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인백(閔仁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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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552년(명종7)∼1626년(인조4) = 75세]. 조선 중기 선조∼인조 때의 문신. 자는 백춘(伯春), 호는 태천(苔泉)이다. 본관은 여흥(驪興)이고, 주거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부정(副正)민사권(閔思權)이고, 어머니 서하노씨(西河盧氏)는 노인(盧禋)의 딸이다. 훈련도감(訓練都監)민인길(閔仁佶)의 형이고, 성혼(成渾)의 문인이다.

선조∼인조 시대 활동

1573년(선조6)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1584년(선조17) 별시(別試)문과(文科)에 장원 급제하였는데, 나이가 33세였다. 성균관 전적(典籍)에 임명되었다가, 사헌부 감찰(監察)로 옮겼는데, 항상 지제교(知製敎)를 겸임하였다. 그때 송강(松江)정철(鄭澈)과 가까운 서인(西人)이라는 이유로, 동인(東人)의 미움을 받아서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좌천되었다. 1589년(선조22) 전라도 진안현감(鎭安縣監)에 임명되었는데, 이때 정여립(鄭汝立)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발각되자 자신의 서사(書舍)가 있던 진안 경내의 죽도(竹島)에 숨었다. 민인백(閔仁伯)이 군사를 이끌고 죽도로 가서 서사를 포위하니, 정여립은 측근 몇 사람과 함께 자살을 하였다. 그는 정여립의 아들 정옥남(鄭玉男)과 나머지 잔당을 잡아서 수습한 시신들과 함께 서울로 보냈다. 정철이 위관(委官)이 되어 <정여립의 옥사>를 다스리면서 이발(李潑) 등 동인 1천여 명을 연루시켜서 죽이고, 전라도를 반역향(反逆鄕)으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기축옥사(己丑獄死)>이다. 민인백은 그 공으로 예조 참의에 임명되고, 평난공신(平難功臣) 2등으로 책훈(策勳)되었다. 1590년(선조23) 판결사(判決事)에 임명되었다가 나주목사(羅州牧使)로 나갔다. 이듬해 충주목사(忠州牧使)로 나갔다가 황주목사(黃州牧使)로 옮겼다.

1592년(선조25)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날 때 황주목사로 있었는데, 선조가 의주(義州)로 피난하는 길에 황주에서 며칠 묵었다. 황주 사람들이 임금 일행을 온갖 정성으로 뒷바라지하였으므로 선조가 칭찬하였다. 전쟁 중에 부친상을 당하였고, 3년 상례를 마치자 1595년(선조28) 중추부 첨지사에 임명되었다. 이어 명(明)나라 황제의 생일(聖節)을 축하하는 성절사(聖節使)로 중국 북경을 다녀와서 청주목사(淸州牧使)로 나갔다, 1597년(선조30) <정유재란(丁酉再亂)>이 일어나 명나라의 원병이 파견되자, 중국 장수를 맞이하는 접반사(接伴使)에 임명되었다. 1598년(선조31) 종2품하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품(陞品)하고 여양군(驪陽君)에 봉해졌다.

1601년(선조34) 변산(邊山)의 재목을 함부로 베어서 배를 만들어 사사로이 쓰고 있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고, 동생인 부안현감(扶安縣監)민인길(閔仁佶)과 함께 파직되었다. 1604년(선조37) 주청사(奏請使)의 부사(副使)에 임명되어 정사(正使)이정귀(李廷龜)와 함께 명나라 북경에 가서 세자(世子) 책봉을 주청하고, 황제의 허락을 받아서 돌아왔다. 1606년(선조39) 조사(詔使)를 영접하는 안주(安州)의 관반사(館伴使)에 임명되었다. 1608년(광해군즉위) 안변부사(安邊府使)로 나갔다가 연달아 삼척부사(三陟府使) · 홍주목사(洪州牧使)를 역임하였다. 1613년(광해군5) 한성부우윤(漢城府右尹)에 임명되었고, 1621년(광해군13) 정2품하 자헌대부(資憲大夫)로 승진하여 중추부 지사에 임명되었다. 1626년(인조4) 3월 초10일 병으로 집에서 죽으니, 향년이 75세였다.

저서로는 『태천집(苔泉集)』이 있다.

성품과 일화

민인백의 성품과 자질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그는 남달리 총명하였으며 문사(文詞)에도 뛰어났다. 그러므로 과장(科場)에서 글재주를 겨루면 으레 일등을 차지하였는데, 선조가 그의 시권(試券)을 보고 매우 칭찬하며 크게 낭독한 적도 있었다. 문과에 장원 급제한 뒤에는 송강정철의 추천과 명가(名家)의 자제라는 배경으로 청요직(淸要職)에 뽑혔다가 서인 정철의 일파로 몰려서 안협현감(安峽縣監)으로 좌천되기도 하였다. 이때 그는 부임하지 말라는 친구의 권유에 임금을 섬기는 데 내외직을 가리지 않는다고 하며 부임하였다.

그는 우계(牛溪)성혼의 문하에서 『소학(小學)』을 배웠는데, 성혼은 그가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인물이라고 칭찬하였다. 민인백도 평생 벼슬할 마음을 갖지 않았던 것은 성혼의 가르침 때문이라 말하고, 그 뜻을 지키기 위해 명성을 얻을 만한 지위를 일부러 피하였다. 1608년(광해군즉위) 당로에 있는 자가 대사헌 자리를 주겠다고 그를 유혹한 적도 있으나 그는 사양하였다.

묘소와 후손

시호는 경정(景靖)이다. 묘소는 경기도 통진(通津)의 비아산(比兒山) 선영에 있는데, 우암(尤庵)송시열(宋時烈)이 지은 행장(行狀)이 남아 있다. 부인 정씨(鄭氏)는 사헌부 감찰정희린(鄭姬隣)의 딸인데, 자녀는 2남 4녀를 두었다. 장자 민성(閔垶)사직(司直)을 지냈고, 차자 민청(閔埍)은 무과에 급제하여 수사(水使)를 지냈다. 맏아들 민성은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가족을 데리고 강화도에 피난을 갔다가, 강화성이 함락되자 전등사 아래에서 아들 3형제 내외, 딸 4형제, 누이, 첩 등과 함께 자결하였다.

관력, 행적

참고문헌

  • 『선조실록(宣祖實錄)』
  •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 『간이집(簡易集)』
  • 『기축록(己丑錄)』
  • 『난중잡록(亂中雜錄)』
  • 『상촌집(象村集)』
  •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 『송자대전(宋子大全)』
  •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우계집(牛溪集)』
  • 『응천일록(凝川日錄)』
  • 『임하필기(林下筆記)』
  • 『혼정편록(混定編錄)』
  • 『송강집(松江集)』
  • 『서애집(西厓集)』
  • 『오리집(梧里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