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朴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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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생몰년 미상]. 조선 후기 인조~영조 때 활동한 문신. 승지(承旨)를 지냈다. 자는 거원(巨原)이다. 본관은 무안(務安)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박창도(朴昌道)이고, 어머니 사천 목씨(泗川睦氏)는 목악선(睦樂善)의 딸이다. 부인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이석규(李碩揆)의 딸이다.

인조~영조 시대 활동

1644년(인조 22) 영동현감(永同縣監)으로 있었다.

1662년(현종 3) 7월 사헌부(司憲府)지평(持平)이 되었다가 그 다음 해인 1663년(현종 4) 3월 사헌부 장령(掌令)이 되었다. 1664년(현종 5) 서산군수(瑞山郡守) 때에는 치적이 현저하였다. 1665년(현종 6) 7월 1일 사헌부 집의(執義)가 되었다가 곧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이 되고, 11월 초 다시 사헌부 집의가 되었는데, 같은 달 중순 조카 박장원(朴長遠)대사헌(大司憲)이 됨으로 체직되었다. 1666년(현종 7) 5월 경상도 관찰사가 되었고, 12월 초에 승지가 되었다가 같은 달 중순 참지(參知)가 되었다. 1667년(현종 8) 2월 다시 승지가 되었다.

1689년(숙종 15) 4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고, 1690년(숙종 16) 5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설서(說書)를 겸하였다. 그 해 6월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이 되었으며, 7월 수찬(修撰)이 되었다. 이때 그가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하였으니, 대략을 말하면, 맨 먼저 관직의 임명과 과거(科擧)에 사의(私意)가 횡행하는 폐단을 말하였고, 별궁(別宮)·늠료(廩料)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1691년(숙종 17) 11월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고, 12월에는 암행어사가 되어 지방의 민정을 살펴 이들의 피해를 시정하는데 진력하였다. 1692년(숙종 18) 3월 중순에 사간원 헌납(獻納)이 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며, 5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8월에 홍문관 수찬(修撰)이 되었다. 그 해 9월에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다가 10월에 홍문관 부수찬이 되었으며, 12월에 이조 좌랑(佐郞)이 되었다. 1693년(숙종 19) 2월 세자시강원 문학(文學)을 겸하였고, 4월 다시 사간원 헌납이 되었으며, 6월 이조 정랑이 되었다가 곧바로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그 해 6월 부응교(副應敎)가 되고, 10월 다시 의정부 사인이 되었다가 11월에 다시 부응교가 되었다. 1695년(숙종 21) 8월 세자시강원 문학이 되었고, 1696년(숙종 22) 5월 홍문관 부교리가 되었다. 이후 멀리 귀양 갔다가 1704년(숙종 30) 5월 감등(減等) 되었다.

1723년(경종 3) 2월 교리(校理)가 되었고, 7월 세자시강원 필선(弼善)을 겸하였으며, 12월 부응교가 되었다. 1724년(영조 즉위) 11월 부응교가 되었다가 곧 같은 달에 사헌부 집의가 되었으며, 그 다음 해인 1725년(영조 1) 1월 승지가 되었다.

그는 평소에 실천을 덕목(德目)으로 삼아서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을 동시에 중요하게 여기는 지행 교진론(知行交進論)을 전개하였다. 그는 행실이 깨끗하고 지키는 것이 있어 처신이 달랐다고 한다. 그가 이러하였기에 상소하여 시사(時事)를 논할 수 있었다고 한다.(『숙종실록 보궐정오』 숙종 16년 7월 20일)

참고문헌

  • 『인조실록(仁祖實錄)』
  • 『현종실록(顯宗實錄)』
  •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 『숙종실록(肅宗實錄)』
  • 『숙종실록 보궐정오(肅宗實錄補闕正誤)』
  • 『경종실록(景宗實錄)』
  • 『경종수정실록(景宗修正實錄)』
  • 『영조실록(英祖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