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자곡(軍資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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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란 및 국가의 위기 상황에 대비하여 정부의 관할 창고에 비축해 둔 곡식.

개설

본래 군자곡은 전란에 대비하는 비축곡의 성격을 띠지만, 흉년이 들었을 때는 굶주린 백성들에게 지급되는 진휼곡으로도 쓰였다. 조선전기부터 중앙에서는 여러 고을의 전세를 호조의 관할 창고에 수납한 후 남은 곡식을 군자감의 별창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지방관아에도 창고를 두어 군자곡을 비축해 두었는데, 이 때문에 지방에 소재한 읍창을 각관 읍창(各官邑倉) 혹은 군자의창(軍資義倉)으로도 불렀다.

한편 군자곡은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첨절제사(僉節制使)·만호(萬戶) 등에게 제공하는 물자가 부족할 경우 이를 보충하는 재원으로도 활용되었다(『성종실록』 3년 12월 21일). 이 때문에 조선전기부터 군자곡을 여타의 경비로 지출하는 문제점이 조정에서 자주 거론되었다.

내용 및 특징

조선왕조는 전답에서 경작한 농산물과 토산현물을 수취하여 국가 재원으로 활용하는 현물 재정에 기반하고 있었다. 중앙에 상납된 세곡(稅穀)으로 왕실을 부양하고 국가의 행정을 유지하였으며, 지방관아의 부속 창고에 비축된 곡식으로 전쟁에 대비하는 한편, 기근 시 진휼자원으로 활용하였다. 이처럼 중앙의 군자창과 지방의 읍창에 보관된 곡식은 명목상 군자곡이라 하더라도 농사의 작황에 따라 진휼곡으로 자주 전용되었다. 16세기 무렵부터 창고곡을 방출할 때 원곡의 손실분을 보충하기 위한 명목으로 회록법(會錄法)을 시행하면서 군자곡의 이자 수입은 재정 경비로 활용되었다.

변천

창고곡을 환수할 때, 원곡에 일정 비율의 이자를 적용하여 수취하는 회록법을 시행하면서, 군자곡은 호조를 비롯해 중앙의 재정아문에 경비를 보용해 주는 자원으로 이용되었다. 호조에서 지방에 보관해 둔 구관곡(句管穀)으로 진휼하고 나면 모자란 재원을 보충하기 위해 군자곡을 옮겨다 썼다. 두 차례 전란을 겪는 과정에서 보장처로 기능한 강화와 남한산성의 비축곡은 경기 지역에 흉년이 들었을 경우 진휼곡으로 쓰이는 한편, 호조에 경비가 부족할 경우 서울로 옮겨졌다. 또 호조와 선혜청 등에서 거두어들여야 할 세곡을 지방에 그대로 유치하여 진휼에 쓰고 난 다음 모자라는 중앙의 경비 역시 군자곡으로 해결하였다.

중앙으로 올라오는 세입이 한정된 상태에서 자연재해로 인해 흉년이 들었을 경우, 중앙정부는 농민의 재생산기반을 안정시키기 위해서라도 세를 줄이고 진대를 늘려야 했다. 이때 부족한 세수를 보충하고, 진휼곡으로 손쉽게 전용할 수 있는 것이 군자곡이었다. 다만 기근 시 민간에 나눠 준 군자곡의 경우 환수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에 조선후기에도 군자곡이 탕갈되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야기되었다.

참고문헌

  • 문용식, 『朝鮮後期 賑政과 還穀運營』, 경인문화사, 2001.
  • 박소은, 「17세기 후반 호조의 재정수입 확보책」, 『조선시대사학보』 31, 조선시대사학회, 2004.
  • 菅野修一, 「朝鮮初期 賑恤穀 운송 문제 : 朝鮮王朝의 國家的 再分配 기능에 대한 考察」, 『고문서연구』 22, 한국고문서학회,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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