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훈(朴宗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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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773년(영조 49)~1841년(헌종 7) = 69세]. 조선 후기 정조~헌종 때 활동한 문신. 좌의정(左議政)을 지냈다. 자는 순가(舜可)이고, 호는 두계(荳溪)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고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군수(郡守)박참원(朴參源)이고, 어머니 한산 이씨(韓山李氏)는 우의정이사관(李思觀)의 딸이다.

정조~헌종 시대 활동

1798년(정조 22)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1802년(순조 2) 정시(庭試)문과(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였다. 그 뒤 정자(正字)가 되고, 1804년(순조 4) 2월 규장각(奎章閣)대교(待敎)가 되었는데, 경연(經筵)에 나아가 임금의 물음에 답하였다. 1806년(순조 6) 9월 의정부 사인(舍人)이 되었다. 1807년(순조 7) 4월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고, 이어 승지(承旨)가 되었다가 10월 성균관(成均館)대사성(大司成)이 되었다. 1808년(순조 8) 9월 다시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09년(순조 9) 함경도 감영 관하의 많은 민가가 화재를 당하자 승지로 함흥부 위유사(咸興府慰諭使)가 되어 피해민을 위유하였다. 그 해 3월에 함경도에서 돌아와 그 실화(失火) 상황을 보고하기를, “계해년(순조 3)에는 2,700호(戶)였는데, 이번에는 1,800호입니다. 계해년처럼 많지는 않지만, 그 참담하고 딱한 정상은 같습니다.” 하였다. 그 해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12년(순조 12)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보덕(輔德)이 되었고, 11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다. 1813년(순조 13) 1월 승지로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가자되었다. 1814년(순조 14) 2월 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이 되었고, 6월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다.

1815년(순조 15) 12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같은 달 홍문관(弘文館)부제학(副提學)이 되었다. 1816년(순조 16) 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윤6월 비변사(備邊司)제조(提調)로 차출되었다가 그 해 또 다시 승지가 되었다. 1817년(순조 17) 10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 1818년(순조 18) 5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었고, 이어 승지가 되었다가 규장각 직제학(直提學)이 되었다. 그해 4월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는데, 8월에 전라도에 재해가 있어 전주(全州) 등 19읍에 유실된 민가(民家)는 637호이고, 익사자는 43인이었으므로 그는 각별히 고휼(顧恤)에 힘썼다. 1820년(순조 20) 3월 예문관(藝文館)제학(提學)이 되었고, 6월 이조 참판(參判)이 되었으며 8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우부빈객(右副賓客)이 되었다. 1822년(순조 22) 12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었다가 같은 달 홍문관 제학(提學)이 되었다. 1823년(순조 23) 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2월 홍문관 제학이 되었는데, 3월 자헌대부(資憲大夫)에 가자되었다. 그 해 4월 세자시강원 우빈객(右賓客)이 되었고, 7월 진하정사(進賀正使)가 되어 청(淸)나라 연경(燕京)에 다녀왔다. 그 해 12월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이 되었다.

1824년(순조 24) 1월 예문관 제학이 되고, 3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고, 4월 세자시강원 좌빈객(左賓客)이 되었으며, 5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7월 예조 판서가 되어 북도의 여러 능침(陵寢)을 일체 봉심(奉審)하였다. 그 해 윤7월 초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윤7월 말경 홍문관 제학이 되었으며, 그 뒤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가 광주목사(廣州牧使)가 되었다. 그 해 같은 달 말경에 세자시강원 우빈객이 되었고, 이어 또 다시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25년(순조 25) 1월 형조 판서가 되고, 2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고, 3월 초순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3월 하순 평안도 관찰사가 되었다. 1826년(순조 26) 3월 중순 규장각 제학이 되었다가 같은 달 하순에 병조 판서가 되었고, 4월 세자시강원 우부빈객이 되었으며, 5월 다시 병조 판서가 되었다. 1827년(순조 27) 3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고, 4월 세자시강원 좌빈객이 되었고, 5월 대사헌이 되었다. 그 해 윤5월 상순 한성부 판윤이 되었는데, 윤5월 중순에 호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호조 판서로서 진달하여 아산창(牙山倉)의 조운(漕運)에 필요한 물품으로 떼여 유치(留置)한 미수전(未收錢) 1만 3천냥을 탕감해 주게 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세자시강원 우빈객이 되었고, 11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28년(순조 28) 1월 호조 판서가 되고, 5월 공조 판서가 되었고, 6월 의금부(義禁府)판사(判事)가 되었다. 그 해 7월 병조 판서가 되었고 11월 우빈객이 되었다. 1829년(순조 29) 2월 숭록대부(崇祿大夫)에 가자되고, 3월 공조 판서가 되었으며 9월 의정부 우참찬(右參贊)이 되었는데, 11월 유선(諭善)을 겸하였다. 1830년(순조 30) 5월 호조 판서가 되었고,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었다. 1831년(순조 31) 3월 의금부 판사가 되고, 7월 형조 판서가 되었고, 8월 병조 판서가 되었으며, 10월 함경도 관찰사가 되었다. 1832년(순조 32) 12월 좌빈객이 되었다. 1833년(순조 33) 3월 형조 판서가 되고, 6월 원접사(遠接使)로 차출되었으며, 7월 이조 판서가 되었다. 1834년(순조 34) 3월 의금부 판사가 되었고, 4월 예조 판서가 되었으며, 7월 의정부 우의정(右議政)이 되었다. 같은 해 순조가 돌아가자 우의정으로서 그 행장(行狀)을 지었다.

1834년(헌종 즉위) 11월 고부 정사 겸 주청사(告訃正使兼奏請使)로 청나라 연경에 갔다가 1835년(헌종 1) 4월에 돌아왔다. 1836년(헌종 2) 7월 다시 우의정이 되었다. 1837년(헌종 3) 1월 『순조실록(純祖實錄)』의 편찬을 위한 실록청(實錄廳) 총재관(摠裁官)이 되었고, 그 해 의정부 좌의정(左議政)이 되었다. 그는 좌의정 때인 그 해 대왕대비(大王大妃)께 주달하여 같은 해 10월 관북(關北)의 옛 환미(還米) 가운데 계미년(癸未年: 순조 23) 전에 받아들이지 못했던 16,400여 석을 탕감하게 하였다. 1838년(헌종 4) 1월 풍양 조씨(풍양조씨) 세도의 압력으로 상소하여 상직(相職)을 사임, 중추부(中樞府)판사(判事)가 되었다. 1839년(헌종 5) 2월에는 영릉(寧陵)작헌례(酌獻禮)영릉(英陵)봉심(奉審)을 마치고 돌아왔다. 1841년(헌종 7) 8월 8일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69세이다.[『헌종실록(憲宗實錄)』헌종 7년 8월 8일 「박종훈 졸기」] 저서로는 『사례찬요(四禮纂要)』가 있고, 선사본(繕寫本)인 시문(詩文)과 잡저(雜著)를 편차(編次)했다.

성품과 일화

그는 경서(經書)를 연구하여 박학 다문(博學多聞) 하였고, 예악(禮樂) · 율령(律令) · 산수(刪修)에도 능통하였으며, 시문(詩文)과 서도(書道)에도 뛰어났다. 그는 정밀하고 단아한 자태와 재지가 있었다. 그의 그 단아한 자태와 매우 밝은 재주는 나라를 빛내는 문채일 뿐만 아니라, 순조에서 선발한 바이고 헌종이 의지하여 존중하던 바였다.[『헌종실록(憲宗實錄)』헌종 7년 8월 8일 「박종훈 졸기」]

시호와 가족

그의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첫째부인 능성 구씨(綾城具氏)는 구제원(具悌元)의 딸이고, 둘째부인 성주 이씨(星州李氏)는 이경필(李景弼)의 딸이다.

참고문헌

  • 『순조실록(純祖實錄)』
  • 『헌종실록(憲宗實錄)』
  • 『국조방목(國朝榜目)』
  • 『경산집(經山集)』
  • 『근역서화징(槿域書畫徵)』
  • 『청선고(淸選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