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화전(孝和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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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에 있던 익종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

개설

혼전은 산릉에서 장례를 치른 뒤 신주를 모시고 궁궐로 돌아와 종묘(宗廟)에 부묘(祔廟)할 때까지 신주를 봉안하는 곳이다. 혼전의 존재 기간은 왕과 왕후에 따라 달랐으며, 왕후도 왕보다 먼저 혹은 나중에 승하하느냐에 따라 존재 기간이 달랐다. 왕과 왕보다 나중에 승하한 왕후는 장례를 치르는 시점이 승하한 지 5개월 만에 이루어지므로 혼전은 3년(27개월) 중 22개월 동안 존재하였다.

반면, 왕보다 앞에 승하한 왕후는 3년상이 아닌 1년상인 기년상(期年喪)으로 치러져서 11개월에 연제(練祭)를 행하고 13개월에 상제(祥祭)를 행하며 15개월에 담제(禫祭)를 지냈다. 왕후의 신주는 배우자인 왕의 신주와 함께 종묘에 부묘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따라서 담제가 끝난 후에도 왕후의 신주는 혼전에 남아 있다가 왕이 승하하여 3년상을 마친 후 함께 부묘하였다.

효화전은 일반적인 혼전과는 다른 행보를 걸었다. 익종은 순조의 아들이자 헌종의 아버지로, 세자 시절에 훙서하였다. 헌종이 즉위하면서 그를 왕으로 추존하였고, 종묘에 부묘하기 전까지 그의 혼전으로 삼은 곳이 효화전이다.

내용 및 특징

1830년(순조 30) 5월 6일(임술) 효명세자(孝明世子)가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훙서하였다. 3년상을 마치고, 창의궁(彰義宮) 안에 마련한 문호묘(文祜廟)에 그의 신주를 봉안하였다.

1834년(헌종 즉위) 11월 18일 헌종이 숭정문(崇政門)에서 즉위하였다. 즉위한 그날 순조비 순원왕후(純元王后)가 효명세자의 추숭 전례(典禮)를 하교하였다. 다음 날 11월 19일 신전(神殿)을 효화(孝和)로 정하였다(『헌종실록』 즉위년 11월 19일). 『헌종실록』에는 11월 19일 혼전의 전호(殿號)를 정하고 혼전을 ‘신전’이라 표기하였다. 『익종추숭도감의궤(翼宗追崇都監儀軌)』에는 11월 27일 효명세자를 추숭한 뒤 옮겨 봉안한 전호라고 되어 있다. 두 기록은 전호를 정하는 날짜가 다르고 혼전을 다르게 표현한 차이가 있다. 1835년(헌종 1) 5월 19일 익종의 신주를 효화전에 봉안하고(『헌종실록』 1년 5월 19일), 문호묘에 있었던 옛 신주는 능소(陵所)에 매안하였다.

효화전은 창경궁의 편전(便殿)인 문정전(文政殿)에 설치하였다. 조선후기의 기록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경희궁 안에 있었다고 되어 있다.

1837년(헌종 3) 1월 6일 부묘 하루 전, 헌종이 효화전에 나아가 고동가제(告動駕祭)를 거행하고 홍화문(弘化門)으로 나가 신련(神輦)을 지송하였다. 다음 날인 1월 7일에 순조를 종묘 정전 제16실에 먼저 부묘한 뒤 익종을 제17실에 올려서 부묘하였다. 따라서 효화전은 1835년 5월 19일 익종의 신주를 봉안한 때부터 1837년 1월 7일까지 설치되었다.

변천

효화전이 있었던 창경궁의 문정전은 그 이전부터 왕이나 왕후의 혼전으로 사용해 온 전각이다.

참고문헌

  • 『효명세자입묘도감의궤(孝明世子入廟都監儀軌)』
  • 『효명세자장례도감의궤(孝明世子葬禮都監儀軌)』
  • 『익종추숭도감의궤(翼宗追崇都監儀軌)』
  •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 정옥자 외, 『조선시대 문화사』(상), 일지사, 2007.
  • 이현진, 「정조 초 영조의 國葬 절차와 의미」, 『泰東古典硏究』27, 2011.
  • 이현진, 「조선시대 종묘의 부묘 의례와 성격」『서울학연구』43,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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