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준(金尙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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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61년(명종 16)∼1635년(인조 13) = 75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인조(仁祖) 때의 문신이자 서예가. 승정원(承政院) 도승지(都承旨)와 형조 참판(參判) 등을 지냈다. 자는 여수(汝秀)이고, 호는 휴암(休菴)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기시(軍器寺)정(正)김원효(金元孝)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승열(李承說)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신천군수(信川郡守)김생해(金生海)이며, 증조할아버지는 평양서윤(平壤庶尹)김번(金璠)이다. 김상용(金尙容)·김상헌(尙憲) 형제의 4촌이기도 하다.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정협(鄭浹)의 무고로 체포되어, 고문에 못 이겨 김제남(金悌男)과 함께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추대하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여 파출되었다. <인조반정(仁祖反正)> 뒤에는 계축옥사 때 김제남을 모함한 죄로 길주(吉州)에 오랫동안 유배되었다.

선조 시대 활동

1582년(선조 15)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로 합격하였으며, 8년이 지난 1590년(선조 23) 증광(增廣) 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는데, 그때 나이가 30세였다.[『방목(榜目)』] 처음에 승문원(承文院) 부정자(副正字)로 보임되었다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자, 충청도 지방에서 의병(義兵)을 모집한 우의정심수경(沈守慶)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었다. 77세의 심수경이 체찰사(體察使)에 임명되어 황해도의 왜적을 토벌할 때 막료(幕僚)의 계획들이 김상준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으므로, 심수경이 그를 매우 중하게 여겼다. 1593년(선조 26) 선조가 피난 간 의주(義州)의 행재소(行在所)에서 승정원 주서(注書)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예문관 검열(檢閱)로 옮겼다가 예문관 대교(待敎)로 승진하였다.(『선조실록』 26년 6월 21일),(『선조실록』 26년 7월 16일),(『선조실록』 26년 윤11월 14일),[『백주집(白洲集)』 권18 「형조참판휴암김공신도비명(刑曹參判休菴金公神道碑銘)」 이하 「김상준비명」으로 약칭]

1594년(선조 27)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고,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다가 예조 좌랑으로 옮겼다.(『선조실록』 27년 10월 15일) 1595년(선조 28) 다시 병조 좌랑이 되었는데, 선조가 병조를 중시하여 언제나 전주(銓注)에서 비답(批答)을 내릴 때에 김상준을 두고 다른 사람을 뽑은 적이 없었다. 조정에서 3로(路)의 어사(御史)를 파견할 때 암행어사에 선임되어 강원도 지방을 안찰(按察)하고 돌아와서 임금에게 자세히 보고하였다.(『선조실록』 28년 4월 25일) 얼마 뒤에 영광군수(靈光郡守)에 임명되었는데, 강포한 호족을 억누르고 간사한 아전을 막아 창고가 충실하게 되었으므로, 고과(考課)에서 전라도의 으뜸을 차지하였다.(『선조실록』 30년 7월 11일),[「김상준비명」]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서 왜적이 전라도 지방을 침입하려고 하였으므로, 바닷가에 있는 주(州)·군(郡)의 수령관을 모두 무신(武臣)으로 교체하였는데, 그때 김상준도 교체되어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의 종사관이 되었다. 또 명(明)나라 제독(提督)마귀(麻貴)를 접대하는 사신에 임명되어, 마귀의 군사를 따라 경상도 지방으로 가서, 도산(島山)의 전역(戰役)에 참여하였다. 1598년(선조 31) 군자감(軍資監) 정으로 승진하였다가, 성균관(成均館)사예(司藝)로 옮겼다. 또 내섬시(內贍寺) 정에 임명되었다가, 전라도 지방의 조발사(調發使)로 충원되어 명나라 군사들에게 군량미를 공급하였다. 1599년(선조 32) 공주목사(公州牧使)에 임명되어 공주산성(公州山城)의 수축을 맡아 산성을 수축하고, 떠돌아다니던 백성들을 안집(安集)시켰으므로, 임금이 특별히 명하여 직질(職秩)을 올려주고 포상하였다.(『선조실록』 32년 8월 21일),[「김상준비명」]

1602년(선조 35) 4도(道)의 조도사(調度使)에 임명되어, 강원도·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의 수천 리 길을 왕복하며 곡식을 수만 석(石)이나 거두어서, 군대의 식량을 넉넉하게 공급하고 백성들도 고통을 덜 받게 하였다. 그리고 3년 만에 돌아왔으나, 곧 해주목사(海州牧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7년 3월 27일) 당시 해주(海州)는 전정(田政)이 문란하여 호족들은 간사한 계책으로 세금을 면하지만 백성들은 지나치게 세금을 내고 있었다. 김상준은 토지 대장을 새로 정리하고, 대장에 따라 조세와 요역(徭役)을 엄격하게 부과하였다. 1605년(선조 38) 관직을 사면하고 돌아왔으나, 가을철에 죽주부사(竹州府使)에 임명되었다.(『선조실록』 38년 11월 16일) 전라도 지방과 경상도 지방의 길목에 죽주산성(竹州山城)이 있었으므로, 김상준이 죽주산성을 축조하여 경상도와 전라도의 물류 교류를 원활하게 이루어지도록 만들었다.[「김상준비명」]

광해군~인조 시대 활동

1608년(광해군 즉위년)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임명되었다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로 승진하였다.(『광해군일기』 즉위년 2월 14일) 천추사(千秋使)에 임명되어 명나라 북경(北京)에 가서 황태자의 생일을 축하하고 돌아와서, 승정원 우승지(右承旨)를 거쳐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다.(『광해군일기』 1년 8월 10일),(『광해군일기』 2년 1월 13일) 그때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태감(太監)염등(冉登)을 보내어 광해군을 책봉할 당시 김상준이 예방승지(禮房承旨)로서 일을 예절에 잘 맞게 주선하였다고 하여, 승정원 도승지(都承旨)에 발탁되었다.(『광해군일기』 4년 1월 11일) 광해군 즉위 후 대북파(大北派)의 정인홍(鄭仁弘)·이이첨(李爾瞻) 등이 정권을 잡았는데, 서인(西人) 출신 김상준이 승정원 도승지로 발탁된 것은 광해군이 그를 특별히 신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북파에 의하여 중추부(中樞府)동지사(同知事)로 밀려났으나, 광해군의 특명으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부총관(副摠管)을 겸임하였다.[「김상준비명」]

1612년(광해군 4) 봄 <김직재(金直哉)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매제 김강재(金强哉)가 김직재의 동생이었다. 이로 인하여 아버지 김원효는 군기시 정에서 파직되고, 김상준도 형조 참판에서 쫓겨났는데, 그 뒤에 무고임이 밝혀졌다. 그러나 아버지 김원효는 늙은 나이에 그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바로 세상을 떠났다. 김상준은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여 지나치게 슬퍼하다가, 건강을 해치고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보였다.[「김상준비명」]

그때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나서 영창대군과 김제남 체포되었는데, 정협이 김상준과 아버지 김원효 부자를 무고하였다. 상중에 있던 김상준은 갑자기 체포되어 광해군의 국문(鞫問)을 받았으므로, 정신이 없어 대답이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이에 광해군의 유도 심문에 넘어가서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을 추대하려고 하였다고 허위 진술하였다. 그의 건강 상태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가 혼란스러운 상태라는 것을 알았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가 거짓말을 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에 김상준은 석방되었으나, 병이 더욱 심해져서 거의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아버지의 3년 상례(喪禮)를 끝마치자, 문을 닫고 집안에 들어앉아 바깥세상 일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사람들과 왕래하지도 않았다.

1618년(광해군 10) 대북파의 이이첨 등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출(廢黜)하려고 <정청운동(庭請運動)>을 대대적으로 전개할 때 모든 관료들이 이이첨 일파의 협박을 두려워하여 그 반열(班列)에 참여하였으나, 김상준은 참여하지 않았다. 서인 가운데에도 온건론자는 참여하였으나, 강경론자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때 광해군이 “김상준은 어찌하여 참여하지 않는가” 하고 물었다. 이에 같은 마을에 사는 서인의 한 친구가 화복(禍福)을 논하며 정청(庭請)하는 반열에 참가하도록 권유하였으나, 김상준은 끝내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명나라에서 조사(詔使)가 왔을 때 전조(銓曹)에서 김상준을 영위사(迎慰使)로 추천하자, 광해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조정에 나오지도 않은 자를 영위사로 삼는다는 말인가” 하였다.[「김상준비명」]

1623년(인조 1) 3월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대간(臺諫)에서 김제남을 모함하였다고 김상준을 탄핵하였으므로, 함경도 길주로 유배되었다가 5년이 지난 1627년(인조 5) 충청도 아산(牙山)으로 양이(量移)되어 집 가까운 곳으로 옮겼다. 1633년(인조 11) 나라에서 사면령을 내리자, 종편(從便)되어 스스로 편한 곳을 골라서 살게 되었다. 병이 들어 집으로 돌아가서 죽기를 원하였는데, 그로부터 3년이 지난 1635년(인조 13) 서울 도성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리고 그해 8월 29일 서울 집에서 노병으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75세였다.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을 즐겨 읽었고, 손수 『자치통감강목』 20권의 소제목을 뽑아 『강감요략(綱鑑要略)』 을 편찬하였다. 글씨에도 능하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성실하고 강단이 있었으며, 행동이 부지런하고 검소하였다. 어려서부터 검약(儉約)하였는데, 높은 관직에 이르러서도 이것을 조금도 바꾸지 않았다. 음식은 맛있는 것을 먹지 않았으며, 의복과 거마(車馬)도 구차스러울 정도로 갖추었을 뿐이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 김원효의 가르침을 받아 집 밖을 나가지 않은 채 부지런히 공부하여 학문을 진취시키기에 힘썼다. 조금 자라서 학궁(學宮)에 들어가서 공부하였는데, 시험을 볼 때마다 일등을 차지하여 명성이 있었다. 약관의 나이에 향시에서 제 2등으로 뽑혔는데, 이때 문형(文衡)을 주관한 이이(李珥)가 김상준의 재주를 몹시 칭찬하였다.[「김상준비명」]

1585년(선조 18)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는데, 상제(喪制)를 끝마치고 나서 더욱더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글을 읽었다. 오랜 세월 동안 항상 깊은 밤중까지 잠을 자지 않고 공부하였다. 이때 김상준을 따라 학업을 익히던 김상용(金尙容)·김상헌(金尙憲) 등 4촌 형제들이 함께 공부하다가 졸면서도 김상준의 글 읽는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 책을 펴서 읽지 않더라도 평소에 익힌 것처럼 능히 외울 수가 있었다고 한다.

김상준은 어버이를 섬기는 데에 그 뜻을 어기지 않았다. 서모(庶母)가 성질이 사나워 섬기기가 어려웠으나, 곡진(曲盡)한 정성으로 그 뜻을 받들어서 끝내 그 환심을 얻었다. 관직에 있을 때에는 명예를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으며, 일체의 이해(利害) 관계에 대해서도 분연(奮然)하게 스스로 떨쳐버렸다.

길주로 귀양 가서 있을 때에 문밖을 나가지 않았으나, 학업(學業)을 묻는 자가 있으면 인도하여 잘 이끌어 주었기 때문에 집 안에 항상 신발이 가득하였다. 길주 사람들의 자제들이 점차 학문에 뜻을 두고 사마시에 진출하는 자가 많았는데, 김상준의 상을 듣고는 모두 천리 길을 달려와서 조문하였다.[「김상준비명」]

1593년(선조 26) 의주의 행재소에서 김상준이 예문관에 검열과 예문관 대교(待敎)를 역임할 때 명나라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제 1차 명나라 원군을 이끌고 들어와서 평양성을 수복하며 전쟁이 소강 상태에 있었다. 이때 왜적들이 바닷가에 주둔하여 웅거(雄據)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들이 다시 침범할까봐 걱정스러원 명나라 군사를 더 요청하고자 사신을 선발하였으나, 사기(事機)가 위급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사신으로 가기를 모두 꺼려하였다. 선조가 여러 신하들을 불러 “누가 갈 만한가”라고 물었으나, 좌우에서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선조가 어찌 할 바를 몰라 할 때, 당시 사관(史官)이던 김상준이 기주관(記注官)으로서 임금의 옆에서 임금의 언행을 기록하다가, 붓을 손에서 놓고 사신의 하급 관료에 충당해 주기를 자청하였다. 선조가 매우 기뻐하며 즉시 이를 허락하였고, 이때부터 선조는 김상준의 충성과 용기를 진실로 믿게 되었다.[「김상준비명」]

1602년(선조 35) 4도의 조도사에 임명되어 외지에서 고생하다가 3년 만에 돌아왔으나, 곧 해주목사로 부임하라는 명령이 있었다. 선조가 임진왜란 때에 피난 가다가 해주에 머물렀을 때 해주 사람들이 충성을 다하였으므로, 반드시 은혜를 갚고자 하였으나, 해주목사로 추천한 후보자들이 모두 마땅치 않았다. 선조는 세 번이나 의망(擬望 : 후보자를 추천함)을 바꾼 끝에 마침내 김상준을 임명하였다. 친구들은 김상준이 너무 오래도록 외방(外方)에 나가서 고생하는 것을 민망하게 여겨 병이라고 핑계대고 관직을 사양하도록 권고하였으나, 김상준은 태연하게 말하기를, “출사(出仕)한 몸이 임금을 섬길 때에 평탄한 일이나 험난한 일이나 간에 믿고 맡기면, 이를 맡는 것이 모두 신하의 직분이다” 하고, 해주 고을에 부임하였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 동쪽 도혈리(陶穴里)의 선영에 있는데, 이명한(李明漢)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 현재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율석리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현령(縣令)이천우(李天祐)의 딸인데, 2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광욱(金光煜)은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를 지냈고, 차남 김광위(金光煒)는 진위현령(振威縣令)을 지냈다. 장녀는 참판(參判)윤이지(尹履之)의 처가 되었다. 측실에서 세 아들을 두었는데, 장남은 김광혼(金光焜)이고, 차남은 김광련(金光煉)이다.[「김상준비명」]

부인 전주 이씨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순종하며 친족에게 인정을 베풀었고, 여자들의 길쌈과 부녀자의 일을 게을리 하지 않으며 민첩하였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도 남편 김상준이 편안하게 공부할 수 있게 하여 마침내 그 학업(學業)을 성취하게 하였는데, 이는 모두 부인의 내조 덕분이었다. 부인은 남편보다 23년 앞서 세상을 떠났는데, 나중에 남편과 합장되었다.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인조실록(仁祖實錄)』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청음집(淸陰集)』
  • 『백주집(白洲集)』
  • 『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 『광해조일기(光海朝日記)』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응천일록(凝川日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