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姜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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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7년(명종12)~1603(선조36) = 47세]. 조선 중기 선조(宣祖) 때 활동한 문신. 자는 덕휘(德輝), 호는 동곽(東郭)이다. 본관은 금천(衿川)인데, 강감찬(姜邯贊)의 후손이다. 사간원(司諫院)사간(司諫)강숙돌(姜叔突)의 증손이며, 우의정(右議政)강석기(姜碩期)의 아버지이다. 황강(黃江)김계휘(金繼輝)의 문인이고, 김장생(金長生), 민인백(閔仁伯) 등과 가깝게 교유하였다.

선조 시대 활동

1583년(선조16) 알성시(謁聖試)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정자(正字)·주서(注書)를 거쳐서 1587년(선조20) 사헌부(司憲府)감찰(監察)에 임명되었다. 모친상을 끝마친 뒤에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1589년 사간원정언(正言)이 되었을 때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일으키려다가 복주(伏誅)되자 그는 기축옥사(己丑獄死)가 확대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였다. 1590년 종묘서(宗廟署)영(令)에 특별히 임명되었는데, 종묘(宗廟)에 도둑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1591년(선조24) 성균관전적(典籍)·직강(直講)과 예조(禮曹)정랑을 거쳐서 사헌부지평(持平)에 임명되었다. 이보다 앞서 1589년(선조22)에 이산해(李山海), 정인홍(鄭仁弘), 유성룡(柳成龍) 등을 역당(逆黨)이라고 상소문을 올린 전라도 유생(儒生) 정암수(丁巖壽) 등을 선조가 처벌하려고 하자, 강찬이 이것을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런데 1591년(선조24)에 이것이 다시 문제가 되어 단천군수(端川郡守)로 좌천되었다.

임진왜란 때 활약

단천군수로 부임하여 고을 사람들을 모아 놓고 병무(兵武)를 강습시키고 상금을 걸어 활쏘기를 권장하니, 온 고을이 이에 호응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서 왜구(倭寇)에게 서울이 함락되자,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였다. 그때 함경북도의 각 고을이 모두 왜적에게 점령당하였으나, 오로지 단천(端川)만은 강찬의 지휘 아래 모두 죽을 각오로 왜적과 싸워서 물리쳤으므로, 왜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때 두 왕자가 회령(會寧)에서 왜적의 포로가 되었는데, 강찬은 결사대를 조직하여 왕자들을 구출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행재소(行在所)에 사람을 보내어 회령 사태를 보고하였다.

선조가 회령부사(會寧府使)에 임명하여 왕자 사태를 수습하게 하였고, 1594년(선조27) 승정원(承政院)동부승지(同副承旨)로 발탁하였다. 우승지(右承旨)를 거쳐서, 황해도관찰사(黃海道觀察使)가 되었으나, 부친상을 당하였다. 3년상을 끝마치고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황해도절도사(黃海道節度使)에 임명되어, 명(明)나라 제독(提督)마귀(麻貴)와 함께 군사를 이끌고 영남 지방으로 가서 울산(蔚山)에 주둔한 왜군과 싸웠다.

왜란 이후 당쟁

왜란 이후 동인(東人)과 서인(西人)의 당쟁이 격화되어, 1599년(선조32) 해주목사(海州牧使)로 좌천되자, 부임한 지 겨우 열흘 만에 사임하였다. 1600년 병조(兵曹)참지(參知)를 거쳐서 좌승지(左承旨)로 발탁되었고, 병조참의로 전임되었다. 1601년 이조참의에 임명되어, 전선(銓選)을 맡아서 청렴한 자를 공정하게 임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반대파 동인들의 비난만 받았다. 그와 대립하던 기자헌(奇自獻)이 정권을 잡고, 1602년 그를 여주목사(驪州牧使)로 좌천시키자, 벼슬을 버리고 해서(海西) 지방으로 은거하여 연안(延安)에 우거하였다. 1603년(선조36) 병으로 갑자기 죽으니, 나이가 47세였다.

성품과 일화

성품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벼슬한 지 수십 년 동안 집 한칸 마련하지 못하여 남의 집을 빌려서 살았다. 앉거나 누울 때 베개와 방석도 갖추지 못하여 추울 때나 더울 때나 다만 대자리 한 조각만 깔았다. 평생 동안 가산(家産)에 신경을 쓰지 않아 종종 쌀독이 비곤 했으나, 그는 태연하게 말하기를, “나는 다행히 벼슬아치가 되었으니 고금(古今)에 관리가 굶어 죽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하였다. 관직에서 물러나 한가하게 지낼 때에는 정색을 하고 단정히 앉아 있으면, 누가 범할 수 없을 만큼 엄숙했다. 때때로 벗이나 친한 사람이 찾아오면 술잔을 잡고 즐겁게 웃으면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하였으나, 세속에 관한 일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조정에서 청백리(淸白吏)로서 그를 천거하였으나, 그 소식을 듣고 단호히 거절하였다고 한다. 아들 강석기(姜碩期)의 성품도 아버지 강찬을 똑같이 빼닮았다고 한다.

묘소와 비문

왜란이 끝난 뒤 1605년(선조38) 왜적을 물리친 전공으로 선무종훈(宣武從勳)에 추록(追錄)되었다. 묘소는 경기도 금천(衿川) 아방리(鵝房里) 동쪽에 있는데, 신흠(申欽)이 지은 묘지명(墓誌銘)이 남아 있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 『기축록(己丑錄)』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사계전서(沙溪全書)』
  • 『상촌집(象村集)』
  • 『청음집(淸陰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