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번(金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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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479년(성종 10)∼1544년(중종 39) = 66세]. 조선 중기 중종(中宗) 때 활동한 문신. 평양부서윤(平壤府庶尹)과 사헌부(司憲府)장령(掌令) 등을 지냈다. 자는 문서(文瑞)이다. 본관은 안동(安東)이고, 거주지는 경상도 안동(安東) 풍산(豊山)이다. 아버지는 사헌부 장령김영수(金永銖)이며, 어머니 강릉 김씨(江陵金氏)는 능성현령(綾城縣令)김박(金博)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한성부판관(漢城府判官)을 지낸 김계권(金係權)이고, 증조할아버지는 비안현감(比安縣監)을 지낸 김삼근(金三近)이다.

중종 시대 활동

1498년(연산군 4) 20세의 나이로 사마시(司馬試) 진사과(進士科)에 합격하였는데, <무오사화(戊午士禍)>로 많은 선비가 죽는 것을 보고 대과를 포기한 채 풍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러나 할머니의 격려와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뜻을 바꾸어 과거 준비를 하여, 35세가 되던 1513년(중종 8) 식년(式年) 문과에 갑과(甲科)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처음에 군자감(軍資監)직장(直長)에 보임되었다가, 관례대로 참하관(參下官)의 여러 관직을 거쳐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10년 7월 6일) 이때 가뭄과 황충(蝗蟲)으로 북방 지방에서 많은 이가 굶주려 죽자, 전운사(轉運使)종사관(從事官)에 선임되어 배를 이용하여 남방 지방의 곡식을 북방으로 운반하여 수많은 목숨을 살려냈다. 당시 사람들은 뱃길을 아주 위험하게 생각하였으나, 김번은 날씨를 관찰하고 수군을 지휘하여 정해진 뱃길을 따라 수없이 곡식을 싣고 왕복하면서 하나도 패몰(敗沒)한 배가 없었다.[『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권26 「김번(金璠)」]

병조 좌랑(佐郞)과 예조(禮曹) 좌랑을 역임하고, 경기도도사(京畿道都事)로 승진하였으며, 얼마 후 공조 정랑(正郞)에 임명되었다.(『중종실록』 13년 7월 1일) 이후 안음현감(安陰縣監)으로 나가 선정(善政)을 베풀었으나, 1년도 안되어 아버지의 상(喪)을 당하는 바람에 집으로 돌아왔다. 복제(服制)를 끝마치고,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 우익위(右翊衛)에 임명되었다가,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문학(文學)이 되었다.(『중종실록』 18년 7월 14일) 병조(兵曹) 정랑과 예조 정랑을 거쳐, 제용감(濟用監)첨정(僉正)으로 승진하였는데, 마침 평양부서윤의 자리가 결원(缺員)이 되자, 김번이 임명되었다. 당시 평안도 지방에 전염병이 크게 만연하자, 김번은 둔전(屯田)의 실시를 건의하고 군졸의 잡다한 세를 없애주어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평영부서윤으로 부임한 지 5년 만에 김번은 격무에 시달린 끝에 큰 병에 걸려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 풍산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년 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긴 투병 생활을 하였다. 병이 조금 차도가 있으면 방 하나를 아주 깨끗이 청소하여 천 권의 책들을 서가에 꽂아두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책을 읽었다. 1544년(중종 39) 지병으로 고향 집에서 돌아가니, 향년이 66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이 꼿꼿하고 남에게 고개를 숙이지 않았으며, 때에 따라 침묵을 지키기도 하였다. 가정에서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하였으며, 향당에서는 신의를 지키고 남을 나무라지 않았다. 그는 남보다 뛰어난 행동이 없었으나 사람들이 다투어 달려와서 그를 붙좇았다. 그는 청렴하고 남에게 후덕하였으며, 옛것에 돈독(敦篤)하였으나, 금세(今世)의 변혁을 거역하지도 않았다.

그가 진사과에 합격하고 얼마 뒤에 어머니 상을 당하였다. 그는 어머니 상례(喪禮)를 끝마친 뒤에, 무오사화로 많은 관료가 죽는 것을 보고, 고향 풍산에 내려가 농사를 짓고 살면서 할머니를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그러나 할머니는 이를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꾸짖기를, “세 마리의 희생을 솥에 삶아서 부모를 봉양한다고 하더라도, 한번 양명(揚名)하여 어버이를 빛내는 것만 못한데, 너는 어찌하여 과거에 뽑혀서 지하에 계신 선조들을 기쁘게 하지 않으려고 하는가” 하였다. 그는 할머니의 훈계를 들은 뒤부터 스스로 분발하여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려, 35세 때 문과에 3등 탐화랑(探花郞)으로 급제하였다.

1513년(중종 8)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여 고향 풍산으로 돌아와서 영친연(榮親宴)을 베풀었는데, 그의 형 이조 정랑김영(金瑛)도 함께 서울에서 내려와 고향 풍산의 삼구정(三龜亭)에서 할머니에게 절하고 축수(祝壽)하는 술잔을 올렸다. 그때 그의 형 김영과 절친한 친구였던 선산부사(善山府使)이희보(李希輔)도 참석하여 세 사람이 나란히 할머니에게 절을 하고 술잔을 바치자, 할머니는 일어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고 기뻐하였다.

평양부(平壤府)는 서북 관문의 요충지로써 압록강이 중국과 경계하고 여진(女眞)과 인접하였으므로, 조빙(朝聘)하는 사신의 행차가 길에 잇달았고, 여진을 방어하는 장수의 관사 출입이 끊이지 않았다. 1523년(중종 18) 조선에서 군사를 보내 서북방 오랑캐를 정벌한 이후에 전염병이 온 도(道)를 휩쓸어서 경내가 마치 도륙을 당한 것처럼 시체가 사방에 쌓여 있었다. 그러므로 문무를 겸전한 사람이 아니면, 평양부서윤 자리를 맡길 수가 없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김반을 추천하였다. 김반은 평양부서윤으로 부임하면서 둔전에 대한 방책을 건의하기를, “농상을 힘써 권장하여 먼저 백성들의 식량을 넉넉하게 만들고, 창고를 넉넉하게 채우며, 군졸의 명분 없는 부세를 전부 없애서, 백성들의 생활을 평안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저축된 곡식으로 손님들을 대접한다면, 아무런 어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

한편 김번은 세조의 국사(國師)였던 학조(學祖) 스님의 조카였다. 그리하여 사간원에서는 김번이 학조에게서 자랐다고 배척하며 끼워주지 않았다. 김번이 과거에 급제하였을 때에 유가(遊街)하여 학조가 거주하던 절에 가서 은영연(恩榮宴)을 베풀고자 하였으나, 고을의 향교 생도들이 선비로서 요승(妖僧)을 위해 경하할 수 없다고 거절하고 하나도 도와주지 않았으므로, 잔치를 열지 못한 일도 있었다.(『중종실록』 11년 9월 29일) 그는 유교를 기반으로 하는 조선의 정치 구조에 몸담은 관료였기 때문에, 세조의 국사로서 엄청난 세력을 부렸던 학조 스님이 그의 큰 삼촌이라는 것이 오히려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여 사림(士林)들로부터 가혹한 비판을 받았던 것이다.

묘소와 후손

묘소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도혈리(陶穴里)에 있는데, 이희보가 지은 묘갈명(墓碣銘)이 남아 있다. 김번의 묘자리는 옥 항아리에 물을 담은 모양의 ‘옥호저수(玉壺貯水)형’이므로 명당 중의 명당으로 알려져 있다.

부인 남양 홍씨(南陽洪氏)는 사직서(社稷署)영(令)홍걸(洪傑)의 딸인데, 자녀는 1남 1녀를 낳았다. 장남 김생해(金生海)는 장례원(掌隷院) 사의(司議)를 지냈고, 경명군(景明君)의 딸에게 장가들어 3남을 얻었다. 장녀는 종부시(宗簿寺) 첨정김의정(金義貞)의 처가 되었으며, 1남 5녀를 낳았다.[『국조인물고』 권26 「김번」]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구안동(舊安東) 김씨’와 ‘신안동(新安東) 김씨’로 나누어지는데, 신안동 김씨 가운데 특히 김번의 후손들을 ‘장동 김씨(壯洞金氏)’라고 부른다. 이것은 김번이 서울의 장동(壯洞)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장동 김씨는 김번의 증손자 김상헌(金尙憲)과 김상용(金尙容) 형제가 나란히 정승이 되면서 그 후손들이 크게 번성하였는데, 17세기 초부터 고종(高宗)이 즉위할 때까지 세도정치를 실시한 안동 김씨가 바로 이들이다.

참고문헌

  • 『중종실록(中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농암집(農巖集)』
  • 『잠암일고(潛庵逸稿)』
  • 『충재집(冲齋集)』
  • 『염헌집(恬軒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