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소묘(懿昭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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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와 혜빈홍씨(惠嬪洪氏) 사이의 적장자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의 사묘(祀廟).

개설

의소세손의 이름은 정(琔)이고 시호는 의소(懿昭)이며 정조의 동복형이다(『영조실록』 28년 3월 10일). 1751년(영조 27) 5월 13일 세손에 책봉되었으나 1752년(영조 28) 3살의 어린 나이로 통명전(通明殿)에서 요절하였다(『영조실록』 28년 5월 12일). 영조의 잠저(潛邸)였던 창의궁(彰義宮)사우(祠宇)를 건립하고 의소묘라 칭하였다(『영조실록』 28년 8월 2일).

위치 및 용도

의소묘는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내에 건립되었다. 고종 연간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사묘인 문희묘(文禧廟)의 신위(神位)와 합사(合祀)하여 영희전(永禧殿) 옛터로 옮겨 봉안했다. 의소묘는 영조 연간 왕위를 이을 세손으로 책봉되었던 의소세손에게 제향하기 위해 건립된 사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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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천 및 현황

의소묘의 건립은 의손세손이 훙서한 1752년에 이루어졌다. 영조의 잠저였던 창의궁 내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사묘인 효장묘(孝章廟) 동편에 건립되었다. 효장묘의 5분의 1정도로 축소된 비용과 규모로 공사가 진행되었다. 건립 당시 사당의 규모를 크게 하지 말고 체모를 유지할 수 있는 정도의 크기로 하라는 영조의 명이 있었기 때문이다.

1870년(고종 7) 의소세손의 무덤인 의소원(懿昭園)을 의녕원(懿寧園)으로 고치면서 의소묘도 영소묘(永昭廟)로 개호(改號)하였다(『고종실록』 7년 12월 10일).

1900년(광무 4)에는 문효세자의 사묘인 문희묘의 신위와 함께 영희전 옛터로 옮겨 봉안했다. 옮길 당시 비용이 32,138원 남짓 들었다. 1908년(융희 2) 7월 23일 황실의 제사 제도를 개정하면서 영소묘의 신위는 무덤 앞에 묻고 제사는 1년에 한 번 지냈다. 해당 궁과 사당은 모두 국유로 이속시키면서 의소묘의 사우는 훼철되었다.

형태

의소묘의 공간 구성과 형태는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의 내용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중심이 되는 정우(正宇)는 9칸이고, 이안청(移安廳) 1칸, 중배설청(中排設廳) 2칸, 동산문(東山門) 1칸을 내담(內牆) 40칸이 둘러싸고 있다. 밖으로 신삼문(神三門)과 제삼문(第三門)이 자리하고 있다. 의소묘의 특이한 부분은 정우 뒤쪽의 담장이 산릉(山陵)의 곡장(曲墻)과 같은 형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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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의소묘영건청의궤(懿昭廟營建廳儀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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