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궁(別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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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왕이나 왕세자가 비빈을 맞아들이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한 거처.

② 예비적이고 임시적인 궁궐 등 왕실 관련 시설.

개설

별궁이란 가례(嘉禮) 기간 동안 세자빈의 거처가 되며 각종 의례가 치러지는 곳이다. 그러나 정궁이 아닌 예비적이고 임시적인 궁궐을 가리키거나, 세자 혹은 대왕대비가 머무는 장소, 왕의 행차 시 머물기 위한 장소를 지칭할 때도 별궁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포괄적으로는 궁이라는 당호를 갖는 왕실 관련 시설 일반을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는 세자의 잠저, 왕실의 궁가, 후궁의 거처, 사친의 사당 등이 포함된다. 조선중기 이후 중국 사신들의 거처로 이용되었던 남별궁은 별궁의 특별한 사례에 해당한다. 조선후기에는 대부분 왕실의 가례를 거행하는 장소를 지칭하는 말로 사용되었다.

내용 및 특징

세자의 혼인식을 가례라고 하는데, 별궁은 가례 기간 동안 세자빈이 머무는 곳이자 가례 의식이 치러지는 곳이다. 세 번의 간택을 통해 세자빈이 정해지면 즉시 별궁으로 거처를 옮기게 하여 석 달을 머물면서 여러 가지 궁중 법도를 익히게 하였다. 이곳에서 가례 의식이 거행되는 순서와 행사를 미리 연습시키기도 했다.

가례는 여섯 가지 절차로 이루어진다. 간택된 세자빈이 머물고 있는 별궁으로 궁궐에서 사자를 보내 청혼하는 의식인 납채(納采), 혼인이 이루어지게 된 징표로 궁궐에서 사자를 통해 별궁에 예물을 보내는 의식인 납징(納徵), 궁궐에서 길일을 택해 가례일로 정하여 이를 별궁에 알려 주는 의식인 고기(告期), 궁궐에서 세자빈을 책봉하는 의식과 별궁에 사신을 보내 왕비를 책봉 받도록 하는 의식인 책빈(冊嬪), 세자가 별궁에 직접 가서 세자빈을 맞아들여 궁궐로 돌아오는 의식인 친영(親迎), 세자와 세자빈이 서로 절을 나눈 뒤에 술과 찬을 나누고 첫날밤을 치르는 의식인 동뢰(同牢)가 그것이다. 이 중 납채에서 친영까지 다섯 절차가 별궁에서 이루어졌다. 이를 위한 연습인 습의(習儀) 또한 대개 별궁에서 이루어졌다. 예조(禮曹)에서 가례를 기록한 등록(謄錄)을 살펴보면, 책빈(冊嬪)과 친영(親迎)의 내습의(內習儀)는 모두 별궁에서 행했고, 동뢰연(同牢宴)과 조현례(朝見禮)의 내습의는 모두 궁궐 안에서 행하되 한 번만은 별궁에서 행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별궁에서 궁빈을 맞아들였다는 일화가 가장 처음 등장하는 것은 태종대이다(『태종실록』 2년 3월 7일). 조선왕조의 마지막 별궁은 1880년(고종 17)에 완공된 안국동 별궁이다. 현재도 일부 건물이 남아 있는 안국동 별궁은 1882년(고종 19) 2월 22일에 세자와 세자빈의 혼례 장소로 사용되었다(『고종실록』 19년 2월 22일). 일찍 세상을 떠난 순종의 세자빈 민씨를 대신하여 새롭게 간택된 순정효황후(純貞孝皇后) 윤씨와 순종의 혼례식도 이곳에서 1907년(융희 1) 1월에 거행되었다.

가례가 설행되기 위해 별궁은 특정한 공간적 요건을 갖추어야 하지만 반드시 새로 지어 이용하기보다는 기존의 건물을 별궁으로 지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일반적으로 궁이라는 당호가 붙은 왕실 건축물은 이미 규모와 격식이 행례에 적합하기 때문에 활용하기에 적절했다. 예를 들어 순조대에는 어의궁(於義宮) 본궁(本宮)을 별궁으로 삼았고, 고종대에는 운현궁(雲峴宮)을 별궁으로 삼은 기록이 있다(『고종실록』 3년 1월 16일). 어의궁은 인조의 잠저(潛邸)이고, 운현궁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거처이다. 특히 잠저가 별궁이 되는 것은 세자 공간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에서 의식적으로나 실제적으로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

이처럼 특정한 기능을 담는 건축의 명칭으로서 별궁이 아니라 일상용어에서 사용되는 또 다른 의미로서의 별궁이 있다. 즉, 규모와 격식을 갖춘 온전한 궁궐이 아니라 예비적이고 임시적인 왕의 거처를 의미할 때도 별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예를 들어, 왕이 은퇴 후 머무르는 장소, 세자나 대왕대비 등 왕에 버금가는 권력자의 거처, 종묘 제례 등 국가적인 행사로 왕이 머물게 되는 경우의 거처 등이 별궁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심지어는 법궁인 경복궁에 대해 창덕궁을 별궁으로 표현하는 『조선왕조실록』 기사도 나타난다. 이때는 복수의 궁궐 중 정통성에 있어서 부차적인 궁궐이라는 의미이다. 광해군대의 궁궐 재건 공사 때, 경덕궁(敬德宮)에 이름이 정해지기 전 경덕궁을 서별궁이라고 불렀던 것도 이러한 의미이다.

광범위한 의미에서 별궁에 해당하는 건축은 다양한 양상을 보여 준다. 즉, 별궁을 조선시대 한양에 지어졌던 5개의 공식 궁궐을 제외한 모든 궁이라고 정의하면 많은 왕실 관련 시설이 포함된다. 먼저 잠저가 해당한다. 잠저는 정상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왕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가리키는 말로, ‘궁’이라는 당호를 얻었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本宮)과 개성경덕궁, 인조의 저경궁(儲慶宮)어의궁(於義宮), 영조의 창의궁(彰義宮)과 철종의 용흥궁(龍興宮) 등이 있다.

대군, 군, 공주, 옹주의 살림집인 궁가(宮家)도 별궁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왕의 아들과 딸들은 정비의 몸에서 나면 대군과 공주, 후궁의 몸에서 나면 군과 옹주라고 하는데, 이들은 일단 혼례를 치르면 모두 궁궐 밖으로 나가 생활하였다. 이들의 살림집이 바로 궁가이다. 대표적인 궁가로는 순조의 장녀 명온공주(明溫公主)가 거주하던 죽동궁(竹洞宮), 고종의 잠저이자 흥선대원군이 살던 운현궁, 대원군의 조카이자 고종의 사촌형인 이재원(李載元)이 살던 계동궁(桂洞宮) 등이 있다.

한편, 왕이 승하한 뒤 후궁들을 모아 거처하게 했던 장소에도 궁이라는 당호가 붙었다. 태종의 후궁들을 위한 영수궁(寧壽宮), 세종의 후궁들을 위한 자수궁(慈壽宮), 문종의 후궁들을 위한 수성궁(壽城宮) 등이 대표적이다.

이밖에 국왕의 친부모님을 제사 지내는 사당에는 격상의 의미로 궁이라는 당호를 붙였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를 봉사한 묘인 육상궁(毓祥宮), 육상궁 등 일곱 개의 묘를 합사한 칠궁(七宮),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즉,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를 봉사한 경모궁(景慕宮)> 등이 있다.

변천

참고문헌

  • 장기인, 『한국건축대계Ⅳ: 한국건축사전』, 보성각, 1998.
  • 주남철, 『궁집』, 일지사, 2003.
  • 홍순민, 『우리 궁궐 이야기』, 청년사, 1999.
  • 조은주·송인호, 「서울 도성 안 조선별궁의 입지와 변화양상」, 『한국건축역사학회 2008년 춘계학술발표대회 발표집』,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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