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궁(彰義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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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가 연잉군(延礽君)이던 시절에 살던 궁가(宮家).

개설

숙종이 후궁 숙빈최씨(淑嬪崔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왕자 연잉군에게 주었던 궁가이면서 연잉군의 생모인 숙빈최씨의 궁가이기도 하다.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에 책봉되어 궐내로 들어가 살게 되자 동궁(東宮) 소속의 궁가가 되었다.

1729년(영조 5)에는 영조와 정빈이씨(靖嬪李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孝章世子)가 요절하자 그를 제향하기 위한 효장묘(孝章廟)를 창의궁 서쪽에 건립하였다(『영조실록』 5년 1월 13일). 1752년(영조 28)에는 사도세자(思悼世子)와 혜빈홍씨(惠嬪洪氏) 사이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이 죽자 그 신위를 모시기 위한 의소묘(懿昭廟)를 효장묘의 동쪽에 세웠다(『영조실록』 28년 3월 10일).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여 그 신위를 창덕궁 안 연복전으로 옮기고, 의소묘의 신위를 효장묘로 옮겼다. 1831년(순조 31)에는 효명세자(孝明世子)의 사묘인 문호묘(文祜廟)를 효장묘 안에 건립하였다(『순조실록』 30년 5월 12일). 1900년(광무 4) 의소세손의 신위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신위와 합하여 옛 영희전(永禧殿) 터로 옮겼다. 1907년(융희 1) 궁내부령으로 내수사와 궁장토의 도장(導掌)을 폐하면서 창의궁도 폐하고 소속 궁장토는 국유가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연잉군과 숙빈최씨의 궁가였던 창의궁은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迎秋門)을 마주 대한 북부 의통방에 있었다. 현재의 행정 구역으로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통의동 일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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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창의궁은 숙종과 후궁 숙빈최씨 사이에 출생했던 왕자 연잉군[영조]을 위하여 건립한 궁가이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 이금(李昑)이 진사(進士)서종제(徐宗悌)의 딸에게 장가들었다. 하지만 궐 밖에 거처할 제택이 없어 출궁을 하지 못하자, 숙종은 자금(資金)을 들여 구입해 주라고 명했다. 1707년(숙종 33)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을 사들이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결국 효종의 막내딸인 숙휘공주(淑徽公主)의 집 인평위궁을 2,000냥 주고 사들였다(『숙종실록』 34년 10월 30일). 연잉군의 궁가가 정해지자 1711년(숙종 37) 6월 22일 숙종은 이현궁(梨峴宮)에 정해진 숙빈방(淑嬪房)을 연잉군의 제택으로 옮길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연잉군이 궐을 나서 그 궁가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그 제택을 구입하고도 5년이 지나서였다(『숙종실록』 38년 2월 12일).

경종이 즉위하자 1721년(경종 1) 연잉군은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되었다. 때문에 궐내로 들어가 살아야만 했다.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자 창의궁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본궁(本宮)이라 칭하며 동궁에 소속된 궁가로 들였다.

1725년(영조 1) 한성좌윤(漢城左尹)홍석보(洪錫輔)의 건의에 의하여 잠저(潛邸) 때의 식년호적(式年戶籍)을 봉안하였다. 1729년(영조 5)에는 영조와 정빈이씨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효장세자가 요절하자 그를 제향하기 위한 효장묘를 궁가 서쪽에 건립하였다. 1752년(영조 28)에는 사도세자와 혜빈홍씨 사이의 적장자인 의소세손이 죽자 그 신위를 모시기 위한 의소묘를 효장묘 동쪽에 세웠다. 건립 당시 영조는 사당의 규모를 크게 하지 말고 체모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따라 효장묘의 5분의 1정도로 축소된 비용과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정조 즉위 후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추존하여 그 신위를 창덕궁 안 연복전으로 옮기고, 의소묘의 신위는 효장묘로 옮겨 모셨다. 1831년(순조 31) 순조와 순원왕후(純元王后) 김씨(金氏) 사이 소생인 효명세자가 졸서하자 그의 사묘인 문호묘를 또 그 안에 건립하였다. 효명세자의 아들 헌종이 즉위하자 효명세자는 익종대왕으로 추숭(追崇)되어 그 신주를 효화전(孝和殿)에 봉안했다. 다시 홀로 남은 의소세손의 신위를 1900년(광무 4) 문효세자의 신위와 합하여 옛 영희전 터로 옮겼다. 이로써 창의궁은 빈 궁가가 되었고 1907년(융희 1)에 궁내부령으로 내수사와 궁장토의 도장을 폐하면서 국유가 되었다.

형태

창의궁의 궁간 구성과 배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본래 「창의궁배치도」의 좌측에는 의소묘로 적혀 있으나, 효장묘와 의소묘가 함께 있었던 때를 기준으로 하면 효장묘로 표기해야 한다.

효장묘와 의소묘는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에 수록되어 있는 도설(圖說) 가운데 정당(正堂) 뒤의 담장이 곡장(曲墻)처럼 만들어진 담장을 통하여 구분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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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창의궁배치도(彰義宮配置圖)」

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