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진(女眞)

sillok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두만강과 압록강 이북에 살았던 퉁구스계의 동북만주 원주민.

개설

여진은 조선에서는 흔히 ‘야인(野人)’으로 통칭되었는데, 조선은 특히 두만강 연안의 여진족인 우디캐[兀狄哈]와 모련위의 오랑캐[兀良哈], 그리고 건주좌위의 오도리[斡朶里] 등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이들은 15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유목 생활을 하였으나, 조선 성종기인 15세기 중엽부터는 야인 사회, 특히 건주여진 사회에 농경화와 상업화가 진행되면서 급속도로 사회가 발전하였다. 당시 조선 사회는 지배층을 중심으로 사치 풍조가 유행하면서 모피류의 수요가 증가하였다. 반면 여진은 농경화의 진행으로 인해 우마의 필요성이 증대되면서 양자 간에는 둘을 교환하는 교역이 이루어지게 된다. 16세기에 이르면 여진은 모피 교역으로 상당한 경제적 성장을 이루게 되고, 더 이상 조선은 이전처럼 여진을 통제할 수 없게 된다. 그 결과 둘 사이의 전통적인 교린 관계가 변화하였다.

내용 및 특징

야인들은 조선 건국 초창기인 15세기 초엽까지만 해도 농경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야인들은 농경을 한다고 해도 그 단계가 초기에 불과해 재배와 기술 면에서 명이나 조선보다 뒤떨어져 있었다. 이들이 농경 단계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자체적인 노력도 필요했지만 외부의 도움이 절실했다. 그래서 이들은 농사에 익숙한 요동 지방의 한인(漢人)과 압록강, 두만강 유역에 정착하고 있는 조선 농민을 틈만 나면 납치했다. 그리고 노략질한 인민들을 강제로 농경에 투입했다. 야인 중에서도 특히 건주야인의 농경화가 가장 빨랐다. 건주야인의 농경화에 특히 영향을 준 것은 조선이었다. 조선 성종대인 15세기 후반에 이르면 야인 사회, 특히 건주야인 사회는 발전이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이 시기 건주야인 사회는 단순히 농경사회로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예를 갖추어 혼인을 치르고, 제천례와 유교식 장례를 치르는 등 유교화가 상당히 진전되어 있었다. 또한 건주야인의 발전 정도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조선과 관계를 맺었던 야인 중 일부의 우디캐는 하루 종일 쌀을 찧어, 그것을 집안의 궤짝에다 담아 두거나, 가마솥에 밥을 지어 먹거나, 혹은 경작한 쌀로 다른 야인 종족의 피물과 교환하는 등 농경화도 상당히 진전된 상태였다.

변천

야인 사회의 농경이 발전할수록 그에 소용되는 소의 수요는 높아졌지만, 우마 교역이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는 상태에서 야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약탈을 통해 우마를 훔쳐 오거나 빼앗아 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몰래 교역을 하는 것이었다. 마침 당시 15세기의 조선은 사치 풍조가 유행하여 지배층 사이에서 야인 지역의 모피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이리하여 조선이 원하는 모피를 야인이 원하는 우마와 교환하는 모피 교역이 16세기에 빈번해지게 되었다. 야인들은 우마와 철물을 제시할 때만 모피와 교환해 주었다. 게다가 성종대 초반부터 유행한 사치풍조는 점점 광풍이 되었다. 사치가 일상이 되면서 점점 더 값비싸고 품질 좋은 모피를 원했는데, 특히 초피를 원하게 되었다. 초피 교역이 활성화되면서 조선의 우마와 철물이 야인사회로 급속도로 유출되었다. 이로 인해 야인 사회는 더욱 빠른 속도로 농경화를 이루고 경제력을 향상시킬 수 있었다. 반면 조선의 북방 군사력은 약화되어 갔다. 또한 모피를 마련하라고 독촉하는 변방 수령의 침탈을 감당하지 못한 양계의 백성들은 자발적으로 야인들의 땅으로 도망해 갔다. 그리고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조선에 내조했던 야인들은 교역을 통해 필요한 물품을 충당할 수 있게 되자 조선에 협조할 필요가 없게 되었다.

16세기에 조선과 야인 사이에 이루어진 모피 교역은 양자 사이의 전통적인 교린 관계를 변화시켰다. 야인들의 경제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수 없게 된 조선은 그들을 통제할 수도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은 조선 선조대 니탕개(尼蕩介)를 비롯한 6진의 성저야인이 반란을 일으키게 된 단초가 되었다.

참고문헌

  • 김순남, 「16세기 조선과 野人 사이의 모피 교역의 전개」, 『한국사연구』152, 2011.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