등 선정을 베풀었는데, 그를 원망하는 도적의 괴수(魁首)가 관사에 들어와 칼로 그의 왼쪽 다리에 상해를 입히기도 하였다.

1631년(인조 9) 3월에 대사간이 되고, 4월 말에 대사헌이 되었으며, 7월에 다시 대사간이 되었다가 10월에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다. 이 해 11월에 그에게 중직대부(中直大夫)를 가자(加資)하였는데, 이는 대군(大君) 혼례 때 보인 그의 공로에 대한 상이었다. 그 뒤 공조 참판(參判)이 되었다가, 1632년(인조 10) 1월에 홍문관 부제학(副提學)을 역임하였는데, 병이 심해져 이해 6월 27일 향년 3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성품과 일화

박정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여 남이 가르치는 수고를 하지 않아도 스스로 학문에 힘썼다고 한다. 성품은 염경(廉勁)하여 평소에 생업(生業)에 관한 일은 경영하지 않고 책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였는데, 비록 재상(宰相)의 반열에 올라서도 포의(布衣) 때와 같았다. 관직에 있을 때는 청빈(淸貧)하였고 간쟁하는 말을 올릴 때는 유익한 말을 하였다. 즉 그는 강직하고 직언(直言)하는 신하였으나, 『인조실록(仁祖實錄)』인조 10년 6월 27일조 그의 졸기에는 그에 관하여 “다만 도량이 적어 사람들이 혹 경시하였다.”라고 하였다.

묘소와 비문

1686년(숙종 12) 12월에 충숙(忠肅)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묘소는 경기도 김포(金浦) 마산면(馬山面) 두모곡(杜毛谷)에 있다. 이경석(李景奭)이 비명(碑銘)을 지었다. 부인 양주윤씨(楊州尹氏)는 강원도관찰사윤안국(尹安國)의 딸인데, 4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1자는 박세규(朴世圭)이고, 2자는 장령(掌令)박세견(朴世堅)이며, 3자는 박세후(朴世垕)이고, 4자는 박세당(朴世堂)이다. 1녀는 이영휘(李永輝)의 처가 되었다.

참고문헌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사마방목(司馬榜目)』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계곡집(谿谷集)』
  • 『상촌집(象村集)』
  • 『서계집(西溪集)』
  • 『명재유고(明齋遺稿)』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