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제(賑濟)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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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표제 | 진제 |
한글표제 | 진제 |
한자표제 | 賑濟 |
상위어 | 구휼(救恤), 진휼(賑恤), 황정(荒政) |
관련어 | 백급(白給), 진급(賑給), 진제장(賑濟場) |
분야 | 경제/재정/환곡 |
유형 | 법제·정책 |
지역 | 대한민국 |
시대 | 조선 |
집필자 | 문용식 |
조선왕조실록사전 연계 | |
진제(賑濟) | |
조선왕조실록 기사 연계 | |
『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숙종실록』 29년 3월 10일, 『정조실록』 8년 3월 15일, 『영조실록』 28년 8월 29일 |
흉년 때 굶주린 사람에게 죽이나 곡물을 무상으로 지급하던 진휼정책.
개설
흉년으로 굶주린 사람이 많아지면 죽이나 곡물을 무상으로 분급하였는데, 이러한 진제는 시기마다 다른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15세기에는 의창(義倉)을 활용하여 전국적 규모의 무상분급을 시행하였고, 16세기 들어서는 비축 곡물이 부족하여 사족이나 부민(富民)의 사적 구제를 강조하는 경향을 보였다. 17세기에는 국가 비축 곡물이 확보되자 진휼정책이 죽의 지급에서 곡물 지급으로 변화하였고, 18세기에는 기민(飢民)에게 지급하는 곡물의 양과 지급하는 방식을 확립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는 초반의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환곡의 수량이 줄면서 진휼정책이 쇠퇴하였다.
제정 경위 및 목적
농업 중심의 사회에서 자연재해와 전염병 등은 농업 생산에 악영향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사회 동요로 이어졌다. 이를 방지하기 위하여 평상시에는 환곡을 활용하여 농민의 재생산 기반을 유지하였다. 또한 흉년이 들면 국가 보유 곡물이나 민간 비축곡을 활용하여 굶주린 사람에게 무상으로 죽과 곡물을 지급하여 농민의 토지 이탈을 방지하였다.
내용
조선초기의 의창은 무이자로 환곡을 분급하거나, 기근이 들었을 때 무상으로 곡물을 분급하였다. 흉년에 무상으로 곡물을 분급하는 진제를 시행할 경우에는 환곡과는 달리 기근의 정도나 기민의 수를 파악하여 지방관이 직접 일정한 양의 진제 시행을 정부에 요청하였다. 정부에서 진제 시행을 허락하면 지방관은 고을 내 몇 개 장소에 진제장을 설치하여 기민들이 나와 죽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고, 그 운영은 책임자인 감고(監考)에게 맡겼다. 이때 기민에게는 나이에 따라 정해진 양의 곡물을 나누어 주거나 죽을 제공하였다. 시기와 상황에 따라 제공된 양은 변하였다.
1419년(세종 1)에는 충청도·함경도·경기·황해도·강원도 등의 기민 190,000여 명에게 수천 석의 곡식과 된장 등을 지급하였다. 당시 기민에게 지급된 곡식·된장 등의 정확한 양은 알 수 없다. 대체로 18세기 후반 정조대 이전까지는 흉년에 발생한 기민의 수와 지급한 곡물의 액수 등을 정밀하게 기록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의창은 평소에 환곡을 지급하고 흉년에는 무상으로 곡식을 분급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곡물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또한 당시의 환곡은 이자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1423년(세종 5)과 1448년(세종 30)에 군자곡(軍資穀) 1,000,000석 이상을 의창곡에 보충하였지만 의창곡은 계속해서 줄어들었다. 그와 함께 의창을 중심으로 한 광범위한 진제의 시행은 위축되었다.
변천
1. 16세기: 사족이나 부민의 사적 구제 강화
16세기 진제정책은 국가 비축곡의 부족으로 사족이나 부민의 사적 구제를 강화하는 경향을 띤 점이 특징이었다. 16세기에도 15세기와 마찬가지로 흉년이 들면 진제장을 설치하여 죽이나 양식을 지급하였다. 진제의 대상은 환곡분급에서 제외된 토지가 없는 빈농이나 홀아비·과부·고아·자식 없는 늙은이 등의 환과고독(鰥寡孤獨)이었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진제를 시행하기 이전에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지방에서는 감사와 도사(都事)가 기민의 수를 조사하여 파악하도록 하고, 해당 관리가 직접 방문하여 조사하였다. 사족과 과부들이 진제장에 나오는 것을 꺼려할 경우에는 진제장에서의 죽 지급보다는 양식을 받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구호 기간은 1~4월, 늦어도 5~6월경에는 마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극심한 재해가 발생하면 세전(歲前)에 분급이 시작되거나, 7~8월까지 분급이 연장되기도 하였다.
서울과 지방의 진제 시행 절차는 약간 차이가 있었다. 서울에서는 한성부가 기민의 등급을 나누어 이름을 기록하고 진휼청이나 해당 기관에 보고하였다. 지방에서는 기민을 구분하여 이름을 기록하여 감사에게 올리면 감사는 이를 조사하여 정부에 보고하였다. 정부는 이를 검토하고 진제장 설치나 곡물 분급 여부를 결정하였다. 각 고을에서는 이에 따라 곡식을 마련하여 분급하였다.
16세기에는 진제 실시가 전반적으로 위축되는 가운데 국가에서도 사적 구제를 강조하였다. 여유가 있는 사족이나 부민들이 개인 비축곡을 이용하여 기민을 구제하도록 한 것이었다. 부민이 직접 기민을 보호하고 구제하도록 하고, 그 대가로 국가는 부민의 부역이나 조세를 면제하거나 버려진 아이들을 구제하여 그들을 노비로 삼는 것을 허용하였다. 흉년에 버려진 아이들에 대한 조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하였다. 15세기에는 관이 주도하다가 16세기에 들어서 부민이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유기아수양(遺棄兒收養)’을 주도하도록 하였다.
16세기 들어서 진휼청을 설치하였으나, 흉년에만 설치하였다가 구호사업이 끝나면 폐지하는 임시 기구로 운영하였다.
2. 17세기: 진휼청의 상설화
17세기 후반 진제의 시행에서는 죽의 지급을 매우 중요하게 여기었다. 여기에 대한 자세한 규정은 「진휼사목」으로 반포되었다(『숙종실록』 29년 3월 10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 조선왕조는 재정 부족에 허덕이고 있었으며, 정부 비축 곡물의 부족으로 부민의 비축곡을 관에서 징발하여 사용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강압적인 민간 출연(出捐) 방식인 관봉(官封)은 16세기부터 시작되었다.
연대기에 나타난 현종 연간의 진휼은 이전 시기와 비교하면 상당히 세밀히 기록되어 있었다. 현종 연간의 진휼은 기민 수를 중심으로 기록되어 있고 기민을 구제하는 데 사용된 곡물의 수치는 정리되어 있지 않았다. 기록에 따르면, 현종 연간에는 몇 해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마다 각 지역에서 진휼사업을 실시하고 있었다. 또한 이 시기는 전염병이 만연하던 시기였으므로 기근과 전염병이 함께 닥쳐 심각한 피해를 초래하고 있었다. 특히 1671년(현종 11)과 1672년(현종 12)의 ‘경신대기근’과 전염병의 유행은 백만 명이 사망하였다고 기록될 만큼 참혹하였다.
현종 연간 진휼사업의 특징은 서울에서 상평청·진휼청이 활발한 진휼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시기의 진휼청은 아직 상설화되지 않았고 진휼이 끝나면 폐지되는 임시 기구였다. 그러나 빈번히 발생하는 기근에 거의 해마다 진휼청이 설치되면서 진휼청의 상설화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후 진휼청은 상평청을 제치고 진휼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며 환곡을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공명첩(空名帖) 발급 가격이 낮아지면서 공명첩이 진휼의 주요 재원으로 등장하였다.
숙종 연간에도 재해는 빈발하여 거의 해마다 기근이 들었다. 숙종 연간 진휼정책의 가장 큰 특징은 기민에 대한 구호 활동이 죽의 지급에서 건량의 무상지급으로 전환되었다는 점이다. 죽의 지급보다 건량의 지급에는 더 많은 곡물이 소요되었다. 그럼에도 이를 시행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진휼을 위한 비축곡이 이전 시기에 비하여 증가하였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17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진휼정책에서 가장 큰 특징은 진휼을 담당하는 부서로 진휼청이 상설화되었다는 점과 진휼을 위한 비축곡의 증가로 건량 지급이 가능해졌다는 점이다.
3. 18세기: 진휼방식의 확립
18세기 후반 진휼정책에서 중요한 변화는 진휼방식이 확립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때에는 환곡을 분급받는 환민(還民)과 진휼곡을 무상으로 분급받는 진민(賑民)으로 구분하여 무상분급의 대상을 분명히 하였다(『정조실록』 8년 3월 15일). 이때 무상으로 곡식을 지급받는 진민을 기록한 장부를 진안(賑案)이라 하였다. 무상으로 분급하는 곡식의 지급액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성인 남자 1일 지급액이 쌀 5홉으로 고정되었다. 이처럼 기민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분급하는 양이 나이와 성별에 따라 쌀 5·4·3되로 고정되어 10일 1회꼴로 1개월에 3회 분급하는 진식(賑式)제도가 확립되었다(『영조실록』 28년 8월 29일). 이 제도가 확립되면서 흉년이 든 당해 연도에 기민을 선발하여 다음 해에 진휼사업을 시행할 때 필요한 곡물의 수량을 대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즉, 진휼에 드는 곡식의 양을 미리 파악하여 그에 대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18세기 후반 조선왕조의 진휼정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는 가운데 진휼의 곡물을 무상으로 분급하는 제도가 보다 구체적으로 구분되었다. 즉, 진휼의 곡물은 공진(公賑)·사진(私賑)·구급(救急)으로 구분되어 무상으로 분급하였다. 국가 비축 곡물을 사용하면 공진이라 하고, 지방관이 스스로 마련하여 무상으로 분급하면 사진이라 하였으며, 진휼할 인구가 적어서 국가나 관청의 공곡(公穀)을 사용하지 않으면 구급이라고 하였다. 공진과 사진의 구분은 관 주도의 진휼사업에서 필요한 곡물에 국가 비축 곡물을 사용하였는지 여부로 구분하였지만, 민간 차원에서 개인이 진휼사업을 시행하는 것도 사진이라 하였다.
이처럼 진휼 곡물의 무상분급제도가 구체적으로 정해졌지만 영조 연간에는 진휼의 기록을 정부에서 전국적으로 정리하여 파악한 것 같지는 않다. 이러한 기록은 정조 연간부터 나타났다. 이는 영조 연간까지는 진휼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시행이 전개되었지만 제도의 완비까지 이루어지지는 않았음을 의미한다.
18세기 후반 정조대에는 특히 진휼정책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그에 따라 역대 진휼사업을 정리한 「팔도진곡가령(八道賑穀假令)」, 「혜정연표(惠政年表)」와 「혜정요람(惠政要覽)」이 편찬되었다. 한편 『정조실록』에서는 기민 수와 분급 곡물을 정리한 기록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기록 양식은 이후의 『조선왕조실록』 진휼 관련 기록의 원형이 되었다. 이러한 편찬과 기록 양식의 변화는 18세기 조선왕조의 진휼사업이 확대되고, 전형화하는 과정으로 파악할 수 있다.
진휼사업의 실태를 살펴보면, 53년의 재위 기간 동안 영조가 41회에 걸쳐 설진(設賑)을 시행하였다. 정조 연간에 이르면, 기민에게 무상으로 분급한 곡물의 액수와 기민의 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정부가 재해 시 곡물을 무상으로 분급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기록한 자료에 따르면, 1756년(영조 32)부터 1863년(철종 14년)까지 108년에 걸쳐 54회의 진휼사업이 시행되었다. 이것으로 평균 2년에 1회꼴로 전국적인 대규모 기근이나 일부 지역에 국한된 기근이 발생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82년(정조 6) 1,440,000명, 1783년 1,590,000명, 1784년 4,110,000명, 1787년 3,550,000명, 1790년 1,560,000명, 1793년 4,590,000명, 1795년 5,580,000명, 1798년 1,330,000명, 1799년 1,620,000명 이상에게 무상으로 곡물을 수만 석에서 수십만 석 지급하였다. 여기에서 제시한 기민의 수는 10여 차례 이상 지급한 기민의 총수인 연인원이었다.
4. 19세기: 진휼사업의 쇠퇴
19세기 초반의 극심한 자연재해로 인하여 조선 정부에서는 대대적인 진휼정책을 시행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환곡은 크게 줄어들었다.
1809년부터 1815년까지 7년간 계속적으로 각 지역에서 진휼사업이 시행되었다. 7년간 무상으로 곡물을 지급한 기민의 연인원은 1810년 8,400,000명, 1811년 830,000명, 1812년 2,080,000명, 1813년 2,490,000명, 1814년 790,000명, 1815년 5,530,000명 이상이었다. 이처럼 19세기 전반의 집중적인 기근의 발생과 무상 구제의 사업은 국가의 비축 곡물인 환곡의 감소를 초래하였다. 흉년으로 인하여 기민에게 곡물을 무상으로 분급하는 것은 대체로 1월부터 시작하므로 흉년이 발생한 시기는 구호사업을 시작한 전해였다. 1810년에는 연인원 8,400,000명의 기민이 발생하였다. 그중 전라도의 기민이 4,760,000명 이상으로 전라도가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었다.
환곡이 감소되는 상황 속에서 흉년은 계속되었다. 특히 1832년에서 1838년까지도 집중적인 흉년이 발생하여 1833년 2,650,000명, 1834년 1,720,000명, 1837년 1,110,000명, 1839년 880,000명, 1840년 1,160,000명 이상의 기민에게 식량을 지급하였다.
1840년 이후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진휼사업을 끝내고 보고한 기민 수와 소비한 곡식의 수량이 나타나지 않았다. 이는 진휼을 시행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기록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비변사등록』에서는 여전히 진휼사업을 시행한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1840년 이후에도 진휼사업이 계속 시행되었지만 이전과는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첫째, 진휼곡이 줄어들었다. 1840년 이전에는 100,000석 이상을 무상분급으로 사용한 사례가 빈번히 나타나는데 1840년 이후에는 단 한 차례만 100,000석 이상의 진휼곡을 사용하였다. 둘째, 진휼곡으로 사용하는 곡물이 대체로 해당 도의 곡식으로 충당되었다. 1840년 이전에는 해당 도의 곡물뿐만 아니라 다른 도의 곡물을 옮겨 와 사용하는 경우가 빈번히 나타났다. 그러나 이 시기에는 다른 지역의 곡식을 활용하는 사례가 현저히 줄어들었으며 그 액수도 적은 양에 불과하였다. 이와 함께 중앙에 올려 보내야 할 몫을 진휼 재원으로 활용하는 경우는 늘어났다. 이는 19세기 전반의 집중적인 재해로 인하여 환곡의 액수가 줄어들어 환곡에서 활용하던 재원을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환곡의 감소는 단순히 진휼 재원의 감소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환곡 이자를 중앙 재정과 지방 재정에 사용하던 상황에서 환곡이 감소하자 관에서는 남은 환곡을 통한 재정 확보에 주력하였다. 이로써 환곡은 ‘수탈적 부세의 기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 문용식, 『조선 후기 진정(賑政)과 환곡 운영』, 경인문화사, 2001.
- 이민수, 『조선 전기 사회 복지 정책 연구』, 혜안, 2000.
- 정형지, 「숙종대 진휼 정책의 성격」, 『역사와 현실』 25, 1997.
- 정형지, 「조선 후기 진급(賑給) 운영에 대하여」, 『이대사원』 26, 1992.
- 조규환, 「16세기 진제(賑濟) 정책의 변화」, 『한성사학』 10, 1998.
- 김훈식, 「조선 초기 의창 제도 연구」,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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