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자복(世子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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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왕세자가 의식에 따라 달리 착용하던 옷.

개설

세자복(世子服)은 의식에 따라 면복(冕服)·원유관복(遠遊冠服)·서연복(書筵服)·관례전책복(冠禮前幘服) 등으로 구별할 수 있다. 면복은 주로 정지(正至)·성절(聖節)·망궐례(望闕禮)·배표의(拜表儀) 등의 의식에 착용하였고, 원유관복은 조하(朝賀)에 입었던 복장으로 조복(朝服)이라고도 한다. 서연복은 서연을 열고 글을 강론할 때 입었던 옷으로, 서연은 왕이 시사(時事)하시는 것과 같은 일이었으므로 서연복은 왕세자가 일상적[常服]으로 착용한 옷이라 할 수 있다.

연원 및 변천

세자복 가운데 면복은 1450년(세종 32) 사은사로 중국에 갔던 병조 참판 조서안(趙瑞安)과 형조 참판안완경(安完慶) 등이 처음으로 가져왔다. 그들은 중국 황제의 칙서와 함께 세자 면복을 가지고 돌아왔는데, 그 속에는 면복 1부와 팔유향조피사평천관(八旒香皂皺沙平天冠) 1정(頂), 칠장견지사곤복(七章絹地紗袞服) 1투(套), 심청장화곤복(深靑粧花袞服) 1건(件), 백소중단(白素中單) 1건, 훈색장화전후상(纁色粧花前後裳) 1건, 훈색장화폐슬(纁色粧花蔽膝) 1건, 훈색장화금수(纁色粧花錦綬) 1건, 훈색장화패대(纁色粧花佩帶) 1부(副), 홍백소대대(紅白素大帶) 1조(條), 옥규(玉圭) 1지(枝), 대홍소저사석(大紅素紵絲舃) 1쌍(雙), 대홍평라소금운룡협포보(大紅平羅銷金雲龍夾包袱) 3조(條) 등이 있었다(『세종실록』 32년 윤1월 7일).

이후 성종대에 왕세자를 책봉할 때 중국 사신이 “왕세자의 관복은 왕의 나라에서 직접 만들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450년 이후로는 왕세자 면복을 우리나라에서 만들어 입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1610년(광해 2) 예조에서 왕세자의 면복을 논의한 결과 1612년(광해 4) 왕세자 면복을 하사받았고, 그 후로 조하, 탄일(誕日)과 대사(大祀), 경성(慶成)에 칠장면복(七章冕服)을 갖추게 되었다.

왕세자의 원유관복은 1426년(세종 8) 왕세자에게 내린 조복이 처음으로, 오량관(五梁冠)·적라의(赤羅衣)·백사중단·적라상(赤羅裳)·폐슬·혁대·패수·흰 버선·검은 신[履]·상홀(象笏)이었다. 이후 1428년(세종 10) 왕세자에게 육량관(六梁冠) 1정(頂)을 내리면서 영원히 이를 제도화하라고 명하였다.

1493년(성종 24) 관복의 명제와 등급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이때 왕세자와 백관(百官)의 조복에 차등을 두어야 한다 하여 칠량원유관(七梁遠遊冠)과 강사포(絳紗袍)를 제안한 내용이 있다(『성종실록』 24년 3월 14일). 또 1500년(연산 6) 삭망(朔望)의 조하에 공복(公服)을 입어 왕세자와 백관에 차등이 없으므로 칠량원유관을 쓰도록 하자고 건의한 것으로 보아 왕세자의 칠량원유관 제도는 연산군 때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그 후 1744년(영조 20) 『국조속오례의보(國朝續五禮儀補)』「서례(序例)」에 따르면, 왕세자의 원유관(遠遊冠)은 왕의 것과 같았으나 량마다 8옥이 3채로 꿰어져 있는 팔량관(八梁冠)이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영조 때에 비로소 왕세자는 팔량원유관을 착용하였고, 삭망 조하와 정지, 생신에 하례 받을 때에는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게 되었다.

왕세자의 서연복은 상복(常服)이라 할 수 있는 익선관에 곤룡포였다. 왕세자의 익선관은 1448년(세종 30)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진 이후 착용되었다. 그 전까지 왕세자는 평각사모(平角紗帽)만 쓰고 있어 신하와 다름이 없었다. 세종이 1448년 왕세자의 익선관에 대해 제안하였을 때 우의정(右議政) 황보인(皇甫仁)은 익선관은 오직 왕만 쓸 수 있고, 다른 사람은 써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세종실록』 30년 4월 24일).

우찬성(右贊成) 김종서(金宗瑞)도 중국의 예법에도 면복을 입은 자가 익선관을 쓰는데, 군왕의 장자(長子) 이하는 옷이 면복이 아니므로 익선관을 쓸 수 없다 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마침내 왕세자가 면복을 받은 후에는 익선관을 쓰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한 것으로 보아, 왕세자의 익선관은 면복이 사여된 이후부터 착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왕세자의 곤룡포에 대한 기록으로는 1456년(세조 2) 겸양의 뜻을 두어 사조룡(四爪龍)을 착용하게 하였다는 내용이 있다(『세조실록』 2년 3월 21일). 1488년(성종 19)에는 왕세자의 상복으로 익선관·곤룡포를 조참(朝參)에 쓰면 좋겠다고 하여 상복을 갖추고 행례하였고(『성종실록』 19년 2월 25일), 1610년(광해 2)에는 칙서를 맞이할 때와 경연에 참석할 때에도 익선관과 곤룡포를 입고 예를 행하였다고 나와 있다(『광해군일기』 2년 11월 21일). 그러나 왕세자가 관례를 치르지 않았을 때에는 1667년(현종 8) 사부(師傅) 이하가 상견례를 행할 때의 복식과 똑같이 머리는 쌍동계(雙童髻)를 하고 곤룡포를 입었다(『현종실록』 8년 1월 30일).

왕세자의 곤룡포 색깔은 처음에는 왕과 같았다. 이로 인해 논란이 있었는데, 1594년(선조 27) 처음으로 “동궁은 서연회강(書筵會講) 때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는데, 그 빛깔이 붉어 어의(御衣)와 차등이 없어 민망했다.”고 하는 기록이 보인다(『선조실록』 27년 12월 25일). 1596년(선조 29)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심수경(沈守慶)은 이 논란에서 왕세자의 곤룡포 색깔로 흑색이 마땅하다고 주장하였고, 반면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윤두수(尹斗壽)와 좌의정(左議政) 김응남(金應南), 행지중추부사(行知中樞府事) 정탁(鄭琢) 등은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들어 곤룡적포(袞龍赤袍)가 마땅하다고 하였다. 윤두수 등은 왕세자의 복색을 흑색으로 썼다는 기록도 없다고 주장하여 합일점을 찾지 못하였다(『선조실록』 29년 4월 10일).

다만 순회세자(順懷世子)는 서연에서 항상 흑포(黑袍)를 입었고, 인묘(仁廟)가 동궁에 있을 때 입은 흉배는 흑색 바탕이었다고 하나 이 또한 정확하지 않았다. 따라서 언제부터 흑색 곤룡포를 착용하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1751년(영조 27)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는 왕세자의 곤룡포는 흑단(黑緞)으로 하고, 여름에는 흑사(黑紗)로 만든다고 나와 있다. 또 사조원룡보를 전후좌우에 붙인 것을 빼고는 모두 왕의 것과 같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곤룡포를 입을 때에는 옥대(玉帶)를 사용하였다는 기록을 볼 수 있는데, 1665년(현종 6) “무릇 국가의 대례(大禮)에 왕세자는 검은 옷을 입고 푸른 띠를 착용하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옥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옥대를 사용하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현종실록』 6년 8월 18일). 『국조속오례의보』「서례」에도 왕세자는 곤룡포에 옥대를 띠는데, 옥대는 조각하지 않은 옥으로 만들며 흑단으로 싸고 금으로 그림을 그렸다고 하였다. 다만 1665년 송준길(宋浚吉)은 왕세자에 책봉되지 않았을 때는 수정대(水精帶)를 착용해야 한다고 하여 왕세자와 다른 형제들의 복색에 차등을 두었다.

형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면복은 규(圭)·면(冕)·의(衣)·상(裳)·대대(大帶)·중단(中單)·패(佩)·수(綬)·방심곡령(方心曲領)·폐슬(蔽膝)·말(襪)·석(舃)으로 구성되어 있다. 『국조오례의』에는 면복의 형태에 대해서도 나와 있는데, 면복의 규는 구장복(九章服)의 규와 같은 청옥규(靑玉圭)이며, 길이는 9치이다. 면은 구장복과 같으나, 다만 유가 8줄이고 매 유마다 8옥이 주(朱)·백(白)·창(蒼)의 순서로 꿰어져 있다. 의도 구장복과 같으나, 다만 3장문이 그려져 있는데 화(火)가 위에 그려져 있고, 화충(華蟲)·종이(宗彛)가 그 위에 그려져 있다. 상과 대대·중단·패·수·방심곡령·폐슬·말·석이 모두 구장복과 같다.

원유관복의 형태는 다음과 같다. 규는 청옥으로 되어 있고, 관은 모라(帽羅)로 싸고 양 끝에 주조가 있는 것은 왕의 관과 같다. 다만 관의 량이 8량이며 매 량의 앞과 뒤에 8옥이 있는데, 적(赤)·백(白)·창(蒼)의 3채조이다. 포는 강라(絳羅)로 되어 있고 왕의 포와 같으며, 상도 강라로 되어 있고 역시 왕의 것과 같다. 대대는 비백라(緋白羅)를 합해서 꿰맸으며 역시 왕의 것과 같다. 중단은 백라로 만들었고 왕의 것과 같은데, 다만 불문을 좌우에 각각 4개씩 그렸고 깃 뒤에는 왕의 것과 똑같이 하나를 그렸다. 패·수·폐슬·말·석 등은 왕과 같았다.

왕세자의 서연복은 익선관·곤룡포·옥대·화(靴)로 구성되었다. 익선관은 왕의 것과 같고 곤룡포는 흑단으로 만들었는데, 여름에는 흑사를 썼다. 포는 왕의 포와 같았으나, 포의 앞뒤와 좌우 어깨에 사조원룡보를 부착했다. 대는 조옥(雕玉)으로 만들었고 흑단으로 싸고 금으로 그림을 그렸다. 화 또한 왕의 것과 같았다.

왕세자의 관례 전 책복을 보면 관례 전에 장복(章服)을 입을 때에는 쌍동계에 쌍옥도(雙玉導)를 꽂고 공정책(空頂幘)을 썼으며, 강사포를 입을 때에도 계책(髻幘)은 같았다. 상시(常時)에 입는 흑곤룡포에는 수정대(水精帶)를 띠고 계책은 역시 같았다. 공정책의 형태를 보면, 책(幘)은 면과 같은데 판(版)이 없고 유(旒)도 없으며, 모라(毛羅)로 싸고 지금(紙金)으로 장식을 하였고, 양쪽에 붉은색 끈[朱組]이 있었다.

용도

세자복은 의식에 따라 달리 착용하였다. 1471년(성종 2) 예조에서 올린 왕세자의 관복 제도를 보면, 정지·조하·탄일과 대사·경성에는 왕세자가 칠장면복을 갖추었고, 보통 때에는 익선관에 곤룡포를 갖추었다(『성종실록』 2년 6월 15일). 삭망 조하와 정지, 생신에 하례 받을 때에는 공복을 갖추었는데, 군신과 더불어 명제(名制)의 분별이 없으므로 왕세자가 원유관에 강사포를 갖추게 하는 것이 좋겠다고 논의하였다. 이후에도 왕세자의 조복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논란이 있었으나, 1500년(연산 6) 이후 왕세자의 삭망 조하에는 칠량원유관에 강사포를 착용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6년 12월 12일).

생활·민속 관련 사항

효명세자의 통과의례별 복식에 대한 기록을 통해 생활·민속적 관련 사항을 알아볼 수 있다. 먼저 책례(册禮) 복식은 아직 관례를 치르기 전이므로 책(册)을 받기 위해 소차(小次)에서 나올 때에는 쌍동계·공정책·칠장복을 착용하였다. 다음으로 입학례(入學禮) 복식을 보면, 출궁할 때에는 쌍동계·공정책·곤룡포를 착용하고, 작현례를 행할 때에는 청금을 입고 연두건을 쓰고 세조대를 띠었다. 입학 시에는 학생복을 입었고, 하례를 받을 때에는 원유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다.

관례 복식을 보면 초가례를 치를 때에는 공정책을 쓰고 도포를 입고 방에서 나왔는데, 나온 후 초가관으로 익선관을 쓰고,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가서 곤룡포를 입었다. 재가례에서는 초가관을 벗고 재가관인 원유관을 썼다. 다시 동서의 장막 안으로 나아가 강사포를 입은 뒤 규를 잡고 나왔다. 삼가례에는 재가관을 벗고 삼가관인 면류관을 썼다. 다음으로 동서의 장막 안으로 나아가 면복을 입고, 규를 잡고 나와서 자리로 나아가 앉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다음은 가례(嘉禮) 복식으로 가례는 육례의 절차에 따라 행해졌는데, 납채(納采)에는 면복을 입고 납징(納徵)에는 원유관·강사포를 입었다. 고기(告期) 시에는 면복을 입었으며, 책빈(冊嬪)을 하는 과정에서는 익선관에 곤룡포를 입었다. 아버지인 왕으로부터 훈계를 듣는 임헌초계에는 면복을 입었고, 세자빈을 맞이하러 가는 친영의(親迎儀)에도 면복을 입었다. 세자빈과 음식을 같이 먹는 동뢰연(同牢宴)에는 조복을 입었고, 동뢰연이 끝난 뒤에는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효명세자는 왕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하였으므로 당시의 복식을 살펴보면 조참을 받을 때에는 익선관·곤룡포를 착용하였으며, 하례를 받을 때에는 원유관과 강사포를 착용하였다. 다만 여기서 익선관·곤룡포는 왕세자의 서연복이라기보다는 시사복(視事服)의 의미가 더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 『문조신정후가례도감의궤(文祖神貞后嘉禮都監儀軌)』
  • 『춘관통고(春官通考)』

관계망