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필명(朴弼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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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론

[1658년(효종 9)~1716년(숙종 42) = 59세]. 조선 후기 숙종(肅宗) 때의 문신. 사간원(司諫院)대사간(大司諫)사헌부(司憲府)대사헌(大司憲) 등을 지냈다. 자는 중량(仲良)이고, 호는 인재(忍齋)이다. 본관은 반남(潘南)이며, 거주지는 서울이다. 아버지는 금창부위(錦昌副尉) 경헌공(敬憲公)박태정(朴泰定)이고, 어머니 전주 이씨(全州李氏)는 소현세자(昭顯世子)의 딸 경녕군주(慶寧郡主)이다. 양할아버지는 중추부(中樞府)첨지사(僉知事)박세면(朴世冕)이며, 친할아버지는 박세기(朴世基)이다. 양증조할아버지는 박해(朴垓)이고, 친증조할아버지는 박병(朴炳)이다. 부인 이씨(李氏)는 이흥직(李興稷)의 딸이다.

숙종 시대 활동

1697년(숙종 23) 정시(庭試)문과(文科)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였다. 이듬해인 1698년(숙종 24) 4월 예문관(藝文館) 검열(檢閱)이 되었으며, 1699년(숙종 25)에는 예문관 봉교(奉敎)가 되었다.[『숙종실록(肅宗實錄)』숙종 24년 4월 4일, 숙종 25년 8월 6일] 1701년(숙종 27) 1월 사간원 정언(正言)이 되었고, 그 해 3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사서(司書)를 거쳐, 4월에는 사헌부 지평(持平)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7년 1월 20일, 숙종 27년 3월 27일, 숙종 27년 4월 5일] 이어 5월에 다시 사간원 정언이 되었으며, 그 해 10월에는 동지정사(冬至正使)강현(姜鋧)과 동지부사(冬至副使)이선부(李善溥)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청(淸)나라에 갔다가, 1702년(숙종 28) 3월에 돌아왔다.[『숙종실록』숙종 27년 5월 20일, 숙종 27년 10월 29일, 숙종 28년 3월 18일]

이어 세자시강원 문학(文學)과 세자시강원 사서(司書),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등을 거쳐서, 1703년(숙종 29) 10월 도당록(都堂錄)에 수석으로 올랐다.[『숙종실록』숙종 28년 3월 28일, 숙종 28년 5월 14일, 숙종 28년 5월 25일, 숙종 28년 10월 21일, 숙종 29년 10월 19일] 그리고 11월에 홍문관(弘文館)부수찬(副修撰)을 거쳐 홍문관 부교리(副校理)가 되었으며, 같은 달 하순에 북평사(北評事) 겸 감진어사(監賑御使)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29년 11월 2일, 숙종 29년 11월 12일, 숙종 29년 11월 27일] 1704년(숙종 30) 7월 홍문관 교리(校理)를 시작으로 홍문관 부수찬과 홍문관 부교리, 홍문관 수찬(修撰), 사간원(司諫院)헌납(獻納), 사헌부 지평을 역임하고, 1705년(숙종 31) 12월 이조 정랑(正郞)이 되었다.[『숙종실록』숙종 30년 7월 8일, 숙종 30년 10월 10일, 숙종 31년 2월 18일, 숙종 31년 3월 2일, 숙종 31년 9월 9일, 숙종 31년 12월 27일] 이듬해인 1706년(숙종 32) 1월에는 겸사서(兼司書)가 되었고, 이후 다시 홍문관 수찬과,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헌납 등을 거쳐 1706년(숙종 32) 5월에는 승정원(承政院)승지(承旨)로 특진되었다.[『숙종실록』숙종 32년 1월 11일, 숙종 32년 2월 4일, 숙종 32년 2월 8일, 숙종 32년 4월 30일, 숙종 32년 5월 12일] 이어 사간원 대사간과 승정원 승지를 돌아가며 역임하다가, 1707년(숙종 33) 6월 강원도관찰사(江原道觀察使)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32년 7월 12일, 숙종 32년 7월 26일, 숙종 33년 6월 3일] 이어 다시 승정원 승지가 되었으며, 1708년(숙종 34) 6월 전라도관찰사(全羅道觀察使)가 되었는데, 1709년(숙종 35) 2월 금위군(禁衛軍) 동원을 소홀히 한 죄로 사간원의 논계(論啓)에 따라 파직된 후에 유배되었다.[『숙종실록』숙종 33년 9월 12일, 숙종 34년 6월 7일, 숙종 35년 2월 17일, 숙종 35년 3월 3일] 그러나 그 해 8월에 다시 사간원 대사간이 되었고, 곧 승정원 좌승지(左承旨)가 되었으며, 그 해 11월 승정원 도승지(都承旨)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35년 8월 7일, 숙종 35년 9월 4일, 숙종 35년 11월 19일]

1710년(숙종 36) 1월 숙종의 건강이 나빠지면서 그는 다시 추고 당하였으나, 그 해 12월 다시 승정원 도승지가 되었다.[『숙종실록』숙종 36년 1월 10일, 숙종 36년 12월 7일] 이어 1711년(숙종 37) 3월 경기도관찰사(京畿道觀察使)가 되었다가, 이듬해인 1712년(숙종 38) 1월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으며, 승정원 도승지를 역임하였다.[『숙종실록』숙종 37년 3월 5일, 숙종 38년 1월 11일, 숙종 38년 3월 3일] 그리고 1716년(숙종 42) 3월 다시 사헌부 대사헌이 되었다가, 그 해 세상을 떠나니 나이는 59세였다.[『숙종실록』숙종 42년 3월 19일]

무산향교 설치와 경서 반사

1703년(숙종 29) 11월 박필명(朴弼明)이 북평사 겸 감진어사가 되어, 이듬해인 1704년(숙종 30) 1월 관북(關北)의 진제(賑濟)를 감독하러 갔었다. 이 때 무산(茂山)은 북도(北道)에 새로 설치한 고을이었는데, 무산향교(茂山鄕校)가 겨우 세워지기는 하였으나 생도들이 학업을 닦을만한 서적이 없었다. 그가 임무를 마치고 돌아와서 그 사실을 숙종에게 보고하니, 숙종은 감영(監營)에서 경서(經書)를 인쇄하여 내려 주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시독관(侍讀官)으로서 경서를 무산향교에 보냈다.[『숙종실록』숙종 30년 10월 13일]

참고문헌

  • 『숙종실록(肅宗實錄)』
  •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 『청선고(淸選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