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필동(鄭必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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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3년(효종 4)∼1718년(숙종 44) = 66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승정원(承政院) 좌부승지(左副承旨)와 승정원 우부승지 등을 지냈다. 자는 종지(宗之)이다. 본관은 동래(東萊)이고, 거주지는 충청도 충주(忠州)이다. 아버지는 이조 참판(參判)에 추증된 정태구(鄭台耈)이고, 어머니 경주 김씨(慶州金氏)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에 추증된 김진곤(金振坤)의 딸이다. 할아버지는 승정원 좌승지(左承旨)에 추증된 정숙(鄭橚)이며, 증조할아버지는 의주부윤(義州府尹)정경업(鄭慶業)이다. 인현왕후(仁顯王后)의 큰아버지인 노봉(老峯)민정중(閔鼎重)의 문인이기도 하다.

숙종 전반기 활동

1675년(숙종 1) 사마시(司馬試)의 생원과(生員科)로 합격하였다.[『방목(榜目)』] 1684년(숙종 10) 정시(庭試) 문과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2세였다.[『방목』] 분관(分館)할 때에 그를 미워하는 자에게 배척당하여 성균관(成均館)에 배속되니, 모두 그가 억울하게 되었다고 하였다.[『삼연집(三淵集)』 권29 「경주부윤정공신도비명(慶州府尹鄭公神道碑銘)」 이하 「정필동신도비명」으로 약칭] 1685년(숙종 11) 존숭도감(尊崇都監)의 감조관(監造官)이 되어 애쓴 공로로 성균관 전적(典籍)으로 승진하였고, 이어 예조 좌랑(佐郞)으로 옮겼다가 파직되었다. 이어 다시 금위영(禁衛營) 낭청(郞廳)에 차임되었는데, 이는 모두 민정중의 결정이었다. 외직으로 나가 영산현감(靈山縣監)이 되었는데, 청렴하고 공명하게 다스려 치적이 두드러졌다.[「정필동신도비명」]

1689년(숙종 15)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나 남인(南人)이 집권하면서 정세가 크게 바뀌자, 정필동(鄭必東)은 상심하고 통분하여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인 충주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이때 대간(臺諫)에서 서인(西人) 중에서도 노론(老論)에 속하는 중진들을 탄핵하였고, 이에 민정중은 평안도 벽동(碧潼)으로 유배되었다. 그러자 그는 필마(匹馬)를 이용하여 서쪽 변방으로 유배 간 민정중을 문안하였으며, 뒤에 민정중이 세상을 떠나자 길에서 상여를 맞이하여 곡을 하고 그를 위해 심상(心喪)을 치렀다.[「정필동신도비명」]

1690년(숙종 16) 2월 영산현감으로 재임 중 사헌부(司憲府)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영산현감정필동은 사람됨이 경박하고 성질도 탐오합니다. 또 근래 경상도로 귀양 가는 사람들을 원근을 막론하고 끊임없이 대접하므로 이민(吏民)이 길에서 지치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숙종이 따르지 않다가, 두 번째 아뢰니 윤허하였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16년 2월 20일] 그가 유배 가는 노론 계열 사람들을 길에서 맞이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전송한 것이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숙종 중반기 활동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甲戌換局)>이 일어나서 서인이 집권하고 남인이 쫓겨나자, 병조 좌랑(佐郞)에 임명되었고, 이어 충청도도사(忠淸道都事)로 전임되었다.[「정필동신도비명」] 1698년(숙종 24) 병조 정랑(正郞)이 되었는데, 춘추관(春秋館)기주관(記注官)을 겸임하였으며, 또 대간(臺諫)을 겸임하였다. 이런 가운데 충청도 지역으로 파견되어 재상(災傷)을 살피기도 하였다. 병조 정랑을 거쳐 1699년(숙종 25) 7월 사간원(司諫院)정언(正言)에 임명되었을 때, 백성들의 괴로움을 극언하자, 숙종이 비답을 내리고 가상히 여겼다. [『숙종실록』숙종 25년 7월 3일, 숙종 25년 8월 5일, 「정필동신도비명」]

1700년(숙종 26) 8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는데, 허균(許筠)의 시를 간행하여 죄를 받았던 박태순(朴泰淳)이 외직에 임용되는 것에 반대하여 탄핵하였으나 오히려 체직되어 금산군수(錦山郡守)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6년 8월 2일, 숙종 26년 8월 11일, 숙종 26년 8월 23일, 숙종 27년 2월 19일] 1701년(숙종 27) 2월 사간원 정언이동언(李東彦)이 아뢰기를, “금산군수정필동은 시세(時勢)의 흥망성쇠에 따라 그 추향(趨向)이 변하며 경솔하고 천박하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숙종이 따르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27년 2월 19일] 이때 그는 한마디도 변명하지 않은 채 곧 바로 고향 충주(忠州)로 돌아갔는데, 부모를 봉양하고 독서하면서 여생을 마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정필동신도비명」]

1702년(숙종 28) 부친상을 당하였고, 복제(服制)가 끝나자 인동부사(仁同府使)에 임명되었다. 그는 지역 백성들에게 유시하여 효제(孝悌)에 힘쓰도록 하였고 나이 많은 노인들을 모아서 잔치를 열어주며 쌀과 베를 보태주었다. 그러자 고을 주민들이 모두 고무되었다. 관찰사가 그의 치적을 조정에 보고하니, 숙종이 특별히 옷감을 하사하였다. 얼마 후 사헌부 장령으로 소환되어, 사간원 정언이 되었는데, 숙종에게 ‘여색(女色)을 멀리하고 학문에 힘쓰라’고 진계(陳戒)하니 왕이 가납(嘉納)하였다.[『숙종실록』숙종 31년 윤4월 16일, 숙종 31년 9월 9일] 그 후 외직으로 나가 양양부사(襄陽府使)가 되었다. 이때 큰 흉년이 닥쳤으나 주민들을 정성껏 보살피고 먹이면서 진휼(賑恤)을 잘하였으므로, 이 공로를 인정받아 포상을 받았다. 그러나 얼마 후 다시 파직되어 고향 충주로 돌아왔다.

1707년(숙종 33) 12월 <민암(閔黯)의 옥사(獄事)>에 연루된 사람들을 처리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조정에서는 노론과 소론(少論)이 대립하였다. 소론은 이들을 용서해 주자는 온건론을 주장하였으나, 노론은 처벌해야 한다는 강경론을 폈다. 당시 사간원 정언에 임명된 정필동은 강경론을 주장하다가, 소패(召牌)를 어겨서 결국 파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34년 3월 22일, 숙종 34년 3월 25일, 숙종 34년 윤3월 6일] 이후 다시 서용되어 승문원(承文院) 판교(判校)에 임명되었으나, 조정을 장악한 소론은 노론인 정필동을 줄곧 공격하였고, 마침내 정권에서 배척당하여 울산군수(蔚山郡守)로 좌천되었다. 그곳에서 한 해를 넘긴 후, 정필동은 다시 사헌부 장령으로 소환되었다.[「정필동신도비명」]

1710년(숙종 36) 소론의 최석정(崔錫鼎)이 영의정이 되면서 노론과 소론이 다시 격돌하였다. 최석정은 『예기유편(禮記類編)』을 편찬하였는데, 노론에서는 『예기유편』이 정주(程朱)의 주와 다르다며, 그 본의(本意)를 어지럽힌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그러나 소론의 영수인 윤증(尹拯)은 최석정을 거유(巨儒)라고 칭찬하고 이 책을 강론하는 반열에 참여하였다. 이에 노론의 호유(湖儒)홍주형(洪冑亨)은 상소를 올려 윤증을 공격하고 배척하였으며, 이어 곽경두(郭景斗)도 상소를 통해 윤증을 비난하였는데, 이들의 행위는 윤증을 흠모하던 숙종의 노여움을 크게 샀다.[「정필동신도비명」] 윤7월 숙종은 비망기(備忘記)서 “유현(儒賢)을 업신여기고 오로지 당론(黨論)만을 일삼는 죄를 징치(懲治)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대관(臺官)인 정동필과 정호(鄭澔), 윤봉조(尹鳳朝) 등이 연좌되어 파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36년 윤7월 5일]

이렇게 고향 충주에 돌아온 그는 서너 칸 되는 집을 짓고서 ‘귀휴정(歸休亭)’라는 편액을 걸었다. 그리고 날마다 주자(朱子)의 글을 공부하여 자제들과 더불어 강론하면서 지냈다.[「정필동신도비명」]

숙종 후반기 활동

1712년(숙종 38) 사헌부 장령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인 1713년(숙종 39)에 종부시(宗簿寺)정(正)이 되었다.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하여 강계부사(江界府使)와 청북방어사(淸北防禦使)를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38년 9월 11일, 「정필동신도비명」]

1715년(숙종 41)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에 발탁되었다가, 1716년(숙종 42) 경주부윤(慶州府尹)이 되었으나 그 해 5월 사헌부의 탄핵으로 파직되었다.[『숙종실록』숙종 41년 3월 7일, 숙종 41년 5월 12일, 숙종 41년 5월 16일, 「정필동신도비명」] 사헌부에서 아뢰기를, “경주부윤정필동은 본디 용렬한 사람으로서 고을의 관비(官婢)를 현혹하여 해괴한 짓을 많이 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부(本府)에서 설치한 삼전(蔘田)은 진공(進供)의 수요를 장만하기 위한 것인데 약으로 쓴다는 핑계로 절도 없이 많이 캤습니다. 이러한 사람은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하였다. 숙종이 처음에는 따르지 않다가 다시 아뢰니 윤허하였다.[『숙종실록』, 숙종 41년 5월 12일]

얼마 뒤에 특명으로 서용된 정필동은 승정원 우부승지(右副承旨)에 임명되었는데, 상소하여 사직하였으나 숙종이 허락하지 않았다.[『숙종실록』숙종 41년 9월 5일] 겨울에 천재(天災)가 일어나자 여러 동료들과 함께 ‘성심(聖心)을 함양하고, 성궁(聖躬)을 보전하며, 붕당(朋黨)을 제거하는 방도’에 대하여 진계하였다. 이후 체직되어 병조 참의(參議)에 임명되었고 형조 참의로 전임되었다가 승정원 좌부승지(左副承旨)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43년 4월 21일, 숙종 43년 11월 13일, 숙종 44년 2월 14일, 「정필동신도비명」] 승정원에 오랜 기간 재임하였으므로 왕명을 출납하는 일에는 익숙하였다. 그러나 현사(賢邪)가 소장(消長)하는 때를 맞아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한 끝에 병을 얻어 체직되었다가 다시 임명되기를 여러 번 하였다.[「정필동신도비명」]

1718년(숙종 44) 공조 참의에 임명되었다. 이때 그는 몸이 아픈데도 불구하고 강릉(康陵 : 명종의 왕릉)의 석물(石物)을 수보(修補)하는 일을 진행 중이었다. 그러다가 병이 더욱 위중해지자, 찾아와서 위문하는 사람에게 말하기를, “죽고 사는 것은 상리(常理)여서, 부(符)가 이르면 떠나는 것이니, 어찌 슬퍼할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그 해 6월 15일 충주의 본가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이 66세였다.[「정필동신도비명」]

성품과 일화

정필동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품이 화락하고 소탈하였으며 행실이 독실하였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명민함이 남보다 뛰어나서 6세 때에 벌써 문장을 지을 줄 알았다. 약관의 나이에 자기가 지은 글을 가지고 노봉민정중을 찾아가자 민정중이, 『소학(小學)』과 『가례(家禮)』를 가르쳐주면서 손수 큰 글씨로 ‘장중겸묵(莊重謙黙)’ 네 글자를 써서 그에게 주었다. 이는 대체로 장차 가벼움을 바로잡아 성실한 데로 나아가게 하려는 의도였으며, 또한 그가 가식적으로 꾸미지 않아서 가르칠 만한 것을 갸륵하게 여긴 것이었다. 그는 민정중에게 전범(典範)을 배웠으므로, 조정에 벼슬할 때에 언행은 모두 이것으로 준칙을 삼았다. 논의가 현인을 숭상하고 정도를 지키는 것에 관계되면 재빠르게 참여하여, 머뭇거리며 망설이는 태도를 취하지 않았다.[「정필동신도비명」]

만년에 국론(國論)이 나날이 저하되는 것을 보고서 내심 선배들의 풍절(風節)을 흠모하며 개연(慨然)히 탄식을 하였다. 고을을 다스리며 하리(下吏)들을 검속할 때에는 매섭게 대하지 않았는데도 아랫사람들이 벌벌 떨었으므로 자못 엄혹(嚴酷)하다는 이름을 얻기도 하였으니, 이른바 쇠를 솜으로 싼 것이 아니겠는가. 집에서 한가히 지낼 때에는 마음대로 웃으며 농담을 하였고 굳은 기색으로 위망(威望)을 세우려고 하지 않았다. 이렇듯 그가 안과 겉이 다른 모습으로 위엄 있는 태도를 짓지 않은 것은 진실로 어진 스승에게 허여(許與)받은 것이라고 하겠다.[「정필동신도비명」]

묘소와 후손

김창흡(金昌翕)이 지은 비명(碑銘)이 남아있다.[「정필동신도비명」]

부인 고령 박씨(高靈朴氏)는 박고(朴)의 딸이다. 자녀는 3남을 두었는데, 장남 정언회(鄭彦恢)는 생원(生員)에 합격하여 참봉(參奉)을 지냈고, 차남 정언섭(鄭彦燮)은 진사(進士)를 지냈으며, 3남 정언환(鄭彦煥)은 생원(生員)을 지냈다.[「정필동신도비명」]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국조방목(國朝榜目)』
  • 『국조보감(國朝寶鑑)』
  • 『농암집(農巖集)』
  • 『연행록(燕行錄)』
  • 『연행일기(燕行日記)』
  • 『한수재집(寒水齋集)』
  • 『수촌집(水村集)』
  • 『옥오재집(玉吾齋集)』
  • 『죽천집(竹泉集)』
  • 『겸재집(謙齋集)』
  • 『가오고략(嘉梧藁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